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한충렬 장백교회 담임목사 영정.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뉴스앤조이 취재팀] 4월 30일 피살된 고 한충렬 목사(장백교회)는 교회에 찾아오는 북한 주민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선한 이웃이었다.

그는 1967년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12도구에서 1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88년 투병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 1993년 책임집사 신분으로 장백교회를 세웠다. 1991년 길림공업대학을 졸업했고, 2001년 중국 호북성 무한시에 위치한 중남신학교를 졸업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2005년부터는 장백교회 담임목사로 고인이 될 때까지 시무했다. 한국에서도 신학을 공부했다. 장백교회를 시무하는 중에도 틈틈이 한국에 나와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과정을 수료했다.

고인은 다방면에 학식을 갖춘 교양인이었다. 무한시에서 신학을 공부했기에, 중국 동포 목회자 중에도 중국어 구사 능력이 우수한 편이었다. 1990년대 초반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안수받은 중국 동포 목회자 1세대 그룹 중에서 학문적, 신앙적 연륜으로 인정받는 위치였다. 그와 오랫동안 동역한 익명의 목회자는 "한 목사님은 신앙적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목회로 보나, 주변 동료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목사 신분으로 장백에서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후에는 정부 관련 요직도 맡았다. 주로 종교 관련 조직이었다. 1998년부터 장백현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을 맡았고, 2012년부터는 기독교 양회 부주석으로 일했다. 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중국 정부와 교회를 연결하는 조직이다. 양회는 중국기독교협회와 삼자애국위원회를 포괄하는 통칭이다.

▲ 고 한충렬 목사 생전의 모습.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 목사는 일부 언론이 제기하는 것처럼 북한에 지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적극 나서기보다 교회에 찾아오는 탈북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활동에 주력했다. 2012년 중국 안전국에 체포,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 압송되었을 때도 한 목사와 장백교회의 활동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같은 민족을 돕는 행위'로 인정되어 장백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를 돕는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국 정부는 '비법 월경자'와 접촉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신축된 장백교회 예배당 입구에 기둥을 세우고 CCTV를 높이 달았다.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을 수시로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탈북자들이 교회에서 도움을 받다가 결국 한국이나 3국으로 다시 탈출할 것을 우려했다.

북한도 한 목사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자국민을 꼬셔 내 '자본주의의 나쁜 물'을 들이는 악당으로 묘사했다. 음성적인 통로로, 때로는 대담하게 한 목사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올해 초 한 목사를 만난 익명의 소식통도, 지난해 11월 교회 신축 이후 신변 위협이 증가했다는 증언을 한 목사에게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안팎에서 탈북자 지원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거셌지만 한 목사는 꿋꿋하고 조용하게 사역을 이어 나갔다. 한 목사에게 탈북자는 같은 민족 동포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었다. 교회와 연결된 탈북자들에게 음식, 의복, 의약품을 지원했지만 한국이나 3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돕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 소식통은 한 목사가 탈북이나 북한의 지하 교회 재건에 관여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장백현은 그런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못 박았다. 지역이 협소하고 북한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양국 정부가 모두 엄중하게 금지하는 행위를 교회를 책임진 한 목사가 나서서 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한 목사의 장례식에 참가한 장백교회 성도들은 그의 영정 사진 앞에서 오열했다. 예식은 중국 공안 당국의 철저한 감시 아래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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