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기독교, 로마를 뒤흔든 낯선 종교>(IVP)
| 다 똑같아 보여 |
"웃기지 않아? 이상하지… 새로운 데 와도 다 똑같아 보여."
짐 자무시의 로드 무비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 1984)을 관통하는 주인공 에디의 대사다. 윌리, 에디, 에바 세 사람은 무료한 삶의 자리, 뉴욕과 클리블랜드를 떠나 따뜻한 낙원, 플로리다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낙원은 거기에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 모노톤으로 단조롭게 칠해져 있다. 그런 까닭에 뉴욕, 클리블랜드, 플로리다로 배경을 옮겨 가지만, 에디의 말처럼 늘 같은 장소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단조로운 색과 느린 호흡은 이 영화의 지루한 여행이 언제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 곧 관객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서늘하게 초대한다. 도시는 바뀐들 같은 곳처럼 보이는 이유는 어렵지 않다. 그들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빛깔을 바꾸는 것은 배경이 아니다. 삶의 시선과 태도다.
사람들은 어떤 기대로 교회로 올까. 어쩌면 낙원을 찾아 나선 세 사람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교회는 이 땅의 그 어느 곳보다 천국을 자주 말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기대하고 찾았던 교회의 색도 때로는 단조롭곤 하다. 세상에서 교회로 장소를 옮겨도, 세상과 다르지 않은 관성적 삶의 문법 때문에 교회도 세상도 우리도 여전히 같은 색으로 보인다.
| 가까운 제국보다 낯선 |
신약학자 니제이 굽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서 다른 빛깔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기독교, 로마를 뒤흔든 낯선 종교>(IVP)는 그 다채로운 빛을 뿌리는 프리즘이다. 1세기 교회는 매우 낯설고 이상한 방식으로 그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는 빛바랜 사진처럼 점점 그 매력을 잃어 갔다. 굽타는 오늘날 미국의 상황에서 교회가 역겨울 정도로 세상과 똑같아졌다는 이야기까지 듣는다고 한다. 이는 미국 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 기시감도 준다.
"미국 기독교는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며 배타적인 과거의 잔재 말고는 사회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중략) 더 나쁜 것은 교회가 때로 착취, 탐욕, 나르시시즘, 극단적인 개인주의, 성차별, 계급주의, 민족주의, 인종차별 등 미국 문화의 가장 어두운 악덕을 전시하고 조장한다는 것이다." (16-17쪽)
오늘날 교회를 세상과 구별되도록 다시 빛나게 하려는 많은 이들이 초대교회에 주목한다. 그리고 종종 외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런데 과연 그 구호가 담은 내용은 무엇인가? 성장, 기적, 은사, 부흥, 혹은 공동생활?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꿈만 같은 일일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초대교회가 지녔던 위대한 면들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굽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위대했는지에 관한 장황한 영웅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들이 지닌 실패와 연약함을 고스란히 인정하되, 로마 세계를 깊이 분석하며 대체 그들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이상했는지 그 독특함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독특해지기 위해서, 튀기 위해서 이상함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의 힙스터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믿는 대로 살았을 뿐이다.
교회는 로마 세계에서 올바른 종교(렐리기오, religio)의 기준에 어긋나 있었다. 렐리기오는 오래되어야 했다. 시간을 거친 신들의 협력이 보증되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얼마 전 처형된 시골 이단자를 내세우며 새롭게 등장했다. 렐리기오는 정해진 의례와 규칙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회의 모임에는 피가 흐르고 연기가 오르는 희생 제의도 없었다. 제의가 이루어지는 신전, 신상이라는 눈에 보이는 신,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제사장 등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예수와 그의 영의 임재가 그 틀을 해산했다. 렐리기오는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둘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사적 공간, 곧 가정에서 모였다. 렐리기오는 사랑을 비롯한 감정은 배제하고 축복과 번영에 집중했다.
그러나 교회는 기준 미달이었다. 쟁점은 종교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다. 로마는 심지어 유일 신앙인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직 로마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이들인지 아닌지만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로마에, 황제에게, 우리의 성공에 도움이 됩니까?" 교회의 질문은 로마와 전혀 달랐다. "당신들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그분을 닮아 가고 있습니까? 그분이 맡기신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참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듣도 보도 못한 질문들이었다. 결국 교회는 하나의 호칭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비상식적이고 부적절한 이들에게 붙는 경고, 수페르스티티오(superstitio)였다. 심지어 '치명적'이고, '타락하고', '과도한" 수페르스티티오라고까지 말이다. 로마가 맞았다. 그것은 누명이 아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범죄자를 향한 우주적 찬사는 로마의 우주를 지탱하는 질서, 로마의 신과 황제의 질서를 뒤흔들고 위협하는 시도였다.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 속에 낯선 세상을 가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머나먼 천국보다 익숙한 |
"그들은 지상에 천국의 축소판을 세우려는 예수님의 비전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이나 신성한 존재와 교제할 기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 세상이 선함, 자선, 평화, 기쁨, 그리고 번영을 향해 변화될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268쪽)
교회의 눈에는 로마 제국이 정상으로 규정하는 평화 너머에 있는 평화가 비쳤다. 교회는 온 세상에 그 빛을 비추려 했다. 그 출발점은 그늘진 세상에서 볕 좋은 낙원으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다. 가장 익숙한 자리, 바로 가정이다. 교회는 낙원의 공동체를 그들 삶의 가장 가까운 가정으로 재구성했다. 이전까지 가족이라 말할 수 없었던 이들과 기꺼이 가족이 되어, 함께 모여 음식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다. 결국 사랑이다. 이리저리 갈라놓고 찢어 놓은 제국의 폭력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세상을 바꿀지언정 세상과 같아질 수는 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세상 앞에 보이는 이상하고 낯선 설득력, 로마를 색칠할 만큼 위협적인 매력이었다.
"[그것은] 신들을 달래고 그들의 물질적 축복을 확보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풍성한 공동체로, 가족의 친밀함으로, 우정과 같은 사랑으로, 그리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으로 초대했다. 같은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위험을 느꼈지만, 다른 이들은 소망을 발견했다." (124쪽)
<기독교, 로마를 뒤흔든 낯선 종교>는 과거의 찬란했던 초대교회의 영광을 추억하는 여행이 아니다. 굽타의 책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 곧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선명하게 초대한다. 이 책은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우리가 1세기 교회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오늘의 세상과 얼마나 똑같아져 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이중 질문이다. 우리 삶을 둘러싼 제국에 낯설면서도, 머나먼 천국보다 가까이서 빛을 내는 교회가 되고 있느냐고 말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곁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돌아갈 초대교회는 1세기 로마는 물론 그 어디에도 없다.
이광희 /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며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도미하여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예배학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유튜브 채널 '예배에 관한 아무 말'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배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예배의 감각>(비아),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를 우리말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