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저자 김학철 교수
[뉴스앤조이-엄태빈 기자]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포이에마)의 표지에 실린 렘브란트의 작품 '논쟁하는 두 노인'에는 성서를 앞에 두고 토론하는 베드로와 바울이 등장한다. 바울은 오른손 검지로 성서의 특정 구절을 짚으며 강론하고 있고, 베드로는 손가락으로 넘길 다음 성경 부분을 끼워 넣고 있다. 렘브란트의 이 작품은 우리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생각과 토론 없이 무조건 '성경 통독'만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준다.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저자 김학철 교수(연세대)는 성서에 손을 대고, 곧 성서를 읽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중세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를 읽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라틴어로 낭독되는, 그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성서의 말씀을 들었을 뿐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서와 독자 사이에 어떤 매개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종교개혁 이후 성서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6년 출간 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가 19년 만에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기독교 교양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저자 김학철 교수는, 이 시대 속에서 신학이 게토화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다시 한번 성서를 '손으로 읽는' 방법을 제안한다. 천천히,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단어 한 단어에 손끝을 대고 성서를 읽는 것을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접어 두고,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진지하게 듣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보의 출처도 불분명한 1분짜리 짧은 영상과 쇼츠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오늘날 신약성서를 '천천히', '정확히' 읽는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뉴스앤조이>는 2월 25일 김영사 한옥 별관에서 김학철 교수를 만나, 성서를 천천히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이 시대에 이러한 태도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성서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는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 본문에 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는 자신감이 지나친 것임을 깨달았다. 믿는 것도 사는 것도 더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더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서 앞에 삼가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자신의 억지 주장을 성서를 통해 입증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줄지 않은 듯 보인다. 성서라는 권위 앞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히 서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다'라는 경건을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고 우겨대는 현상이다." (머리말, 16쪽)
김학철 교수는 20년 전 '신진 신약학자'로 활동하던 때와 현재 자신의 성서 본문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믿는 것도, 사는 것도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작은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던 예전의 모습은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자신이 설정한 '합리'와 '세상'이 부합하지 않으면 괴로워했고, 그러한 태도는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예수가 가르친 삶의 방식이 아닌 것 같았다. 김 교수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더 관용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앙을 갖는 동기 중 하나가 "불안과 모호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몸부림"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순 없는 확실한 세상을 원한다. 확신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이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역설적으로 "모호함을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분명히 나에게 뭔가 보여 주셔야 한다는 확실성에 기대기보단, 근원적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주 만물에 가득 찰 것이라는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러면 삶의 불분명하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수용하며 살게 돼요. 역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커질수록 삶의 모호성을 수용하게 되는 거죠.
이전에는 확실하고 분명한 신학을 지향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불분명하더라도 너그러운 태도가 우리 삶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한다고 믿어요. 그렇다 보니 어떤 성경 본문에 대해서도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죠. 방법론적으로는 설득이 아니라 제시와 소개의 방법을 택하려고 합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서를 택해 오곤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성서라는 확실성을 동원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거나 인종을 혐오하는 등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척하거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 그러나 김학철 교수는 이 현상이 한국교회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성경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 말씀을 인용하는 것, 예수의 시험 장면에서 사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져도 발이 땅에 안 닿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기 뜻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례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우리의 뜻을 정당화하기 전에 그것이 정말 그 뜻인지 천천히, 자세히 읽어 보자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목적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교회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화해서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해 버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차이를 차별로, 그 차별을 본질적으로 만드는 태도에 '신앙'이라는 말이 덧붙는 순간, 차별은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구분점을 화해할 수 없는 대립점으로 착각하는 태도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경험할 때 신앙이 훨씬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말씨로 너와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을 통해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던 일은 구약성서 이야기에도 전례가 있다(삿 12:1-7). 입다가 북쪽의 에브라임 사람들을 골라 죽이려 할 때의 일이다. "'쉽볼렛'이라고 말해보라고 하고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그 요르단강 나루턱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4만 2000명이나 되었다"(삿 12:6, 공동번역). 관동대지진 때 일본에서도 조선인을 골라내기 위해 '말씨'를 동원했다고 하니, '말씨'의 구분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데 말씨를 통해 맘씨까지 예단하고 규정하려고 할 때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신앙을 가질수록 경계해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다름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그', 혹은 우리와 다른 '그들'이 있다고 하자. 나와 그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그 극대화를 본질화하고, 본질화한 것을 토대로 차별하는 것을 '타자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차이에는 지역, 학력, 재력, 종교, 성, 인종, 계층, 신분 등이 있을 수 있다. 정치적 견해,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에 관한 의견도 그러한 타자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수는 동시대 유대인이 비유대인을 타자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남성이 여성을 그렇게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신앙'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여러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하기 매우 쉽다. 이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2장 '언어와 지리', 말씨와 맘씨, 71~72쪽)
3장 '성서와 로마의 통치 체제'는 탄핵 정국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다. 혼란한 시국에서 교계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양비론적 발언이나 "기독교 대안 학교를 통해 한국을 아시아 최초로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나오고 있는 것을 두고, 김 교수는 배타성과 배타주의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또한 12·3 비상계엄이 잘못된 것은 명백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이타적이거나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친구나 가족은 ''스스로를 돌보아라", 곧 '이기성을 취하라'라고 하지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기성과 이기주의가 다른 것처럼 배타성과 배타주의는 다르죠. 어느 종교나 배타성은 있어요. 그러나 자신의 배타성만 주장하면 배타주의가 됩니다.
한 시민으로서 계엄은 굉장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엄을 선포할 상황도 아니었고 계엄이 옳다는 주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시 사변에 준하는 사태가 없었는데도 군대를 동원하고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려고 했던 사태이기에 계엄이 잘못된 것은 명백합니다.
사태와 현상에 대한 본질을 알기 위해 나의 편견과 선입관을 일시 중지하는 판단 중지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봐요. 편견과 선입관으로 잘못 보지 않도록 말이죠. 그러나 그 현상이 뭘 의미하는지 잘 새겨봐야죠. 판단을 중지했는데 어떤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진화론·공산주의·동성애를 가장 반대하는 종교가 무엇일 것 같나요. 바로 이슬람입니다. 기독교 대안 학교는 자기 교회의 미래 교인 충원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고 예수가 원하는 것이 진정 기독교 국가인지도 되묻고 싶네요."
신약을 공부한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 교양'을 가르치고 있다. 김 교수는 '교양을 갖춘 기독교인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빨리빨리 읽을 수 있지만 일부러 천천히 읽는다"고 한 독자의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 책은 '여러분, 성경을 왜 그렇게 대충 읽으세요? 그건 좋지 않아요'가 아니라 '우리 천천히 또박또박, 성서 본문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읽읍시다'라는 제안이에요. '믿을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사람, 그리고 성경이 진짜 무슨 말을 하는지를 흘려버리는 사람들에게, 같이 앉아서 차분히 텍스트 한 자 한 자 곰곰이 새겨 보자는 권유죠.
성서의 텍스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꼼꼼하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는 작업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는 행동이 우선되기보다 성서를 읽으며 가만히 침잠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대적으로도 유효하지 않을까 싶어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꾸준히 공부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삶을 잘 돌보고 이웃을 존중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곳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양을 갖춘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베드로후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의 말을 살아내는 통로로 이 책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