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하루에 지나가는 버스도 몇 대 없는 프랑스 작은 시골 마을 떼제(Taizé)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화해와 일치'를 상징하는 곳이 됐다. 이 도시에 자리 잡은 떼제공동체 때문이다.

화해와 일치의 떼제공동체에는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수사들이 살고 있다. 공동체를 세운 로제 수사는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인이었고, 지금 원장직을 맡고 있는 알로이스 수사는 가톨릭교인이다. 수사들처럼 방문자가 지닌 신앙의 결도 다양하다. 가톨릭·개신교·정교회를 믿는 그리스도교 청년들이 떼제를 찾는다.

떼제공동체는 지난해부터 마을 곳곳에 무슬림 난민 가족을 받아 함께 머물고 있다. 정기적으로 '무슬림과의 대화' 시간을 만들어 떼제공동체를 방문한 그리스도교 청년들과 무슬림들이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건 아니다. 참석자들은 서로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나누는 데 주력한다.

떼제공동체는 왜 화해와 일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서로 다른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할까. 홍콩 국제 모임을 마치고 잠시 한국을 찾아 한반도 평화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던 알로이스 원장수사를 8월 1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만났다.

그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 예수를 따라 서로의 다름을 더 잘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떼제공동체 알로이스 원장수사를 8월 1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잘 모르는 존재 배척과 혐오는
복음 아닌 두려움에서 오는 것"

- 여기 오는 길에 광화문과 대한문에서 집회하는 수많은 사람을 봤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한반도에 감도는 평화의 기운을 '위장된 평화'라고 이야기한다.

이 더운 날, 많은 사람이 모여 굉장히 시끄러운 집회를 이어 가는 것에 좀 놀랐다. 북한 독재 정권을 향한 두려움은 이해하겠다. 역사적으로 워낙 상처가 깊지 않나. 하지만 정치인이 그들의 두려움을 악용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저들 중에도 기독교인이 많다. 하나님을 위해 집회에 참여했다고 이야기한다.

저 모습은 신앙 혹은 복음이 아닌, 두려움에서 시작된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저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두려움이 우리를 잠식하게 두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추구하기 원하시지, 온갖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는 걸 원치 않으신다.

화해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아서 그렇다는 건 알지만, 기독교인이라면 너무 두려워하지만 말고 예수님이 이 모든 과정을 이끌고 계시다는 걸 믿자. 또 한 가지, 평화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었듯, 우리도 마찬가지다.

- 현재 한국 사회도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무슬림 난민을 배척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 안에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을 직면해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보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에게도 장벽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인정한 다음에는 '한 사람'을 찾아가면 좋겠다. 예를 들어, 제주에 있는 예멘 난민 한 사람을 만나는 거다. 그가 왜 한국에 와야만 했는지 직접 듣고 개인적으로 관계를 쌓아 가면, 그들을 다른 시각으로 대할 수 있다.

유럽에서도 난민을 향한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다. 떼제공동체는 더 많은 난민을 환대하려 노력한다. 그동안 르완다·베트남 등에서 온 난민들과 함께 살았다. 지금은 무슬림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 수사들도 낯선 이들을 만나면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이 사람들은 누굴까', '왜 왔을까' 등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깐이고 빠른 속도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강점이다.

무슬림들에게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라'고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먼저 그들과 친구가 되시고, 그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시지 않겠나. 나는 종종 수사들에게 "예수님이 각 사람을 위해 죽으라고 하시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니까. 그래서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 어렵겠지만, 어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다.

지난 6월 한국 승려 30명이 프랑스 떼제공동체를 찾았다. 알로이스 원장수사는 타 종교인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떼제 페이스북 갈무리

-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을 전도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동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기독교 신앙에 더 깊게 뿌리내릴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열 수 있다. 그들과 이야기 좀 나눈다고 내가 신앙을 잃거나 그들이 날 개종시킬 수 있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초대교회 사람들도 유대인 공동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다른 민족에게 찾아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신앙을 공유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해 들은 것 아닌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 가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다. 그게 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전하라는 뜻이다. 또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거다. 말과 삶이 다르면 말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선교'라는 건 신앙을 일부러 드러내는 게 아니다. 조금 느슨한 마음으로 다른 종교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첫 단계다. 이후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 기독교 신앙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이 무슬림 난민보다 그리스도인인 나를 더 사랑하실까. 아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무슬림도 사랑하신다. 그걸 이해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사람과 교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향한 목마름 유지하면서
연약함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만날 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

- 홍콩 국제 모임 주제는 '신뢰와 화해의 순례'(The Pilgrimage of trust and reconciliation)였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준 신뢰'를 중요하게 언급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신뢰는 우리 삶의 가장 중심적인 태도다.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누군가를 신뢰하고 신뢰 얻는 법을 배운다. 신뢰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물론 나를 향한 두려움이 발생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으셨던 것처럼 우리를 믿고 계시다. 그는 우리에게 낯선 이를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그걸 배우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신뢰를 발견하는 건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 산다. 특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직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가 많다. 이들은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홍콩 국제 모임에서 묵상을 나누는 알로이스 원장수사(왼쪽). 떼제 홍콩 모임 페이스북 갈무리

-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현대사회가 세속화의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하나님·사랑·평화를 향한 목마름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바쁘고 여기저기서 압박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목마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시대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그게 우리를 더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다. 경쟁 사회를 벗어나 서로 연합하는 사회로 이끈다.

떼제 기도회 순서 중 '십자가 기도'라는 게 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가운데 놓고, 그 십자가에 몸 일부를 대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누구나 십자가 기도에 함께할 수 있지만, 한 번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수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자기 차례가 오기까지 긴 줄을 서야 한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까지 십자가에 다가가는 것은, 자신들이 진 짐을 내려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떼제에 온 젊은이들을 보면 겉으로는 기뻐 보이지만 각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기도회 끝나고 수사들과 대화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많은 젊은이가 수사들에게 자신의 짐에 대해 나눈다. 들어 보면, 대부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질문에 우리는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걸 나누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본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다 보여 줄 수 있는,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극도의 경쟁 사회는 구성원의 연약함을 견디지 못한다. 언제나 강하고, 성공적이고, 기뻐하는 모습만 강요한다. 가장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

- 프랑스 떼제공동체는 물론 홍콩 모임에서도 하루에 세 번 모여 함께 기도했다. 함께 기도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함께 기도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연합하게 한다. 오직 예수만이 서로 다른 우리를 받아 주고, 그 안에서 우리를 한 몸 되게 한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예수는 우리 모두를 환영해 준다. 기도를 지속하는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 물론 현실에서 교회는 여전히 분열돼 있지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기도할 때 예수의 임재를 같이 느낄 수 있다.

- 떼제공동체에서는 '화해'를 강조한다. 그냥 모른 척 살아가면 안 되나. 왜 우리가 화해해야 할까.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 돼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그 명령에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갈라져 있는 건 비극이다.

분열은 언제나 있었다. 열두제자 가운데도, 초대교회에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연합'이 실현된 적은 없다.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하나가 된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종파, 서로 다른 교회에서 오는 청년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이 명령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알로이스 원장수사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해 기도회가 평화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참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그것을 위해 많이 몸부림친다. 내가 평화를 억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사람들과 만나면서 평화를 받아야(receive) 한다. 꾸밈없이, 내 본연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경험에서 평화를 느낄 수 있다.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평화가 찾아온다.

성경에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가 나를 영접했다'는 말씀이 있다. 타인에게 다가가 대화하는 것으로 그 말씀을 직접 실천해 보자. 종교적인 일을 떠올리지 말고 인간적으로 하자. 예수님은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위대한 영적 존재가 되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조건 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더 인간적으로 변모하길 바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은 물론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했을 때나 잘못했을 때나 우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는 변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그 사랑으로 우리가 매일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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