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는 '홍인식 목사의 교회 해방'을 격주로 6차례 연재합니다. 연재 칼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교회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전통적이고 근대적인 기독교회도 위기에 처해 있다. 교회의 위기는 탈근대적 시대 흐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탈근대적 인식 변화에 대해서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은 그의 저서 <Transforming Christian Theology for Church and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 출석이 그들의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2.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 출석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거나 혹은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3. 사람들에게 목회자는 더 이상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교회가 위기를 겪고 있다.

탈근대사회와 교회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21세기는 이러한 근대성의 위기에서 비롯되는 탈근대의 사회라는 특성을 갖는다. 탈근대의 사회는 교회의 활동과 선교 사역에 하나의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탈근대사회인가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변화의 상황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종교의 귀환'에 주목해야 한다.

합리주의적이며 과학적인 이성의 신화와 그리고 그 신화 속 평화와 행복 가득한 세계에 대한 약속은 깨어졌다. 이는 우리들 사이에 커다란 공백을 남기고 말았다. 이러한 이성이 남긴 '공백'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로니컬하게도 비이성적이며 초월적인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초월성을 갈망하는 '영적 귀환’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근대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성격 중 하나로 우리는 여러 형태의 비이성 모습을 가진 "성스러운 것으로의 돌아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탈근대적인 사람들은 이제 신과 영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종교 부활"의 시대,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스러운 것으로의 돌아옴"이 반드시 "기독교의 성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계종교에서 기독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탈근대 시대의 종교 성행이 제도적인 종교 혹은 그리스도교가 지켜 오고 있던 종교적 메커니즘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탈근대적인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는 하나 "옛 질서"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제도적이고 전통적인 종교 테두리 안에서의 신앙을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인 종교들은 관료적이고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제도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탈근대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이미 "한물간"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한국 대학생들 중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의 비율은 3% 미만이다. 이미 젊은 세대들로부터 기독교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엇 때문일까.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 언어

그중 가장 큰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언어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기독교가 말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기독교는 딴 세상의 언어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서 기독교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언어의 사용과 그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기독교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왜 기독교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사용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언어는 기독교 내 사람들에 의해서도 잘못 이해되고 있고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작고한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Speaking Christian)>(비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보그는 기독교의 언어가 그 힘을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원초적인 원인으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문자주의다. 둘째는 천국-지옥 패러다임이다. 그렇다. 오늘 교회의 위기 앞에서 교회 해방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보그가 지적한 것처럼 문자주의와 천국-지옥 패러다임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해방을 위한 우선적 과제는 문자주의와 천국-지옥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문자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내 개인적인 경험이다. 33년 전 내가 당시 살고 있던 남미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아침 일찍부터 통증을 느껴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계속되는 진통으로 아내는 점차 지쳐 갔다. 10시간 이상을 진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담당 의사가 나에게 물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진통을 없앤 후에 혹시 수술하게 될 수도 있으니 동의서에 서명하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진통제를 맞게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담당 의사는 나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이유를 물었다. 나는 매우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변했다. "진통제 주사를 맞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 말에 담당 의사는 할 말을 잃고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당신이 당신 아내 입장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이 말에 나는 충격을 받고 결국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아내는 무사히 순산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하여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갈등하게 되었고 마침내 문자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많은 현대인이 기독교 용어를 생소하게 여기고 거부하는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자주의"다. 문자주의적 해석은 교회와 이 세계와의 관계에, 특별히 젊은 세대들과의 관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혹시 요즘 교회 내 젊은이들이 사라지는 현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서를 교회 내의 책으로 국한시켜, 교회 밖의 세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책으로 만들어 갔다. 성서는 이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말았다. 다양성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교회 내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먼저는 성서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오직 교회 내의 삶으로 국한하고 말았다. 그로 말미암아 신앙은 매우 폐쇄적으로 바뀌었다. 문자주의는 결국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틀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와 신앙은 이 같은 문자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 교회 해방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문화적이며 다종교적인 다양한 후기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해체나 대치보다는 회복을

보그는 종교와 믿음이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의 회복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회복이기도 하다. 언어를 버리면 믿음 자체를 버리게 되는 위험도 있다. 본래 의미를 회복하여 종교를 왜곡되어져 있는 개념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많은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개념들을 현 역사적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여 전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천국-지옥 패러다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