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는 '고대 이스라엘'에 관해서 미국의 올브라이트 학파와 독일의 알트-노트 학파가 두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올브라이트, G. 라이트, 브라이트, 이가엘 야딘 등의 학자들은 '족장 시대(아브라함, 야곱 등)'가 성서의 묘사대로 상당히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고('문자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닐 지라도) 보았으며 그 뒤에 이어지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전쟁 등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와 달리 알트-노트 학파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성서를 읽었으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이주'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은 더 나가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농민들의 '반란'으로 재해석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연구와 고고학의 발굴로 인해 전통적인 가나안 정복 학설은 기진맥진 힘을 잃어 가게 됩니다. 밀러와 헤이스(Miller & Hayes, <고대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년)는 올브라이트의 입장을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이 책은 가나안 민족과 해양 족속 또는 그들로 인해 이주하게 된 부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정착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유목민의 침입에 대해서는 약간의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 뒤 노만 갓월드(Norman Gottwald, <히브리 성서 1, 2>, 한국신학연구소, 1987년)는 멘덴홀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도시의 경제·정치에 희생양이 된 가나안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다소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1980년대에는 이러한 논의가 더 큰 국제무대로 확장됩니다. 코펜하겐 대학의 렘케는 갓월드를 비판하는 내용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발표합니다. 내부 반란의 개념을 포함하여 많은 점에서 갓월드와 다른 입장에서 가나안 토착 인구의 내부 발달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을 찾았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A. 소긴(A. Soggin)의 저서는 다윗의 통치 시대로 시작하고 솔로몬 제국을 다룬 뒤에야 군주 정치 이전의 시기에 대해 논의합니다. 도네르(H. Donner)는 알트-노트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서를 씁니다. 그리고 고고학과 사회학을 성서에 적용한 책들이 시리즈로 발간되기도 합니다.

바이페르트(M. Weippert)는 알트-노트의 정착 가설을 지지하고, 프리츠(V. fritz)는 '상호의존 가설'이라고 부르는 알트-노트와 멘덴홀-갓월드 이론을 혼합한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고고학 발굴은 새로운 논쟁을 불러왔고 신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올브라이트의 그늘에서 확실하게 벗어납니다. 고고학자인 핑컬스타인(Israel Finkerlstein,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까치, 2001년)은 기존의 알트, 멘덴홀-갓월드의 이론을 활용하여 유목민이 점차적으로 농민으로 정착하였다는 학설을 주장합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이스라엘과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하여 '공생(symbiosis)'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시킵니다.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학설이 더 세분화되고 다양해졌지만, 어느 학설도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러 학설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1980년대를 통해 학자들의 관심 분야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또는 정착)의 역사성 논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이스라엘 왕조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성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사울의 통치로 시작하는 왕정 시대의 역사는 꽤 확실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밀러와 헤이스는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관한 역사적 전통에 심각한 의구심을 던집니다. 80년대 중반에 가르비니(G. Garbini, History and Ideology in Ancient Israel)는 지금까지의 독일-미국과는 다른 이태리 성서학의 특징을 보여 주면서 솔로몬 왕국의 역사성에 비판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그는 성서의 기록이 포로기 후기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에블라 문헌과 키르벳 베이트 레이에서 발굴된 히브리 비문을 통해서 야웨 신앙이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가나안 신앙의 본연임을 보여 줍니다.

니먼(H. M. Niemann)은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시대에, 남유다는 웃시야 시대에 이르러서야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에델먼은 '역사적인 사울'을 찾는 연구를 했고 에이미슨-드레이크(D. W. Jamieson-Drake)는 많은 학자가 주장하는 서기관 학교의 존재에 의문을 던집니다. 그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예루살렘이 중요한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다윗-솔로몬 왕국의 역사성과 고고학 유물의 해석을 놓고 핑컬스타인과 데버는 극한의 대립을 펼칩니다. 2006년에 핑컬스타인은 이전과 같이 실버먼과의 공동 작업으로 <다윗과 솔로몬>(David and Solomon: In search of the Bible's Sacred Kings and the Roots of the Western Tradition)을 출판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증명할 결정적인 고고학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며,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의 증거로 제시되는 하솔과 므깃도 그리고 게젤(왕상 9:15)은 오히려 북이스라엘(오므리)의 것으로 증명되는 점, 솔로몬이 구리를 대대적으로 주조했다는 것 역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데버는 2001년에 쓴 책(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 When Did They Know It?)에서 성서가 묘사하듯(왕상 7:13,18; 대하 2:1-16) 15-19세기의 가나안-페니키아 세계에서 나온 것이 솔로몬 성전의 특징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기원전 8세기의 상아로 만든 석류에는 히브리어로 "…h('야웨[Yahweh]'로 추정)의 성전 제사장을 위해 따로 둔 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고고학 증거들이 솔로몬 성전의 역사성을 확실하게 뒷받침한다고 봅니다. 마자르(Amihai Mazar)는 2008년의 글에서 에일랏 마자르에 의해 발굴된 30~40미터 크기의 거대한 돌 건축물은 다윗 시대의 구조물로 예상되며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은 4헥타르(4만 평방㎡)크기의 도시였다고 주장합니다.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에 들어서 '수정주의자'들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성서학계는 훨씬 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전에는 족장 시대, 출애굽, 가나안 정복, 솔로몬 왕국 등에 관해 시기마다 논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성서 전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저서들로 고대 이스라엘을 연구하는 학계는 몸살을 앓습니다. 지난 몇 년간 성서 학계는 논쟁의 불길이 너무 뜨거워져 인신공격적인 특성까지 보이게 됩니다. 최소주의자, 최대주의자, 허무주의자라는 서로 비아냥거리는 용어가 등장하는가 하면, 시온주의자나 나치주의자라는 말까지 오가게 됩니다. 어느 한쪽도 자신의 주장을 거둬들일 의향이 전혀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수정주의자와 그 반대쪽 학자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생길 것입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이스라엘의 '종교'가 연구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야훼 하나님에게 배우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쿤틸렛 아즈루드와 키르벳 엘 콤 비문일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 30년 넘게 학자들끼리 진저리가 날 정도로 반론과 재반론을 펼쳤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결론은 없습니다. 계속되는 의문은 일신교가 언제 이스라엘에서 발전했는가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반(反) 형상주의(aniconism)가 항상 야웨 숭배의 특징이었는가 하는 것도 논쟁입니다. 마크 스미스의 저서(The Origins of Biblical Monotheism), 패트릭 밀러의 저서(The Religion of Ancient Israel)와 알베르츠의 저서(R. Albertz, <이스라엘 종교사 1, 2>,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년)는 고대 문헌, 고고학, 고대 근동의 자료를 통합적으로 사용해서 이스라엘 종교를 연구했습니다. 데버는 최근 두 권의 책을 펴내면서(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2008년, The Lives of Ordinary People in Ancient Israel: When Archaeology and the Bible Intersect 2012년) 성서에서 감춰진 야웨 신앙을 연구합니다. 이러한 글들의 방향은 고고학과 사회학 등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의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를 연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최근의 학자들 가운데 최대주의자라고 불릴 만한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서로 성서를 증명한다"는 원칙은 순환 논리의 오류에 빠지기에 성서 외적인 자료들을 총동원하는 분위기입니다. 성서의 해석은 고고학(성서 고고학이라 부르든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 부르든)의 발굴과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외적인 성장에만 열을 올리다가 한계에 도달한 한국교회가 이제는 내적인 성장, 곧 신학에도 관심과 열의를 쏟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대·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으리으리한 예배당과 달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변변한 교회 박물관이나 도서관, 신학 연구소 하나 없는 현실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성서와 고고학과 관련된 참고 문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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