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주체적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 교회개혁실천연대가 개최한 2025 연속 기획 포럼 '혼란한 시대 속 그리스도인의 주체적 신앙' 발표자들의 발표문을 요약해 총 9회에 걸쳐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발표 전문 및 자세한 내용은 교회개혁실천연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
'주체적 신앙'이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다. 개인적으로 '청년'이라는 세대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워 말하는 방식에도 거리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내가 전할 이야기는 청년이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된 경험담이라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동료 시민으로서 또 같은 신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교회라는 공간에 품고 있는 질문과 그에 대한 지향점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 청년을 거부하는 교회 VS 청년이 거부하는 교회 |
나의 이야기를 열며 청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거부감을 표했으나, 그럼에도 이번 포럼에서 '청년'이라는 주제를 따로 떼어 낸 까닭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전 포럼에서 다루어진 '여성'이라는 주제가 그랬듯이 '청년' 역시 교회가 특정 집단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드러내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청년을 거부하는 교회!'(포럼 3주차 제목이 '청년이 거부하는 교회?, 청년을 거부하는 교회!'임 - 필자 주)라는 제목이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청년들이 아닌 교회의 문제로부터 찾으려는 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회가 겉으로는 특별히 청년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청년이 찾아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만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 역시 교회에 다니던 시절 청년부에 많은 지원을 해 주셨던 교우들의 손길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환대는 종종 어떠한 조건을 전제로 한다. 교세 확장이나 교회 존속을 위해 필요한 청년의 노동력, 에너지, 분위기, 재생산 가능성 등 '청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어떤 긍정적인 조건들 말이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어쩐지 기시감이 들곤 한다. 한 존재 한 존재, 고유한 각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청년이라고 호명되는 단일 대오 집단을 필요로 하는 이 방식은 사회가 청년을 소비하는 방식과 똑 닮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집단이 한 사람의 존재를 고유성 그 자체로 환대하지 않고 어떤 능력 또는 수단으로 환원하여 조건부 환대를 할 때, 그 쓸모는 환영받을 수도 있겠지만 존재 자체는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이 아이러니가 오늘날 교회와 사회가 '청년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청년이라는 집단의 쓸모는 필요로 하지만 청년이라는 단어 너머에 있는 한 존재를 환대하지 않는 교회와 사회의 모습 말이다.
이번 포럼이 '요즘 애들'을 탓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향해 청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보고 싶다. '청년이 거부하는 교회?'라는 물음을, '청년이 거부하는 교회!'라는 능동적 선언으로 바꾸어 말해 보고자 한다. 물론 '교회를 거부한다니, 그게 신앙인가?' 혹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청년이 능동적으로 거부하는 교회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듣고 말해 왔던 가시적 교회이다. 나는 단지 기존 교회와 어울리지 않아 밀려난 존재로, 거부당했기에 교회를 떠나 버린 가나안 성도로만 남고 싶지 않다.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포함한 내 삶의 수많은 서사와 맥락들,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까지 겪었던 다채로운 시간을 존중해 주지 않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밀려난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인 주체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때론 이러한 주체적 거부가 교회 안에서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고 부르짖는 이들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특정 종교 집단의 제도로만 남아 버린 교회, 그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회, 창조의 다양성을 저버리고 집단의 존속을 영위하기 위한 구조를 갖추기 급급한 교회, 즉 교회의 비본질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싶다. 대신 교회의 본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공동체,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함께 추구하고 만들어 가며 살고 싶다.
| 청년이라는 집단이 아닌 각자의 존재가 가진 고유함으로 |
교회를 떠나고 '교회 가기 싫은 사람들의 순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이야기였다. 결국 우리가 교회에 바랐던 것은 '깊은 교제', '깊은 앎', '깊은 영적 나눔'이었다. 이미 기존의 교회 안에서도 그 깊음을 누리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지만, 동시에 그 깊음에 닿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청소년 때만 해도 옆에서 예배드리던 친구들이 왜 더 이상 교회에 남지 않게 되었는지 이제 옆을 좀 돌아봐야 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구조가 곧 모두에게 좋은 구조는 아닐 수 있으니까.
혹자는 교회에 교제, 앎, 영성이 이미 충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공통으로 고민했던 것은 '깊음'이다. 무례히 대하지 않고 서로의 빛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깊음' 말이다. 교회는 흥미로운 것을 제공하고 활기차고 밝은 에너지를 보여 주면 청년들이 그에 부응할 것으로 생각하며, 청년들 또한 재미를 1순위로 추구하는 밝고 활기찬 집단이라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년들이 정말 교회에 원했던 것은 구미가 당기는 수련회, 신박한 레크리에이션, 재밌는 부대 행사, 더 좋은 환경과 지원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겠다고 선언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깊음'이 아니었을까?
교회를 주체적으로 거부한 청년들, 교회의 모순과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본질에 닿고자 노력하는 청년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궈 나가며 다채로운 존재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말해 주는 것은 '청년'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청년을 주제로 한 자리에서 항상 말하고 싶은 것은 청년을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 어떤 필요로 꾸며진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임에 참여했던 분들은 교회 안에서 흔히 마주했던 청년들과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쉽게 밖으로 내비칠 수 없었던 다채로운 존재의 빛을 지닌 분들이었다. 그 다양함을 보며 나는 때론 재밌었고, 감동했고, 배웠고, 위로받았다.
교회가 더 이상 어떠한 이유로 청년이란 집단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라, 각자의 존재가 가진 고유함을 환대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좀 소란스럽고 시끄럽고 산만한 과정일지라도 말이다. 나아가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신앙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축복해 주는 교회라면, 그것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한 몸, 몸 된 교회가 아닐까? 결국 우리는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내 눈앞에 존재하는 익숙한 구조로서의 교회를 떠나 또 다른 방식의 '교회'를 찾아 나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나는 교회를 거부한 적이 없다 |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 역설을 다시금 말하고자 한다. 나는 앞서 적극적으로 교회를 거부하고 능동적 주체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거부한 적이 없다. 다만 내 눈앞에 존재하는 익숙하고 구조화된 교회의 형태를 떠나 적극적으로 교회를 찾아 나서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동안 보고 상상해 온 교회라는 형태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나의 고민에 함께해 준다면 감사하겠다. 나도 그저 '청년 1'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신앙 여정에 동행하는 자매 형제가 되고 싶다. 교회라는 형태 바깥에서, 그러나 여전히 교회를 고민하는 공동체로서.
나의 신앙 여정을 이야기하며 기성 교회를 비판만 하게 된 점에 대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나 역시 그런 교회에서 신앙을 키웠고 그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변화를 꿈꾸며 살아가는 분들,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기꺼이 동참하는 분들을 늘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도 때론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될 수 있겠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김자은 / 여성안수추진공동행동 2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