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교가 획일적 혹은 단면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부분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종교란 궁극적 실재(=본질)와의 만남의 경험이다. 궁극적 실재는 두려움과 매혹의 대상이다"라고 지적한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은 "종교는 사회 그 자체이며 성스러운 것과 관계된 신앙과 실천의 독특한 체계다"라고 정의하면서, 사회적 현상의 측면에서 종교에 대하여 말한다.

멜포드 스피로(Melfold Spiro, 1920~2014)는 "종교는 문화적으로 당연시되는 초자연적 존재와 상호작용하고 있는 문화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이다"라고 하면서 종교를 문화로 파악한다. 이들 외에 열거할 수 없으리만치 많은 사람이 종교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종교가 신비 자체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신비라고 하는 이유는 자신을 향하여, 또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의 '개방성'과 또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방향을 알 수 없다는 '불예측성'에 있다. 종교는 이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개방성'과 '불예측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 기독교회는 이런 관점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과연 신비 자체로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날 기독교회 모습을 관찰해 보려 한다.

교리(敎理)와 정체성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 종교는 어떤 형태로 이해되고 있는가. 종교 혹은 믿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을 기독교인, 불교인, 회교도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를 특정한 종교인으로 분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의이며 둘째는 교리 혹은 신념이다. 그중 교리는 한 종교인을 다른 종교인과 구별하는 데 절대적 요소다. 교리는 신을 비롯한 궁극적인 실체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그뿐 아니다. 교리는 세계관과 인간론 등을 포함하는 사상 체계다. 그래서 교리는 한 종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다.

이처럼 교리(敎理)는 종교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것이며, 대부분의 종교는 독자적인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교리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근거와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교우가 새롭게 영입되는 새 교우들을 교육한다. 적게는 4주, 많게는 10주에 걸쳐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타 교회에서 오는 교인 포함)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시중에는 많은 교육교재가 나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육교재는 교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교재가 교리 교육에 치중되어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인간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경이란 △기도란 △교회란 등등의 주제로 교리 교육을 한다. 교리는 이만큼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리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다.

교리에 갇힌 하나님

교리는 이처럼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교리 자체의 기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많은 경우 교리의 경직성이 기독교인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교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것은 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유용하지만 경직성을 띠게 될 때는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한다.

교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유한한 인간의 존재 안에 가두어 놓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마치 하나님도 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 자체도 교리 안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비친다. 교리에 어긋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나는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이 당하고 있는 사람의 여러 어려운 상황을 목격하고는 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이해를 접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발견은 대다수 사람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해방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우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의 형상을 해방이 아닌 공포·두려움·억압, 도덕적 부담과 생의 활기 위축 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무서운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에 아무 문제 제기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과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근본적인 부분으로,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요 1:18)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늘 형상과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형상과 개념은 인간이 그 형태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이 형상들은 우리가 하나님 경험을 할 때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 그것은 성경 읽기, 교회의 가르침, 일상적 종교 행위, 기독교 윤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형성돼 왔다. 이 형상들은 미성년자 혹은 성년의 차이 없이 모든 기독교인의 하나님 체험 형태를 결정지어 왔다.

나는 이 같은 목회적 상황에서 많은 교우에게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위에서 언급한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일상 신앙생활에서 얻는 지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경직되고 폐쇄된 교회 가르침과 교리 안에 갇혀 자유로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발견하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자유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를 무수히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억압과 구속이었으며, 자신이 받은 교육의 결과라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들은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고,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스승들로부터 제자들에게,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전래돼 왔다. 더욱이 이 개념들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름으로 완벽하게 고착화하는 결과에 이른다. 초월적 차원이라는 설명과 종교적 신비의 이름으로 어떤 경우에는 우상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개념들이 우리 모두에게 전수되고 각인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교리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하나님도 교리 안에 갇힌 채 우리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부되는 하나님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수용하거나 거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의존하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거부되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다. 인간에 의해 거부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 개념이다. 대부분 교리에 의해 소개되는 하나님인 경우가 많다. 하나님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형상,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작은 생의 경험(그것이 교리라는 이름하에 교회의 절대적인 가르침으로 고착하고 귀결되기도 한다)에 지나치게 밀착된 유아적·비이성적·가학적·의인화한 개념 때문에 하나님 자체가 거부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 교리 교육, 기독교 교육을 진행할 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형성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후일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건전하고 건강한 실천과 용납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공공의 자리에서 누구에게나 소개할 수 있는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이미지 형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리를 넘어서 발견되는 하나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한 주제는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 매우 다양한 신과 절대적 존재에 대한 개념과 형상이 범람하는 종교적 다원주의 현장에서 살고 있다. 핵심 주제는 신의 존재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다.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다.

기독교인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개념과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을 향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작금의 사회에서 기독교와 대립하는 다양한 신의 존재와 개념이 범람하는 것은, 어쩌면 기존 기독교가 소개하고 있는 왜곡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에 의거한 예수의 하나님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며 지금과 같은 거부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오랜 세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특히 교리 교육을 통하여 전수되었던 기존의 개념은 이미 우리들 생각과 마음 그리고 감정의 차원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더욱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의 살아가는 방식, 세계관, 삶의 가치관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우리 삶에서 저항과 고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위기 한가운데 있는 한국교회는 그 아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가 생각해 볼 개혁은 교리를 넘어서 삶의 현장과 역사 한복판에서 만나는 하나님 경험일 것이다.

고정된 교리를 넘어서 우리가 역동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다. 교리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신앙의 '개방적'이며 '불예측적'인 신비와 만나는 일은 우리 삶의 방향을 변하게 할 것이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이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성경의 기록에 대한 더 신중하고 깊은 비판적 읽기 과제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에 변화를 요구한다.

기독교인은 교리 교육에서 얻은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이해와 개념에 익숙하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초 개념에 익숙하고, 거기서 비롯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우리 생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다.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과 복음의 하나님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뛰어난 분이라는 사실을. 교회와 교리를 포함하여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앙의 신비한 영역을 회복하는 과제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가 바로 이 과제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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