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시험 기간이라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 학생회실에서 학교 후배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있던 후배 중 한 명이 핸드폰으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단원고'라는 익숙한 이름의 학교 학생들이 (그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단원고. 중학교 3학년,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할 때 당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단원고는 교복도 예쁘고 새로 생긴 학교라 많은 친구가 단원고에 가고 싶어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 놀랐지만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마음 놓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전원 구조 소식은 대형 오보였고, 몇 명인지조차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로 수백 명의 사람이 배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너무 놀랐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잠수부, 배가 수백 척, 헬기가 몇 대, 조명탄이 수백 개 투입되어 대대적 구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았습니다." - 용혜인 씨 최후진술 중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용혜인 씨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이다. 많은 사람의 간절한 기대에도 세월호는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용혜인 씨는 이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세월호 희생 학생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말 "가만히 있으라". 용 씨는 이 말을 기억하며 추모 침묵 집회를 기획했다.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에는 "가만히 있으라"가 쓰인 종이를, 한 손에는 흰색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용혜인 씨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추모 침묵 집회를 기획했다. 추모 행진을 이끄는 용혜인 씨(가운데). 사진 제공 용혜인

경찰은 용혜인 씨를 더욱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행진을 막아섰고 저항하는 참가자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2014년 5월 18일 97명, 6월 10일에는 69명이 용혜인 씨와 함께 경찰서에 끌려 갔다. 연행된 사람들이 대부분 무죄로 풀려나는 사이, 기획자 용혜인 씨는 또 다른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혐의가 추가돼 불구속 기소됐다.

2년 넘게 계속된 심리 끝에 검찰은 용혜인 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한국 사회를 잠식한 슬픔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추모 집회를 기획했고 서울 시내를 침묵 행진했을 뿐이었다. 시민 9,000여 명이 용 씨를 위해 탄원서를 썼다. 2017년 1월 11일, 용혜인 씨는 결국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오윤경 판사는 용 씨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를 적용했다.

선고 다음 날. 서울 종로구 재동 한 카페에서 용혜인 씨를 만났다. 용 씨는 예상보다 훨씬 밝은 모습이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 징역 2년 구형에 벌금 300만 원이 나왔다. 재판이 오래 진행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재판을 받는 건 괜찮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님이 2년 동안 무료 변론도 맡아 주시고 많이 도와주셨다. 재판은 크게 부담이 없었는데 맨 처음 기소된 이후로 집회만 나가면 또 소환됐다. 집회 종류에 상관없이. 추가로 계속 기소돼 처음 사건에 10건이 병합됐다.

- 수만 명이 참가하는 집회였는데도 기소가 됐다고.

2~3만 명이 참가한 범국민 대회에서는 나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집회 끝나면 기소가 되더라. 특별히 앞에서 발언하지도 않고 그냥 다녀오기만 해도 문제 삼았다. 일반교통방해 혐의가 가장 많다.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6,000명과 공모하여 육로를 점거했다"고 나와 있다. 어떻게 6,000명과 공모를 하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백남기 농민이 사고를 당하신 그날, 나도 캡사이신을 너무 많이 맞고 정신이 없어서 인도 한쪽에 앉아 있었다. 집회 끝난 뒤에 경찰이 나를 또 특정했더라. 그런데 내가 아닌 사진을 들고 와서 나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이 제시한 사진에 동의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나는 그날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사진에 있는 여성은 모자 없이 마스크를 쓰고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일반교통방해죄가 성립하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장시간 도로를 점거했다는 게 증명이 돼야 하는데 나는 그것도 아니었다. 공소장에는 "8시 40분경"이라고만 돼 있었다. 판사도 공소장을 변경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검사는 그대로 진행했다. 판사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검찰은 세월호 추모 집회를 기획한 용혜인 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항소할 건가.

재판받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벌금 300만 원 내고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검찰이 항소하면 나도 항소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받았다. 상급심에서 벌금형이 확정된다 하더라도 지금 항소하지 않았으면 그때는 아예 항소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 처음에 어떻게 추모 집회를 기획하게 됐나.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모르고 시작했다.(웃음) 참사 당일 '단원고'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안산에서 초·중·고를 나왔는데,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 단원고는 신생 학교였다. 단원고 간 친구가 많이 있었다.

참사 터지자마자 뭘 해야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4월 22일 당시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대교 건너서 박근혜 대통령 만나러 간다고 걸어가는데 경찰 버스 10대가 막았다.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영상과 사진을 보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뭐라도 한번 해 보자' 하고 시작했다. 많아야 30명 정도 참여하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 오히려 안산 시민 중에도 세월호는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순실 사태가 터지고 나서는 그래도 좀 덜하다. 세월호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2015년 4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기를 놓고 싸움할 때는 정말 심했다. 택시 기사 중에도 "돈 받았으면 이제 그만하지"라면서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화랑유원지에 있는 합동 분향소를 향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시에 철거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고 하고.

- 침묵 시위를 기획한 뒤 세월호 유가족과 연락하게 됐다고 하던데.

세월호 추모 집회 하다가 내가 잡혀 갔다는 것을 알고 유가족 중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큰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2014년 9월쯤부터는 유가족들이 직접 국민을 만나러 다니셨다. 그때 대학교 10여 곳에서 직접 간담회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었다.

- 세월호 참사 당시 행정 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다. 고시 공부하는 경우 사회에 문제가 생겨도 '지금은 고시에 집중하고 나중에 합격하면 행동해야지' 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고시 공부에 그리 흥미가 없었다. 공부가 재미없었다기보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지?' 이런 고민을 했다. 고시 학원비가 비싸서 신림동에 초소형 원룸 얻어서 혼자 공부했다.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공부하면서 외로웠다.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좋은 건가. 인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군소 원외 정당
청년 비례대표 후보

-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군소 정당인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추모 집회 기획자로 유명세(?)를 치렀으니, 당선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세월호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정치권에 출마할 생각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으로 출마하지 그랬느냐는 이야기 많이 듣긴 했다. 난 원래 진보신당 당원이었다. 이름만 당원이긴 했지만.

세월호 관련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이 노동당 당원이었다. 그 사람들이 노동당 소속이라고 보도되지만 않았을 뿐이지, 지역에서도 그렇고 활동하는 사람 중 노동당 당원이 많았다. 민주당 같은 경우에는 세월호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욕도 많이 먹지 않았나. 민주당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원외 정당이긴 하지만 노동당이 내놓은 한국 사회 분석이 맞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대안이나 분석을 제시하는 데 노동당이 좋다고 생각했다.

세월호를 언급하면 더 많이 득표할 수 있을 텐데, 왜 세월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맞는 말일 수도 있는데 '세월호 후보'라고 규정하면 그 이미지를 그냥 소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내가 정치인으로서 대변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선거를 진행했다. 결과는 안 좋게 났지만.(웃음)

용혜인 씨는 20대 총선에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청년을 대변하고 싶었다. 노동당 홈페이지 갈무리

- 당시 노동당이 전면에 내세운 건 '기본 소득'이었다.

기본 소득을 시행한다고 해서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 정당 중에서도 노동당과 녹색당이 기본 소득을 말하고 있다. 민주당 중에서도 기본 소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청년 수당, 청년 배당 다 같은 맥락이다. 김종인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기본 소득을 언급한다.

하지만 기본 소득이라고 다 같은 기본 소득이 아니다. 어떤 기본 소득 제도인가에 따라 다르다. 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경우 기존 복지를 축소하고 현금을 지급하는 방법인데, 그건 큰 대안이 되지 않는다.

한국 경제는 재벌 중심의 기형적인 구조이고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더 이상 수출 중심 사업으로 돈 벌기 힘든 사회다. 중산층 이하 서민은 쓸 돈이 없다. 노동당이 말하는 기본 소득은 급진적인 정책이라기보다 내수 진작 차원, 사람이 최소한의 쓸 돈이 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소득 중심 구조에 꼭 필요한 정책이다.

- 사람들의 공감은 사지 못한 것 같다. 득표율이 19대 총선보다 더 떨어졌는데.

국민 0.38%가 노동당을 선택했다. 19대 총선 이후 노동당이 쪼개지고 내홍을 겪는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반등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 기독교 정당 기독자유당은 약진했다. 보면서 어떤 생각했나.

기독교 조직이 실제로 표 동원이 가능할 정도로 강하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약진할 것이라고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출구 조사에서 기타 정당 1석이라는 발표가 나왔을 때 많이 놀랐다. 기독자유당은 혐오 발언으로 표를 결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국회의원을 배출할까 봐 긴장했다.

- 기독자유당은 정책보다는 반동성애·반이슬람을 내세웠다. 그런 접근 방식을 어떻게 보나.

한국 사회에서 혐오 발언이 힘을 받고 있다고 봤다. 보통 사회가 위기일 때 역으로 약자들에게 선을 긋는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것을 공고히 하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다. 기독자유당을 보면서 실제로 한국 사회가 위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 전략적으로는 의제와 상관없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취한 거라고 본다. 지지 기반을 확실히 다질 수 있는 거니까. 군소 정당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기독자유당은 교인들에 맞춰 이런 걸 들고 나온거다. 전략적으로는 괜찮지만 내용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진보 정당은 한국 사회 전체를 디자인할 수 있는 대안 정당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노동당도 원 포인트 의제를 잡아서 국민에게 접근하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지지율이 0.38%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

언론은 그를 세월호 추모 집회를 기획한 '여대생 용혜인'이라 불렀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여대생'이 아니라 대학생

- '청년' 후보로 출마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내가 뭐하든지 다 기특하게 보시는 분들이 많았다. 정치인 용혜인의 발언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기 보다, 기특한 청년의 발언으로 받아들이시는 경우가 많았다. 내 중요한 지지층은 청년이 아니었다.

- 청년이지만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은 없었나

언론에서는 주로 '여대생 용혜인'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붙였다. 내가 어떤 포지션으로 얘기해도 다 '여대생 용혜인'으로 뭉뚱그리는 거다. 그런 면에서 좀 답답하긴 했다. 사회는 내가 하는 말을 기특한 여대생 한 명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 부분이 고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사람들이 나를 그냥 정치인 용혜인으로 받아들일까. 선거운동 현장에서 만나는 정치인들도 동등한 후보라고 보지 않았다. 정당 후보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으니까 반말은 기본이고 무례하게 구는 일은 다반사였다.

- 같은 진영 내에서도 여성이라서 받는 불이익은 혹시 없나

나는 어느 정도 발언권도 생겼기에 내가 직접 느끼지는 않는데, 여성들이 사실 많이 느낀다. 여성을 배제하는 문화, 남성끼리 중요한 걸 결정하는 문화가 분명 있다. 내 주변에 청년 여성 활동가들이 그런 점을 많이 느끼고 고민을 토로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발언권도 있어서 차별을 느낀다거나 하면 문제 제기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힘들다.

-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성 때문에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면 더 높은 벽을 느낄 것 같은데.

최근 페미니즘이 이슈를 타면서 이 부분을 논의해야 한다는 여론은 있다. 나는 여성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면 안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권력을 잡고 직접 싸워야 하는 문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다"라고 이야기만 하면 바뀌지 않는다. 실제로 그 구조를 강고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고 고민하는 친구들·당원들이 당 체제 내로 들어와서 같이 목소리 내고, 이야기하고, 문제 제기하고 권력을 얻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현재 당내 선거를 진행하고 있는데 여성이 많이 출마했다. 앞으로 변화를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세대

용혜인 씨는 현재 노동당 정책사업실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제 대학교는 졸업하기까지 한 학기 남았는데 당분간은 당 활동에 전념할 생각이다. 청년으로 한국 사회 20대를 대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더 안락한 삶을 꿈꿀 수도 있지 않았나.

아버지가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고 말씀하시더라.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고 싶지 않고,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하고 재밌다. 아주 작더라도 사회를 바꾸는 일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만나고 싶다. 함께 고민한 정책을 사회에 내놓고, 그게 이슈가 되고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게 재밌더라.

돈을 많이 벌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도 좋겠지만 나한테는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돈 조금 덜 벌고 조금 좁은 집에서 월세 살고 자동차 없이 살아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웃음) 이렇게 계속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용혜인 씨는 노동당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노동당 유인물을 나눠 주고 있는 용혜인 씨. 노동당 홈페이지 갈무리

- 동기들은 취업할 시기다. 취업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단과대가 정경대학인데도 취업률이 높지 않다. 정규직 취업률이 50%가 안 된다. 친구 대여섯 명이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이 중에 3명은 비정규직"이라고 하는데 그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힘들게 살 바엔 차라리 외국 가서 힘들게 살자면서 외국 간 친구도 많다.

- 지금 한국에서 20대 청년이 가장 힘든 점이 뭘까.

대학교 졸업해서 대기업 간 친구들도 부모 도움 없이 집 사고 결혼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부모들이 다 도와줘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간 갈등도 있는 것 같다. 지금 40~50대는 자기가 노력하면 집·차 다 살 수 있는 세대였는데, 지금 청년 세대는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한 세대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최저임금 1만 원, 기본 소득도 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부모에게 덜 의존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삶을 본인이 계획하고 할 수 있게 최소한을 보장해 주자는 의미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시작점이 이런 제도가 아닐까 싶다.

- "대한민국 역사상 청년이 '흙수저'가 아닌 시대는 없었다"고 한 어른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것이 요즘 청년은 금수저가 될 기회마저 박탈당한 세대다. 예전에도 청년 대부분이 흙수저였던 것은 맞다. 과거에는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최근 나온 흙수저 담론은, 부모 돈이 있다 없다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 미래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 확신에서 오는 절망감이 지금 흙수저 담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모든 청년이 흙수저였다는 비교는 힘들지 않을까. 시대별 사회적 배경이 다르지 않나.

지금은 대학생들이 스무 살부터 취업만 준비해도 취업하기 힘든 시기다.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 갖기 힘든 시기 같다. 이런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심 없는 20대를 나무라는 '20대 개새끼론'이야말로 꼰대질이라고 생각한다.

- '일베' 아니면 '좌빨'로 분류되는 소수 청년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지금 청년 세대를 우익과 진보로 나누기보다 이 사람들이 어떤 경제 조건 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집중해서 봐야 한다. 일베 사이트에 가끔 훑어보러 들어간다. 최저임금 1만 원 이슈는 그 안에서도 논란이 된다. 지지하는 사람, 말도 안 되는 빨갱이 정책이라고 폄하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한국에서 진보냐 보수냐는 결국 민주당 또는 새누리당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나는 청년들이 많이 참고 있는 것 같다. 선거 때만 되면 청년을 위한 정책, 청년을 위한 정당이라고 이야기는 하는데 실제로 그들을 찍어서 현실을 바꾸어 본 적이 없다.

청년들이 계기와 의제가 있으면 정치 세력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청년 실업 문제인 것 같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노가 모이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의 현실에 분노를 모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익·보수·중도·진보를 가리지 말고 본인이 처한 현실에서부터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기독교인은 전반적으로 보수 성향을 지닌 경우가 많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면 노동당과 내가 하는 활동이 과격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 좋겠다. 기독교는 잘 모르지만 예수님은 약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고 알고 있다. 이 사회에 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늘 생각한다. 세월호 가족 같은 우리 주변에 있는 약자들을 보며,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어떻게 같이 책임 의식을 느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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