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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미디어인가
[김상덕의 미디어와 한국교회] '가짜 뉴스' 신드롬…괴벨스의 악령 물리치려면
  • 김상덕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12.28 09:08

21세기, 한국에서 아기 예수가 나셨다고 가정해 보자.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천사가 찾아와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곳을 알려 주는 쪽지를 주었는데, '중앙동' 세 글자 외에 다른 정보가 없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 소식을 빨리 알려야 하는데 정확히 어느 '중앙동'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왜 하필 예수님이 중앙동에서 나셨을까. 의견이 분분하다. 교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 회의를 소집한다.

사무실 창가 좌측에 앉은 사람들이 말한다.

"아기 예수는 소외된 자, 고통받는 자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중앙동은 아마 안산시 중앙역이 있는 중앙동을 말할 것입니다. 안산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오신 것은 다문화 사회를 사는 이 시대에 너무도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사무실 우측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웅성거린다. 그리고 일어나 말한다.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오심을 정치적 견해로만 해석하는 것은 크신 하나님의 구원을 제한하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기 예수는 안산이 아니라 평양에 위치한 중앙동물원에서 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며, 그분의 나심은 한반도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분은 말구유에 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동물원이 확실합니다."

'중앙동' 세 글자가 '중앙동물원'의 앞 글자라니…. 두 그룹의 사람들은 흩어져 각자 추론대로 이 소식을 알렸다. 한쪽은 안산시 중앙동으로, 다른 한쪽은 평양 중앙동물원으로. 서로 다른 정보와 함께 아기 예수의 나심을 전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진보 그룹은 대대적으로 거리 집회를 열고 정부와 억압자들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냈다. 보수 그룹도 맞불을 놓았다. 대규모 기도회를 열고 북한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평양에 복음화가 이뤄지기를 위해 기도했다.

한쪽에서는 아기 예수의 나심을 상징하는 촛불을 들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유와 통일 그리고 평양의 예루살렘'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나왔다. 이들은 서로를 비난했고 서로를 믿지 않았다. 누구도 직접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기 예수의 나심은 그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선동의 소재가 됐다.

다시 언론을 생각하다

왜 다시 미디어인가. 이 글을 연재하면서 내가 가진 두 관심 영역을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나는 한국 사회 갈등과 평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둘째, 이 주제가 일어나는 사회현상으로 언론 및 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있다.

후자부터 말하면, 미디어는 내게 텍스트다. 나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 미디어 세상, 이곳은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을 통해 다양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수많은 의미를 주고받는다. 한국 사회 중요한 키워드 '소통'은 주로 '내 얘기를 좀 들어 줘'라는 말로, '독불장군' 방식의 반대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불통 또한 소통의 한 부분이다. 소통이란, 일방향적 혹은 양방향적 표현과 수용적 혹은 비판적 인식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또한 소리, 언어, 몸짓, 시각 및 글과 기호, 상징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소통이란, 내게는 뉴런(신경 세포)과 같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 뉴런을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한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 먼 거리에서 전체적으로 보이는 사진을 찍듯이 살피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과 사람을 넘어, 집단과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소통, 그것이 이루는 의미 체계와 생활 방식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을 좋아한다. 다시 말해, 내 관심사는 미디어가 관계하는 사회적 인식의 과정, 즉 의미와 담론을 형성하는 문화적 기제로서 미디어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면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문화 연구자에 더 가깝다.

미디어에 대한 나의 관심은 평화를 향한 관심에서 비롯했다. 평화라는 거대한 담론을 이해하고 실천할 도구가 필요했다. 내게는 미디어가 바로 텍스트였고 도구였다. 평화와 언론(미디어)이라는 두 분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평화를 위한 언론·미디어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특별히, 언론·미디어는 어떻게 갈등을 야기하는지, 또는 평화로운 사회를 세워 가는 데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지 묻고 답하고자 했다.

여기서 '평화'는 총체적 개념이다. 구조적·사회적·문화적 영역을 포함한다. 한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로 발전하려면, 물리적 폭력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총체적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 마치 평화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사회적 토대가 필요한 것과 같다. 유네스코는 평화를 위한 사회적 토대를 '평화의 문화'(A Culture of Pea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사회적 조건 8가지를 제시한다.1) 그중 하나가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다시 말해, 언론·미디어는 평화의 문화를 세우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가짜 뉴스 신드롬

원론적 이야기부터 하자면, 언론 및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이자 민주 사회를 위한 근간과 같다. 민주주의 원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도 따른다.

'왜 다시 미디어인가'라는 질문을 한국 사회에 대입해 보자. 한국 사회에서 다시 언론 및 미디어의 중요성이 주목받고 있다. 한 일간지는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를 이른바 가짜 뉴스의 진원지로 지목했다. 이는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으로, 소모적 비판이 아니라 신중하게 시시비비를 잘 가려야 할 문제다.

언론사는 사실에 근거해 주장해야 하는데, 추측성 기사를 통해 마녀사냥을 했다면 큰 잘못이다. 반대로,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기독교 전체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는 셈이다. 진리를 추구하고 가르쳐야 할 종교가 가짜 뉴스를 만들거나 유포하는 행위에 가담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일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을 수 있다. 그 목적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면, 그 역시 상당히 이뤄진 듯하다.

가짜 뉴스(fake news) 신드롬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영미권을 중심으로 일어난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있었다. '브렉시트'(Brexit)와 '트럼프 대선 캠프' 현상이다. 이는 주류 언론과 민주주의 제도에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버드대학교 '니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미국 대선에서는 약 360개의 주류 언론이 클린턴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지만 트럼프를 지지했던 주류 언론은 11곳이었다.2)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와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기이한 공약을 공개하거나 즉흥적 멘트를 날려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문제는 트럼프의 주장 중 근거가 없거나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토론토의 한 기자가 트럼프의 언론 플레이를 분석한 결과, 그해 9월 15일부터 투표일까지 하루 평균 20번의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3) 가짜 뉴스 신드롬의 등장은 디지털 시대 대중이 언론 미디어를 접할 때 기사의 사실 여부보다 자극적 제목이나 주장에 더 쉽게 노출되고 영향받는 현상을 말해 준다.

이를 계기로 영미권을 비롯해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각 언론사들은 가짜 뉴스 대응을 위한 전략으로 '팩트 체크' 전담반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미디어 특성상 쉽게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가짜 뉴스에 일일이 대응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숙한 시민 의식, 미디어 리터러시가 재조명받는 이유도 여기 있다(이 부분은 향후 다시 다루기로 한다). 문제가 복잡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언론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 과잉화

언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짜 뉴스의 늪에서 벗어나 다시 언론의 공적 기능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조명받는 것이 '언론의 책임'(Accountable Journalism)이다. 언론을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기준은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는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선정하는 '언론 자유 지수'(Press Free Index, PFI)가 대표적 예다.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을 지나면서 심각한 언론통제를 겪었기에 언론의자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구조적 개선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4)

반면, 언론의 책임 개념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2018년 영국 <로이터> '디지털 뉴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뉴스의 신뢰도(Trust in the News Media)는 25%다. 전체 조사 대상 37개국 중 최하위다.5) 왜 한국 언론이 낮은 신뢰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원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먼저, 오늘날 사회는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기 어려운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다. 이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기에 언론이 진실을 보도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다.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가 공정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재현되는 과정을 통해 진실을 합의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언론이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 역할은 공영방송이 감당해 줘야 한다(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또 다른 분석은 한국 언론이 지나치게 정치화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언론의 정치 과잉화 현상은 사람들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게 하기보다 상황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단순화해 모든 것을 이념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린다. 그 결과, 비합리적이고 배타적인 집단 정체성이 생긴다. 타자를 향한 관용이 낮아지고 폭력적이거나 적대적인 사회 문화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갈퉁은 주류 언론이 폭력적 갈등을 다룰 때 지나치게 사건을 단순화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과 악', '우리와 그들'로 나누면서 만들어 내는 이분법적 보도 프레임의 한계를 지적한다. 영국·호주 등을 중심으로 '평화 저널리즘'이 대안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이와 같은 언론의 과잉 정치화와 무관하지 않다.6)

한국의 언론은 지나치게 정치화했다. 마찬가지로 일부 개신교 단체가 가짜 뉴스를 양산하고 유통하는 일에 연루돼 있다는 오명은 어쩌면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화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한국의 언론과 종교는 민주 사회에서 긍정적 기능을 잃고, 시민들에게서 신뢰 또한 잃고 있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라 선동이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믿고 다양한 생각과 표현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것 또한 바른 언론의 자세가 아니다.

언론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성과 독립성, 공정성과 인류애,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잃어버릴 때,7) 언론은 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전락한다. 나치를 찬양하고 맹목적 복종을 유도했던 요제프 괴벨스의 악령이 한국 사회를 떠도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자문해야 하는 이유이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언론은 갈등을 유발하는가, 평화를 증진하는가. 언론이 정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정치적(종교적) 집단은 이를 악용한다. 진실을 보지 않는다. 사안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고 그런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 갈등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한국 시민은, 충분히 신중하고 이성적이며 관용적인 미래 지향적 판단을 내릴 능력이 결여돼 있는가. 언론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부 정치 집단들이 언론을 이용해 그렇게 선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언론이 달라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실에 입각한 언론의 공정한 보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언론 보도의 필요성은 평화롭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토양이다. 적어도 거짓 정보나 근거 없는 정보로 서로를 비난하는 등 소모적으로 갈등하는 일은 줄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은 필요하다

21세기 한국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난다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각자의 신학적 견해나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다를 수 있다. 그랬을 때 이를 따지는 토론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이라면 두 집단이 서로 다른 견해로 싸우기 전에 예수가 어느 '중앙동'에 나셨는지 조사해 봐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소모적 갈등을 줄이고 건설적 소통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언론·미디어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덧. '중앙동' 지명은 시·구 단위의 행정 지역을 지칭할 때 가장 흔히 사용되는 이름 중 하나다. 전국에 약 37곳의 중앙동이 있다. 끝.

1) '평화의 문화'(A Culture of Peace) 프로젝트의 세부 8가지 항목은 △평화교육 △지속 가능한 개발 △인권 △남성과 여성의 평등 △민주적 참여 △이해·관용·연대 △정보·지식의 자유로운 소통 △국제적 평화와 안보다.
2) http://www.niemanlab.org/2016/11/has-election-2016-been-a-turning-point-for-the-influence-of-the-news-media/
3) https://ethicaljournalismnetwork.org/resources/publications/ethics-in-the-news/fake-news
4) 2018년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한국은 43위로 미국(45위), 일본(67위)보다 앞선다. 이는 2016년 70위에서 상당 부분 상승한 결과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6890
5) 37개국 평균 신뢰도인 44%와도 큰 격차를 보인다. 참고: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4958
6) 언론의 이런 현상은, 정치화 외에도 상당 부분 상업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주제는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기로 한다.
7) 영국 Ethical Journalism Network(EJN)을 창립한 Aidan White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Accountable Journalism)을 위해 이 다섯 가지 원리를 핵심으로 제안한다. https://ethicaljournalismnetwork.org/who-we-are/5-principles-of-jour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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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장종근 2018-12-29 10:57:30

    미국이 냉전시대 도구로 이용된 한국 개신교회가
    무서워 졌습니다. 말이 교회이지 지유당의 압재비들입니다.

    군사쿠테타 박정희 전두환 뒤에
    미국CIA가 있었을 것. 군작전권은 미군이 가지고있었으니까.

    교회는 군사독재 자본독재가 편안하게 독재 할 수 있도록 자장가 불러 주는 곳이죠.

    옛날 나치 때도 가독교가 그랬죠.
    사라져야 할 종교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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