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인에게도 발언 기회를 달라!"
"나는 AIDS 환자다. 내가 죄인인가, 왜 나를 혐오하나. 왜 나를 범죄화하고 유해하다고 하나!"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반동성애 진영이 준비한 '세계 에이즈의 날' 행사 '디셈버 퍼스트'(December First) 행사장에서 HIV 감염인이 울부짖었다.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곳곳에 HIV/AIDS 인권 활동가들이 서서 "AIDS 혐오는 HIV 감염인 인권과 함께 갈 수 없다", "감염인 인권 증진은 AIDS 예방의 지름길이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 행사 중간, 발언권을 요구하는 인권 활동가들과 이를 제지하는 주최 측의 실랑이가 10분간 지속됐다.

전 세계가 '에이즈의 날'로 지정한 12월 1일 열린 '디셈버 퍼스트'는 '청소년 AIDS 예방'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사실 보수 개신교계 반동성애 행사와 다르지 않았다. 국회의원들과 개신교계 반동성애 운동가들, 다양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이 행사는 11월 30일 대구에서 열린 데 이어 서울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도 열렸다. 자유한국당 성일종 의원이 주최 측에 이름을 올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영길 변호사의 발언이 끝나자, HIV/AIDS 인권 활동가들이 일어나 플래카드를 펴 보였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발언권 요구한 HIV/AIDS 활동가들
야유·실랑이 끝에 1분 발언 뒤 퇴장

행사 시작 전, 한효관 대표(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는 "이 자리에 동성애자님도 오셨다고 들었다. 좋은 행사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혹시 돌발 사건이 일어나면 여러분이 받으신 플래카드를 펼쳐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조영길 변호사(법무법인 아이앤에스)가 개회사를 맡았다. 조 변호사는 "인권 보도 준칙 때문에 AIDS와 동성애의 연관성을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세상은 혐오, 인권침해라고 하면서 매도한다. 동성애 독재 시대, AIDS 독재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활동가들이 등장하자 참석자들도 플래카드를 펴고 "물러가라"고 외쳤다. 뉴스앤조이

개회사가 끝난 직후, 객석에서 한 남성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이 자리에 HIV 감염인도 있고 HIV/AIDS 인권 단체 관련자들도 있다.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내 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발언권을 달라는 활동가들의 외침과 "나가라", "물러가라", "더럽다"는 참석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인권 활동가들은 미리 준비한 작은 플래카드를 들어 보였고, 주최 측은 플래카드를 빼앗으려 했다. 활동가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내 곳곳에서 실랑이가 지속됐다. 한 무리의 여성들은 활동가에게 "당신들 동성애자야? 그럼 질병에 대해 잘 알겠네"라고 말하며 동성애자 사진을 찍겠다고 휴대폰을 들이댔다.

행사장 곳곳에서 활동가들과 주최 측의 실강이가 이어졌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승강이는 10분가량 계속됐다. 결국 인권 활동가들 모두 대회의실 뒤편으로 물러난다는 조건하에, HIV 감염인에게 1분 발언권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효관 대표는 "<뉴스앤조이>·<오마이뉴스>·닷페이스는 이분 발언을 기사화하지 말라. 분명히 얘기했다. 이분 발언은 <국민일보>에도 나가면 안 된다. 내부에서만 들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윤가브리엘 대표(HIV/AIDS인권연대나누리+)는 "두려움과 혐오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예방한다 했지만 오히려 AIDS는 확산됐다"고 말했다. 주어진 1분이 지난 뒤, 감염인이 "예방은 콘돔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자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과 함께 발언을 제지하는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발언은 그렇게 끝이 났다.

종교색 뺀 '청소년 에이즈 예방 행사'
참석자 대부분은 개신교인

주최 측은 '디셈버 퍼스트'가 대한민국의 청소년이 무방비로 AIDS에 노출돼 있다며, 이를 예방하기 위한 행사라고 소개했다. 한국가족보건협회와 성일종 의원실이 주관했다. 에이즈퇴치연맹제주지회, 대구광역시약사회, 대구마약퇴치운동본부 등이 주최하고, 차세대바로세우기학부모연합,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등이 협력했다. 단체 이름만 봐서는 평범한 '에이즈의 날' 행사처럼 보인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자유한국당 성일종 의원은 "남성 간 성 접촉이 AIDS 확산 경로다. 질병관리본부가 이걸 명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여러 시민단체가 연합한 행사 같지만, 참석자 면면을 살펴보면 이 행사는 보수 개신교계 반동성애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우선 주관 단체 한국가족보건협회는 교계에서 동성애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김지연 약사가 대표로 있는 곳이다. 김지연 약사는 매해 퀴어 문화 축제와 같은 날 열리는 교계 반동성애 집회에 강사로 참석한다. 남성 일색인 반동성애 운동가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이다.

김지연 약사는 행사에 참석한 이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개신교 반동성애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길원평 교수(부산대), 제양규 교수(한동대), 서요한 목사(GMW연합) 등이었다. 교회에서 단체로 온 사람도 많았다. 지역은 춘천·순천·일산·수원 등 제각각이었다. 성일종 의원 지역구 충남 서산에서는 두 교회가 참석했다.

'청소년 에이즈 예방'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청소년도 대거 참석했다. 서울 방배동 홀리씨즈교회 서대천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SDC국제학교 학생들이었다. 송 아무개 군은 학생들을 대표해 "올바른 성적 분별력을 위해 기도로 힘써 주시고 캠페인을 열어 주셔서 감사하다. 우리를 에이즈로부터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홀리씨즈교회 서대천 목사가 대표로 있는 SDC국제학교 학생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여기에 자유한국당 성일종·윤종필 의원, 국민의당 조배숙·이동섭 의원이 참석했다. 성일종 의원은 "남성 간 성 접촉이 AIDS 확산의 주된 경로인데 우리나라는 이걸 말하지 않는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질병관리본부장에게 이야기했더니 홈페이지에 명시하기로 했다. 질병 문제를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한 게 국정감사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일정이 겹쳐 행사 말미에 나타난 이동섭 의원은 자신을 '교회 장로'라고 소개했다. 그는 "김지연 대표와도 가깝고 동성애 반대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이즈가 1년에 1,158명 정도 발병되고 지금 1만 명이 넘는다. 이들의 치료비에 국가 예산이 들어간다. 청소년이 점점 에이즈에 많이 감염돼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김지연 대표님을 비롯한 여기 모인 모두가 함께 노력해 주셔서 건전한 성문화, 우리가 또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 아닌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창조 섭리를 거스르는 거다. 크리스천 중심으로 해서 에이즈 예방하고 동성애 예방도 같이 하자는 말씀 드리고 싶다."

교회 단위로 행사에 참석한 이도 많았다. 참석자들이 한국가족보건협회가 미리 나눠 준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주최 측과 참석자들은 개신교색을 띠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디셈버 퍼스트'가 보수 개신교 반동성애 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현장에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들은 HIV/AIDS를 예방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만, '동성애가 AIDS의 원인'이라는 왜곡된 정보를 유포하는 혐오적인 행동으로는 AIDS를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3~4년의 결과다. 그런데도 몇몇 국회의원은 이들을 지원하고 이들의 논리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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