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당시 95회 대한예수교회장로회 통합(예장통합·최기학 총회장) 총회 주제는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였다. 필자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당시, 총회나 노회에서 이 주제를 위해 열심히 프로그램을 홍보하던 기억이 있다. 8년이 흐른 지금, 주일학교가 30% 전후로 감소한 통계를 보며1) 여러 생각이 든다. 출산율 때문에 인구가 감소했다 해도, 구호만 내세워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우리가 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근본적 개혁과 변화가 없다면, 교회의 교회 됨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예장통합 102회 총회 주제는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였다. 하지만 거룩한 교회 모습을 회복한다는 총회의 외침이 지금과 같이 공허하게 들리는 때가 없다.

이미 필자는 11월, 명성교회 세습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명성교회 세습은 하나님의 의를 거스르며 그 뒤에는 목회자와 그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우상숭배의 모습이 있다고. 동시에 이 일에는 명성교회뿐만 아니라 총회와 재판국의 정의롭고 올바른 결정이 요청된다고 말이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를 해결할 총회가 여전히 공의롭게 재판을 진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이에 울분을 느끼고 있다.

102회 총회 구호처럼 '거룩한 교회가 다시 세상 속으로' 다시 가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 몇 개월간 명성교회 세습 재판을 다루는 과정에서 세습에 찬성하는 여러 주장이 들린다.

"명성교회는 예장통합 대표 교회이다. 어떻게 그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는가."
"명성교회 일은 개교회 일이다. 다른 교회나 목회자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명성교회가 세습을 통해 예장통합에 더 크게 기여하고, 농촌 선교와 같이 더 많은 일을 감당할 것이다."

이 같은 주장들 때문에 총회와 재판국이 판단을 어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총회가 거룩한 교회 됨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구호를 넘어서고, 재판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바라는 마음에 다시 이렇게 글을 쓴다.

거룩한 교회

거룩한 교회는 무엇인가.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kadoshi)에는 '분리되다', '구별되다'라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 이에 따르면, '거룩하게 됐다'는 말은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일에 구별됐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 가치와 다른 무엇을 지닌, 분리되고 구별된 독특한 특성을 지닌 공동체다.

먼저 세상의 가치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힘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경쟁 상대로 재물을 이야기한다. 재물;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맘몬'(mamonas), 즉 '돈의 신'이다. 돈이 주인이 돼 정직·순결·정의 같은 좋은 가치를 잠식하고, 모든 인간성을 말살하고, 돈을 통해 인간 스스로가 높아지고 억압·지배를 추구하는 구조가 하나님과 대립되는 세상의 가치다. 주님은 결코 이런 세상과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교회가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교회 됨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맘몬과의 대립을 말하는 마태복음 6장 전 부분과 산상수훈 첫 번째 부분 지복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 하나님나라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개역한글판에서는 심령, 영이 가난한 자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를 실재적으로 '가난한'[히브리어 '아니'(ani)] 자로 표현한다(눅 6:20).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표현들은 하나님나라 핵심인 교회의 출발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교회는 세상의 돈과 맘몬이 다스리는 가치와 철저히 다른 '가난한 영'을 소유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난'의 구체적인 말은 무엇인가. 히브리어에서 놀랍게도 이 '가난한'과 동일한 어근을 가진 단어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지복설교 세 번째에 등장하는 '온유한'[히브리어로 '아나'(anaw)]라는 단어이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마 5:5)."

구약성서에서 '온유한 자'라는 표현은 종종 하나님 말씀을 따르다가 고난받는 의인을 묘사할 때 썼다. 구약 옛 선지자 이사야 말처럼, 그들은 경건해서 말씀 앞에 떨 줄 알았으며(사 66:2), 말씀을 지키다가 능히 가난해져도 상관없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지키는 선택 외에 고려할 게 없는 것이다.2)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알 수 있게 한다. 주님은 교회의 출발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신다.

"너희가 이 세상의 맘몬, 돈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세상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참으로 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갈급해한다면, 오직 나의 말씀에만 순종하고 온유함으로 너희 것을 세상과 나누기를 기뻐한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인 교회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해 하늘의 기업으로 땅을 얻는 것을 보게 할 것이다."

진정한 십자가의 길

교회의 영광, 하나님나라를 세상이 보고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찾아오는 것으로 그분의 통치가 임하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면, 참으로 거룩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무엇인가 구별된 독특한 향기를 느끼고, 그리스도께 나아와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땅을 포기하고 굴복하는 일, 이는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교회의 거룩성 회복, 심령의 가난과 온유, 낮아짐의 길로 가는 것에서 나온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을 줄 아는 희생과 헌신, 진정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며 자아에 대해 죽는 길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유일하게 거룩성을 회복할 방법이다. 거룩은 인간이 의지를 사용해 율법적으로 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지키고자 노력한다고, 재물을 다 포기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룩은 성경의 일관한 주제처럼, 말할 필요도 없이 거룩하신 성령과 동행하는 데서 오는 게 틀림없다.

그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회심한 그 상태, 부유한 상태로 우리를 두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맘몬에 물들어 있는 세속적인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교회를 부요한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을 닮게 하신다. 부요한 자리에 계셨다가 가난한 자리로 오셔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신 그 주님(고후 8:9), 기꺼이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의 길과 죽음을 감수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 그 주님, 그분의 거룩함으로 교회를 인도하심에 틀림없다.

총회가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라는 메시지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형 교회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그것을 깨뜨려 가난한 자들에게 줘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화려한 헤롯 성전과 같은 건물이나 성공의 자리를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하는 가난한 심령이 돼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사치스러운 베드로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팔았을 당시, 개신교의 아버지 종교개혁자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중략)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죽음, 지옥을 통하여서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평안의 보장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행 14:22)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 - 95개조 반박문 93~95조3)

필자는 질문해 본다. 총회 임원과 재판국원에게 진정 개신교 정신,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난, 종교개혁자 루터 정신을 계승하는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한 진지한 결단이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구호가 아닌 가난과 고난과 희생의 가치를 삶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결단,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참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그런 결단이 있는지 말이다.

결단이 있다면, 총회 내 여러 병폐와 금권 선거 같은 관행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번 명성교회 세습 판결에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번 세습 판결 쟁점은 단지 명성교회라는 개교회를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가 물려받는 것에 있지 않다. 그곳에는 여러 금권의 개입, 불합리한 재물의 사용, 막대한 부의 축척을 그대로 세워 가고 물려주는 것에 찬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총회 재판국이 세습에 찬성한다면, 그것에 그냥 '예'라고 옹호하고 넘어가는 셈이다.

명성교회가 세습을 하고 이를 지지하게 하기 위해 사용한 돈은 얼마일까. 그 재정을 통해 어떻게든지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가난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권력과 건물을 소유하고, 이를 움켜쥔 채 놓지 않고 붙잡으려고 시도한다면, 굳이 세습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세습 직후 명성교회는 미자립 교회 선교 헌금을 더 증액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선교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4) 돈을 더 좋은 일에 많이 쓰고, 돈으로 선교적으로 좋은 성과를 이뤄 낸다면,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명성교회가 초창기부터 농촌 선교 등 훌륭한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많이 해 왔다는 것에 무척 감사한다. 하지만 이를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와 같이 여긴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특히 세습에 반대하는 미자립 교회 지원금을 끊는 것은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 가치와 굉장히 닮은 모습이다. 말을 들으면 더 많은 지원금을 주고, 듣지 않으면 돈을 마르게 하는 행태는 세상 기업이 많이 보여 주는 모습이다.

루터는, 돈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종교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개신교(Protestant, 저항자) 정신으로 통렬히 비판했다. 종교개혁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칭의'라는 신학적 발견의 기본을 넘어선 사건이었다. 그것은 교황, 주교가 있는 인간의 높은 자리와 권력, 돈의 우상숭배 문제를 건드리고 면죄부와 그 체제를 뒤흔든 교회 개혁이었다.

명성교회 세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는 분에게는, 루터의 정신을 알고 있는지 되돌려 질문하고 싶다. 명성교회 세습은 한 대형 교회의 도덕적 잘못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교단 전체가 세습과 맘몬의 가치를 정당화할 수도 있고 타락으로 갈 수도 있는 문제다. '거룩한 교회'의 거룩성을 진정 회복하기 원한다면, 이 문제에 침묵하고 '예'라고 말하며 그냥 지나갈 수 없다. 단호히 이 문제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가난과 온유의 정신이 교단 안에 흐르도록 바꿔 가야 할 것이다.

공교회성 회복

개신교는 흔히 니케아신경에 근거해 교회의 4가지 본질적 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특성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 됨을 인식할 때, 다른 이웃을 볼 수 있고 공동체성을 가질 수 있다. 공동체적 보편 교회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사랑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사랑이야말로 거룩의 핵심이자 주님이 사도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보편적 교회, 공교회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깊은 우려가 든다. 모든 교회가 인종이나 신학이나 지역 등 다양성 가운데서 다른 환경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결국 하나다. 개교회가 특정한 행동을 할 때, 개교회 하나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메시지가 니케아신경 안에 담겨 있다.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만연한 생각은 무엇인가. 개교회우선주의다. 개교회는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생각에 빠져 다른 교회에 미칠 악영향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공교회 의식 부재, 하나의 교회라는 의식이 없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깊은 우려가 든다.

'내 교회만 세습해서 잘되면 문제없지. 왜 다른 교회까지 우리 교회가 신경을 써야 하는가.'

이 같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 교회의 거룩을 무너뜨리고, 목회자와 교회의 윤리 의식도 결여하는 데까지 이어져 왔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공교회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2-3)".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마치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과 같이,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은 자신의 안위, 자신의 조직, 자신의 명예와 돈, 자신의 성공을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고 움켜쥐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세습도 주저하지 않으며 그것을 묵인하고, 명명백백한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결하기보다 여러 이익과 사람의 눈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심령의 가난과 온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거룩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계속해서 한국 개신교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기에 말이다.

공정하게 판결해야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가오는 총회 재판국에 바른 판단을 호소하는 바이다.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예장통합 교단이 정말 '거룩한 교회, 세상 속으로'라는 구호를 회복하기 원한다면, 공교회성을 회복하고 맘몬의 지배를 벗고 주님의 십자가를 좇아야 할 것이다. 기득권을 버리고 낮아지고 가난해지는 길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그곳에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기업인 땅이 있으며, 교회의 거룩이 있고 영광이 있다. 그곳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교회의 신앙고백이 살아 있으며, 사도들의 선교적 신앙이 살아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총회 재판국이 하루빨리 헌법 28조 6항 세습방지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해서 재판을 마무리해 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명성교회 세습을 되돌리고, 교단 내 교회들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할 수 있도록 올바른 판단을 내려 주기를 부탁한다.

경혜수 /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회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2005학번,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06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군목으로 목회했다.

각주

1)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31141&code=23111111&cp=nv 이 기사에는 2011~2015년 통계가,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35412&section=sc4 여기에는 2016년 102회 총회의 교회학교 통계가 나와있다.
2)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새물결플러스) 제12장에 나오는 가난과 온유 개념을 보라.
3) <기독일보>의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전문' 김재성 번역을 참조했다.
4) 명성교회의 미자립 교회 지원금과 관련한 문제는 <뉴스앤조이> 다음 기사를 참조하라.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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