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archaeology)이라는 낱말은 헬라어 '아르카이오(archaio)'와 '로고스(logos)'를 합친 것으로, 옛것들에 관한 사실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 낱말은 '골동품학'이나 '고대 전설들' 또는 '역사'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은 성서 시대, 곧 성서의 시대적 배경과 성서에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입니다.

성서고고학을 시작한 이들은 대부분 구약학자이었기에 성서고고학이라고 하면 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과 지역을 연구합니다. 성서고고학의 기틀을 닦아 놓은 학자들이 대부분 이스라엘 학자들과 구약 학자들이었기에 신약은 상대적으로 연구를 적게 했기 때문입니다. 성서고고학이 다루는 대상은 매우 다양합니다. 상형문자와 설형문자로 기록된 비문들, 석비나 조상(彫像), 신전 벽, 부조물, 건축물, 벽화나 조각기둥, 도기 그릇, 무기들, 개인적인 장신구들, 의복 등등 거의 모든 유물이 고고학의 연구 분야입니다.

고고학과 고고학자에 대한 인상은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중절모와 채찍, 그리고 상당한 싸움 실력으로 무장한 주인공이 성서의 법궤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짜릿함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입니다.

고고학은 성서의 집필과 역사적인 신빙성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성서가 비교적 후대에 쓰였으며 내용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과격한 비평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고고학의 초기 임무였습니다. 성서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현대적인 탐사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일련의 획기적인 발견과 수십 년에 걸쳐서 꾸준히 진행된 고고학 발굴과 해석을 통해서 대다수 학자는 성경의 기록이,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줄거리에 관한 한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성서를 따라 탐사하다

1838년,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역사적 장소의 위치를 찾아내어 성경을 비판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185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탐사했습니다.

성서에 들어 있는 지리학 정보를 활용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현재 아랍 지명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로빈슨은 과거에 잊힌 성서의 지명들을 고대의 언덕 수십 개소에서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로빈슨과 그의 후계자들은 성서 속의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루살렘, 헤브론, 얍바, 벧스안, 므깃도, 하솔, 라기스 등 수십 개의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해 나갔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왕립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고도로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서 지명 확인 작업을 추진하여 북쪽 요르단 강의 여러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의 네게브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의 세밀한 지형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지도를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지형 조건이 성경 기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고고학의 발굴과 발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표준적인 연대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노력은 성서 본문에 바탕을 두었으며 성경 속에 기록된 인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에는 성서 이외의 자료도 필요했습니다.

18세기 말 유럽 학자들은 놀라운 기념 건축물과 귀중한 상형문자 명문이 방대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집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해서 기원전 1207년에 파라오 메르넵타가 세운 승전 기념비를 발굴했습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민족에게 거둔 대규모 승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서가 아닌 외부 자료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한 최초의 자료입니다. 그보다 조금 후대의 파라오인 시삭(열왕기상 14:25)은 22왕조의 셰숑크 1세로 확인되었으며 그는 예루살렘에 처들어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945년부터 924년까지 왕위에 머물렀으며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이 원정 내용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나중에 미국과 독일이 가세한 학술발굴단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궁전, 설형문자 등을 발굴해 냈습니다. 이 제국들의 미술가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 시대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왕들인 오므리, 아합, 예후와 남유다의 히스기야, 므낫세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서판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를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위 여러 나라의 통치 시대를 비교 분석한 결과 대단히 정확한 통치 연대가 작성되었습니다.

고대 요르단 왕국의 땅에서 19세기에 발견된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군대에 거둔 승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열왕기하 3장 4~27절까지 기록된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에 관한 성서 외적인 중요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올브라이트와 성서고고학

20세기 초반 20여 년 동안은 고고학의 황금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영국, 독일인들이 각각 팀을 만들어 사마리아, 게젤, 므깃도 등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인 학자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가 20세기 초에 개척한 성서고고학은 대형 언덕(텔, tell)의 발굴에 주력했습니다. '성서고고학'이라는 낱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32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였습니다.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올브라이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분석가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자입니다. 유럽 학자들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리 그는 성서와 고고학 자료들을 연결함으로써 성서를 더욱 역사적인 문서로 확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가 뒤이어 고고학을 발전시켜 1955~70년대에 성서고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는 고고학을 성서학의 일부로 인식하여 성서 본문과 고대 근동학의 모든 측면을 연결했으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그 둘을 하나로 묶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자 많은 고고학자의 시각에 변화가 생깁니다. 심지어 올브라이트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의 학설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브라이트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열심에 치중한 나머지 고고학 결과물을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교한 고고학 접근 방법을 갖추지 못하였고 성경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발굴 조사의 결과 보고서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발굴과 조사가 더 진행되면서 고고학은 이스라엘 및 근동 전체에서 밝혀진 사실과 성서에 기록된 세계 사이에 물질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 방법의 발달과 함께 발굴과 조사가 진행되면서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 사이에 어긋나는 점이 더더욱 많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성서 속의 역사, 사건, 인물 등을 고고학의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으로서의 '성서고고학'이라는 말 자체가 논란이 있게 됩니다. 과거에는 성서를 '기준'으로 여러 고고학 유물과 자료를 '해석'해 왔지만, 이제는 더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 자체가 고고학 증거와 여러 면에서 상충할 뿐만 아니라 성서 속의 사건들이 주변 나라들의 정치·경제 역학 관계와 맞물려서 벌어진 일이기에 단독으로 '오직 성서'만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Archaeology of Syro-Palestine)이라고 지칭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리적 범위가 성서의 지역들을 모두 포괄할 수 없으므로 미국의 고고학계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근동고고학(Near Eastern Archae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성서 고고학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고고학으로 지칭하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물음은 고고학이 과연 어느 학문 영역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고학은 사회과학의 틀 안에 있는 인류학과 연결이 됩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 및 고대 근동에 관심이 있는 고고학은 문학적·언어학적 연구와 밀접해지면서 인문학의 한 분야에 놓이게 되며 고고학의 발굴과 해석은 자연과학의 응용법이 필요합니다. 현대에는 생태학적인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대인은(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군사·정치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고학은 여러 학문을 종합하여 고대의 지표, 지리, 인구와 경제, 사회, 정치 구조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고고학

성서 비평가들은 성서를 계속 해부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달리 초기에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독립적인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성서 기록에 계속 의존해서, 성서를 기준으로 고고학 자료를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새로운 사조가 성서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유물과 성서 원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게 됩니다. 성서의 땅에서 탐사 활동을 벌인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성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서 원본의 배경이 된 고대의 생활을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 고대 유적지를 발굴할 때 대상 유적지의 성경 관련 부분에만 역점을 두었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각종 동물의 뼈와 곡물의 씨앗, 토양 견본의 화학적인 분석, 세계의 수많은 문화에서 도출된 각종 장기적인 인류학적인 모델은 물론 발굴된 유물과 건축 및 정착 유형 등이 더욱 폭넓은 경제 변화, 정치 역사, 종교와 풍속, 인구 밀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서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협력 속에서 성서 속의 삶과 신앙과 이야기들이 더욱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고고학의 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고학은 성서 사건들의 일반적인 배경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민족들과 장소들을 광범위하게 복원해 준다.
△고고학은 성서의 이야기들이 제공해 주지 않는 사건들의 구체적인 시공간적, 문화적 배경을 제공해 준다.
△유물들을 보완해 줄 물질문화의 풍부한 유물들을 제공해 준다. 성서 본문들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성서 시대의 일상생활을 조명해 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경제적 조건들, 종교와 철학, 예술과 문화, 기술, 통상, 국제 관계의 폭넓은 문화적 배경을 알려 준다.
△고고학은 성서 본문이 기술하는 공인된 종교와 대조를 이루는 민간 종교의 풍습들을 밝히는 데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는 문서를 기록한 상류 엘리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의 종교 생활을 보여 준다.
△고고학 기록은 최소한 현대의 해석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편집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서 성서 본문보다 더 객관적이다.
△고고학 자료들은 이미 모든 성서 본문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오래전에 관측했듯이, 성서를 그 원래의 배경 속에 놓아두게 되면 성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더 믿을 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서는 더 인간적이고 덜 신(神)적인 듯이 보이겠지만, 그것이 신앙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서 본문과 고고학 유물에 대한 해석은 신앙의 문제-곧, 지식의 문제임과 아울러 직감과 공감의 문제-이다.
△성서학의 앞날은 본문 비평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단점도 있습니다.

△비교적 '객관적'인 학문이기는 하지만 해석에는 고고학자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
△고고학 기록에서 민족성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예를 들면, 도기나 건축물을 통해 블레셋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비교 분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고고학의 계속된 발굴과 조사를 통한 새로운 발견에 따른 새로운 결론의 재형성.
△고고학은 사회사, 경제사의 분석은 비교적 수월하지만, 정치사를 다루기는 어렵다.
△50년 정도의 짧은 시기를 구분하거나 사건을 파헤치기는 어렵다.

고고학은 성서의 배경이 된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 요시야, 포로기 이야기 등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공헌을 합니다. 성서와 고고학의 협력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훼를 향한 그들의 신앙을 더 실제로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일차적인 자료는 '성서'입니다. 고고학의 사용에서 신앙과 비평학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롤랑 드보(Pere Roland de Vaux)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본문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본문들은 문학비평, 전승비평, 역사비평의 방법론들에 의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고학은 있는 무엇이 본래의 모습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을 확정해 주지는 못한다. 단지 우리가 본문에 부여하는 해석을 확증해 줄 수 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고고학과 관련된 성서학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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