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축일 맞아 연 '동물 축복식' 후기
크든 작든 복을 구하고 받는 일은 종교가 가진 보편적인 역할 중 하나이다. 어쩌면 종교란 인간이 복을 구하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에 있어서 그 의식(儀式)은 인간의 편에서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신 또한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한다. 기독교에서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는 첫 번째 양식은 민수기 6:22-7에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신은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 지켜 주고, 얼굴을 비추고, 은혜를 주며, 얼굴을 향하여 주고, 평강을 내려 준다. 이 축도에서 특이한 점은, 신이 '얼굴'을 강조한 것이다.
신이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비출 때, 그들 또한 얼굴을 들어 신과 마주했을지는 의문이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신의 얼굴을 보았지만, 죽지 않았음에 감사해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다(창 32:30). 신의 영광을 구하는 모세에게, 신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 죽게 되므로 등만 보여 주었다(출 33:20-3). 모세와 엘리야가 신을 만난 호렙산에서, 신은 나무 속의 불이나 세미한 음성으로만 나타났다. 그러므로 신이 자신의 얼굴을 직접 비추고, 우리를 향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루터신학교 교수인 앤드류 루트(Andrew Root)는 그의 책 <강아지가 알려 준 은혜 The Grace of Dogs>(코헨, 2020)에서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해석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레비나스와 유대인들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명의 존재만은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했는데, 그는 바로 강아지였다. 노역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한 강아지가 다가와 꼬리를 흔들고 얼굴을 핥으며 웃어 주었다. 이 순간을 레비나스는 "녀석에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108쪽)고 고백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을 '타자의 얼굴'이 현존하는 것을 통해 설파한 레비나스는 '개의 얼굴'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개와 인간은 영적인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고, 공의로운 존재라고까지 언급했다(109쪽). 그는 개를 통해 축복을 경험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10월 4일)을 맞아 '동물 축복식'을 여는 교회가 많아졌다. 필자가 속한 '그리스도인+동물권'은 성공회생명기후연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함께 "창조 세계 벗들과 함께하는 예배"라는 타이틀로 2025년 10월 12일 주일 오후 4시부터 서울주교좌성당 마당에서 '반려동물 축복식'을 거행했다. 약 80명(名)의 사람과 (사진을 포함한) 약 80명(命)의 반려견, 반려묘, 소들이 함께한 시간이었다.
예배는 성공회 감사성찬례식을 따랐고,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시간의 대부분을 동물들을 위해 기도했다. 축복은 경동교회 목사를 포함해 개신교 목사 셋과 사제 넷, 총 일곱 명이 진행했다. 사목단이 마당 곳곳에 서 있으면 반려동물과 반려인이 찾아와 축복받았다. 안수하거나 성수나 성유를 바르거나 꽃을 뿌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축복했다.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친구들과, 소처럼 너무 크거나, 고양이처럼 외부 출입이 어려운 동물들은, 사진으로 대체해 축복했다. 기독교 예전이지만 일반 동물권 활동가인 '곰프로젝트' 최태규 대표를 초청해, 과거 웅담 채취용으로 들여온 곰들이 더는 인간을 위한 삶이 아닌 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이날 헌금은 이곳에 드려졌다.
'축복'이란 신이 사랑으로 만든 자신의 피조물들을 향해 얼굴을 드는 것이다. 이때 그의 피조물들은 더도 덜도 말고 창조된 모습 그대로 인정받는다. 이날은 모든 피조된 것들이 신의 자녀로서 사랑받는 존재임을 만끽하는 날이다. 축복의 날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날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에덴에서와 같이 신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동료 피조물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 축복식까지 와서 축복을 받는 개들이 있는 반면, 어느 음습한 강아지 공장에서는 펫 샵에 제공할 강아지 새끼들을 생산하기 위해, 강제 임신과 자궁이 빠지기까지 출산을 반복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모견들의 세상이 있다.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하지만, 그 실상은 참혹하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깨끗한 곳에서, 케어를 받으며, 순리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한낱 개들에게는 있을 수 없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브리더(Breeder)에 의해 소수의 개들만 길러, 까다로운 심사 없이는 개를 분양하지 않는 외국의 사례와는 매우 다른 그림이다. 그와 동시에 유기견 센터에는 버려진 개들로 날마다 넘쳐난다.
동물과 함께하는 반려 인구가 늘어남에 따른 목회적 돌봄도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인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동물들도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신이 지은 모든 피조 세계를 형제, 자매라 부르며 가족으로 여겼다. 레비나스는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 얼굴을 비추어 준 강아지로부터 축복받았다고 느꼈다.
축복이란 제도나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다. 인간이 창조된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인간이 축복을 매개할 자격은 있을 수 없다. 축복이란 상대를 창조된 모습 그대로를 다해 존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임소연 / 숨탄것들의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