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주의자와 최소주의자

고고학과 관련하여 성서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겠습니다.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다양하겠으나 간략하게 다섯 개 정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서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성서 외적인 증거들은 무시한다.
둘째, 성서의 본문을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이고 성서 외적인 증거들도 약간 고려한다.
셋째, 성서의 본문만큼 외적인 자료들도 선입견 없이 접근한다.
넷째, 외적인 자료들에 의해 증명되지 않으면 성서의 본문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섯째, 성서 본문과 거기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성서의 역사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을 최대주의자(Maximalist)라고 부릅니다. 성서를 신뢰할 만한 1차 자료로 보고 그 밖의 자료는 성서에 대조하여 참조할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구약성서의 역사성이 필수 사항이 되기에 출애굽, 가나안 땅 정복, 다윗 왕조 등의 사건이 성서의 서술과 '같은 방법으로 실제로' 일어났는지가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성서를 후대의 작품으로 보고 성서의 역사성을 조금만 인정하는 계열의 학자들을 최소주의자(Minimalist)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고학 등과 같은 성서 바깥 자료를 1차 자료로 봅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올브라이트 학파 계열을 최대주의자, 알트와 노트 계열의 학자들을 최소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견해나 의견을 '~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몇 가지 의견이 같다고 한 무더기로 묶어버리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 학자

알브레히트 알트(Alt)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정착)에 관해 쓴 1925년 논문에서 평화적 정착 모델 혹은 내부적 유입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묘사한 것처럼 짧은 기간의 정복 전쟁에 의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롭게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입니다.

알트의 수제자인 마틴 노트(Noth)는 1930년대에 사사 시대(기드온, 삼손 이야기가 나오는 사사기의 배경) 동안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델을 발전시켰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12부족 연맹에 대한 성서 기사를 '암픽티오니'라고 부르는 후대의 그리스 부족 연맹과 관련하여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가나안의 세겜에서 모인 계약회의(여호수아 24장)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선을 위해서 느슨하게 묶인 '성스러운 연합체'로, 중앙 성소에서 정기적인 언약-갱신 의식을 집행하면서 유지해 갔다는 주장입니다.

맨프레드 바이페르트(Weippert)는 꼼꼼하게 고고학적인 근거를 조사해서 알트와 노트의 이론을 옹호하였으며,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이었다고 결론내립니다(오늘날,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이 농경민인지 유목민인지 하는 문제는 첨예한 논쟁거리입니다).

미국 학자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Albright)는 '올브라이트 학파'를 이루었으며, 그는 19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성서고고학'을 주도했습니다. 올브라이트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의 기사들을 '전반적으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제자 G. 라이트(Wright)는 1950~70년대에 한창이었던 '성서 신학' 운동과 짝을 이루어서 성서 고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라이트의 뒤를 이어 존 브라이트(Bright)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의 역사> 제4판을 편집한 브라이트의 제자 윌리엄 브라운은 스승인 브라이트의 보수적인 주장을 대부분 뒤집어 버립니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죠.

1980년대에 들어서서 전혀 다른 방향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인류학과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무장한 노만 갓월드(Gottwald)는 초기 이스라엘의 기원을 가나안 정복 전쟁이 아니라, 가나안 내부에서 일어난 일종의 '농민 혁명'을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도시국가의 착취, 불평등, 노예제도 등의 불합리성이 농민들로 하여금 기존 체제를 거부하게 했다는 다분히 유물론적인 주장입니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정했습니다.

체이니(Chaney), 할펀(Halpern), 쿠트(Coote) 등의 학자들은 성서가 묘사하는 단기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부정하며, 대체로 초기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가나안 민족 또는 이주민들과의 혼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대부분 부정하는 학자들에 맞서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저명한 고고학자로 윌리엄 데버(Dever)를 들 수 있습니다. 성서의 각종 사건들에 관한 고고학 증거는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의 저자인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같은 학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데버는 성서의 역사성을 찾는 데 노력합니다.

이스라엘 학자

고인이 된 벤자민 마자르(Benjamin Mazar)는 현대 이스라엘 성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 1인자로, 한마디로 그는 이스라엘의 올브라이트였습니다. 마자르는 초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걸려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또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헷, 히위, 여부스 족속과 같은 서로 다른 인종의 혼합체라고 봅니다.

이가엘 야딘(Yadin)은 마자르의 제자로서, 사해문서를 발굴하고 편집하는 데 참여했고 하솔을 발굴했습니다. 또한 마사다 요새와 바르 코흐바 반란 때의 편지, 그리고 솔로몬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문을 발굴하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에서 고고학 발굴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반(半) 유목민으로서 성서가 묘사하는 것처럼 수많은 가나안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정복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요하난 아하로니(Aharoni)는 마자르의 또 다른 제자로, 기본적으로 아하로니는 전반적인 침투 과정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알트의 노선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곳에 머물러 살던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의 양편에 있던 산간 지대의 여러 장소들을 파괴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과거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중요한 고고학적인 탐사들은 주로 아하로니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큽니다.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비교적 보수적인 입장의 고고학자입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이 여러 면에서(집터 분포와 위치, 토기류의 성분, 경제 사회적 구조와 같은 부분) 가나안 문화와 다른 점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가 비록 성서에서 묘사하는 것만큼의 웅장한 규모는 아닐지라도, 핑컬스타인이 주장하는 촌락 정도로 작은 규모는 아니었으며 강력한 통치력이 뒷받침하는 도시 규모였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주의를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근본주의 신앙에 가까운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는 약간의 의구심이나 부정적인 생각마저도 불경건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성서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목회자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인터넷과 다양한 서적들을 통해 교인들은 교회에서 배운 것과는 조금 '다른' 지식을 배워 갑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과 성서에 관한 정당한 탐구심마저 색안경을 끼고 보기에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는 입을 다물고 밖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됩니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한 부분이다"는 말이 있듯이 성서에 대한 의심과 도전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신학'입니다. 목회자 윤리성의 회복, 민주적인 운영, 재정의 투명성 등을 교회 개혁의 대상과 목표로 두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작 중요한 신학은 빠져 있죠.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는 위에 열거한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학과 사상의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학 등등의 수많은 학문들과 성서와의 교류·소통에 눈을 감고 있는 한 교회 개혁은 반쪽짜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서의 무오류성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은 아닐까요? 동물의 왕 호랑이와 사자가 어디서든 느긋하게 걷고 누가 있든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듯,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과 정반대의 주장이라고 해도 말이죠. 말 그대로 성서가 일점일획까지도 무오하며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신(神)임이 분명하다면 여타의 학문이나 사상에 맞서는 것을 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수정주의자들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한 학자들로 훨씬 더 과격한 방법으로 성서의 역사성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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