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에 대한 기대
지옥에 대한 공포

한국 교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여러 책이 있다. 그중에서도 1986년도에 출간된 펄시 콜레(Percy Collet)의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발간되자마자 수십만 권이 팔려 나가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지금도 천국 간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어김없이 떠올리는 책이다.

왜 허황된 이야기가 수없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가 있었을까. 이유는 한 가지일 것이다. 우리 믿음의 목적이 천당 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국' 혹은 '천당'은 오늘도 한국 기독교인에게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주제이며 관심사다. 왜 믿느냐는 질문 앞에서 "죽어서 천당 가려고"라고 답변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천국 혹은 천당과는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이것 또한 한국 기독교인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이다. 천국 혹은 천당에 대한 간증 못지않게 지옥 간증도 교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스스로 목숨 끊은 유명 연예인들이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한때 국내 대형 교회 담임목사로 이름 날렸던 신 모 목사의 천당과 지옥 이야기, 지옥에 관한 간증이 한국교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도 서울 명동 거리에 가보면 "예수-천당, 불신-지옥" 팻말을 목에 걸고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사람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천당과 지옥은 많은 경우 우리 기독교 신앙을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이고 있다. 마치 우리가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 혹은 천당을 가기 위하여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이 오직 천당과 지옥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믿음의 블랙홀

천당-지옥의 틀은 오늘 우리들에게 다양한 기독교 신앙 주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양한 기독교 주제들, 다시 말하면 구원·희생·구원자·구세주·용서·속죄·의·회개·은혜·중생·재림·하나님·예수·성경·신조·주기도문·예배·예전 등의 주제가 천당-지옥의 틀을 중심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해석 틀에 의하면, 구원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 이후 발생한다. 예수는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천당으로 가게 하는 구원자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천당으로 가는 삶을 안내해 주는 길잡이와 같은 말씀이다. 예수의 죽음도 결국 우리를 지옥이 아닌 천당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것이다.

죽음 이후 삶이 천당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지상의 삶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죽음 이후 천당에서의 삶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핵심 개념이다. 죽음 이후 삶이 지옥에서 계속되는가, 아니면 천당에서 계속되는가 여부가 기독교인의 믿음의 목적을 좌우한다.

이 경우, 결론적으로 말하면 믿음은 천당을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은 천당-지옥 틀로부터 파생하는 개념에 집중된다. 첫째, 우리는 죄인이다. 둘째, 죄 용서가 필요하다. 셋째, 예수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죽지 않고 천당으로 간다.

이처럼 모든 기독교 신앙의 주제들은 천당-지옥 틀을 중심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되면 천당으로 가는 최종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닌 행동은 신앙생활에서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 같은 해석으로 이해되는 많은 신앙의 주제와 개념이 본래의 성서적 그리고 역사-전통적인 이해로부터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고 있다.

마커스 보그는 말한다. "천당-지옥의 틀은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오늘 우리의 믿음에 대한 모든 개념 이해를 왜곡하고 변질시키고 있다."

그러면 천당-지옥의 해석 틀은 오늘 우리들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왜곡·변질해 왔을까. 나는 이것을 약 3가지로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는 신앙의 비역사화 현상이다. 둘째는 이분법적 사고(思考)로 인한 신앙의 폐쇄화 현상이다. 셋째는 신앙과 목회의 공포(恐怖)화 현상이다.

신앙의 비역사화

천당-지옥의 틀 안에서의 모든 신앙 목표는 오로지 지옥을 회피하고 천당을 향하기 위한 것으로 집결된다. 이러한 틀에서 현재의 삶은 오직 죽음 이후 세계를 향한다. 오늘의 삶은 천당을 가기 위한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의 삶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삶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오늘의 삶의 변화, 혹은 변혁을 도모하는 것은 그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는 오직 죽음 이후 세계에 철저하게 매달려야 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정치인, 경제인과 그 외 이 땅 위의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다. 이런 경우, 교회는 현실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저히 땅 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땅의 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오직 위에 것들을 바라보면 살아가야 한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은 비역사화되어 간다.

이분법적 사고와
신앙의 폐쇄화

천당-지옥의 틀은 신앙인들이 손쉽게 이분법적 사고를 갖게 만들 것이다. 이 같은 사고의 틀에서는 세상에 두 종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지옥 가는 사람과 천당 가는 사람이다. 사건들도 우리를 지옥 가게 하는 사건과 천당으로 인도하는 사건으로만 존재한다.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이웃 종교는 지옥으로 가는 종교이고 기독교만이 천당으로 인도하는 종교이다. 그러기에 이웃종교는 타도와 제거 대상이지 결코 대화와 협력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이다. 지옥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천당을 방해하며 훼방한다. 우리는 영적 전쟁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전투적인 태도로 천당으로 가는 길에 존재하는 장애물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한다. 아군 아니면 적이다. 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기독교회가 점차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집단이 되게 만들었다.

천당-지옥 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의 이분법적이고 공격적이며 폐쇄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신앙과 목회의 공포화 현상

천당-지옥의 틀에서 해석되는 신앙의 가장 큰 폐해는 신앙과 목회의 공포화 현상이다. 인간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초적 감정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 연약하며 영과 육이 손쉽게 상처를 입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존재로서 항상 도피적이며 공포에 젖어 있고,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보호를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공포 앞에서 무기력을 경험하는 인간에게, 종교는 공포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도구로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바흐친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는 "종교는 우주적 공포를 종교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불확실성으로부터 발생되는 공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신'을 제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종교는 공포에 젖어 무기력해진 초라한 인간을 조종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는 자신들이 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신의 축복과 신성한 은총을 요구할 수 있는 중재자가 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종교는 신자들에게 용납되고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종교교육을 통하여 이 같은 신 개념을 갖게 되었고 공포가 우리 신앙의 근본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천당-지옥의 틀이다.

공포 목회

기독교회는 공포와 무서움의 요소를 충분히 사용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 정책은 결국 매우 이중적이며 부정적인 결과를 생산했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불확실성과 공포, 그리고 권력의지가 뒤섞여 있는 이러한 정책에 대한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결국 이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 역사가 쟝 뒬리모(Jean Delumeau)는 오랜 기간 계속된 이 정책을 "공포의 목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공포의 신' 개념은 죄를 예방하고 회개의 부름을 위하여 자주 사용됐다. 종교는 이를 위해 위협적인 모습을 확장해 나갔다. 지옥에 대한 상상력은 인간의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교리가 조직적으로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다.

중세부터 모든 강론과 형상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증강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인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인 죽음과 연결하여 심판과 지옥(가톨릭의 경우에는 연옥을 포함)을 강조하면서 두려움을 발생시켜 공포감으로 가득 차도록 만들었다. 오늘도 이러한 공포 목회는 영향을 강하게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 목회가 남겨 놓은 최악의 결과는 그것이 신(하나님)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신(하나님)의 형상은 단 하나의 작은 죄도 놓치지 않고 징벌하는 엄격한 심판관으로서 모습으로 남겨진다. 마치 지구상 그 어떤 범죄 수사기관과도 비견할 수 없는 엄격하고 철저한 수사를 실행하는 엄격한 수사관으로서 신의 모습만이 남겨진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기억의 힘으로 조서에 우리의 범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으며 심판의 날에 마치 계산서를 내놓듯이 우리 앞에 죗값을 치룰 것을 요구하는 신(하나님)으로 남겨진다.

이 신(하나님)은 경찰-신(하나님)(police-God)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같은 신(하나님)의 모습이 거의 모든 어린아이의 신앙 교육에 사용됐다. 부모 또한 자주 자기 자녀들이 특정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부모가 시키는 일을 하게끔 경찰-신(하나님)의 모습을 활용하기도 한다.

물론 징벌과 심판의 신에 대한 강조는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서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하나님) 자신에게도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의 잔인함 속에 있는 매우 악마적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Jose Maria Mardones)는 그의 저서 <하나님 죽이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신의 존재는 인간과 삶의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종류의 신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신(하나님) 개념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신(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우리 영혼에 해악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의 자녀를 향한 혹은 조부모의 손-자녀를 교육할 때 어린 시절부터 건전하고 건강한 신(하나님) 개념을 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교육 과제이다. 두려움의 대상 혹은 우주적 감시자로서 신(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은 당장이라도 그만두어야 할 시급한 일이다.

오늘의 기독교회는 천당-지옥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여 비역사적이고 이분법적 폐쇄성과 공포의 하나님과 목회를 넘어서 진정 자유와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을 선포해야 한다.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천당을 가기 위하여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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