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주일, 윌 토드의 '이곳에서 In this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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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글을 끝으로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 시즌 1, 2를 종료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5월 19일, 성령강림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
| 다 같이 한곳에 모여 |
유다를 잃고 맛디아를 얻은 제자 공동체는 조율이 잘된 악기처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조율을 마친 악기는 연주자의 손에 들리기만을 기다리죠. 악기는 주변의 온도와 습도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자신의 몸을 공간에 울릴 준비를 합니다. 악기 자신의 몸의 부피는 공간 안에서 자신보다 더욱 더 충만히 부풀어질 수 있죠.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켜 퍼져 나가는 파동이고, 악기는 아름다운 파동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근원의 물체. 그래서 잘 조율된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꿈꾸며 혹은 예지하며, 그 모든 가능성을 담지한 채 기다립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침묵을 유지하면서요. 제자들도 그러합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의 시간(행 1:21)을 보낸 제자들 중에 맛디아도 있었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열둘이 되어 오순절의 '때'를 맞이하여 '다 같이 한곳'에 모입니다.
악기는 자기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없지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를 울릴 미래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호소하고 있고, 무한한 신비를 향해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있을 뿐이죠. 부활 이후 지난 50일의 시간 동안 제자들은 부활의 몸을 입은 예수를 곳곳에서 마주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일상의 공간에서, 안개가 자욱한 길 위에서, 숨을 수밖에 없었던 갇힌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은 제자들에게 '찾아온 시간'이었고, 부활한 예수의 출현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기 전, '먼저 다가온 시간'과 닮아 있었습니다. 사건은 뜻보다 늘 앞서지요. 지금은 알 수 없으나, 나중에 알게 될 것의 시간차는 인생에 늘 등장하니까요.
오순절 명절로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국제도시의 명성만큼 북적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한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서로 언어도, 의복도, 문화도 다르지만 모세의 율법을 따르고,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이었지요. 천하 각국 사방에서 한곳으로 사람들은 모여들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가운데에 다 같이 한곳에 다시 모입니다. 율법에 따라 사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으레 머무는 곳, 제자들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공간.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사도행전은 '홀연히'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홀연히.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1)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행 2:2). 제자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한 소리는 일상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소리였을 겁니다. 소리의 근원을 찾고 싶어 그들은 시각을 마구 동원했겠지요. 저마다 고개를 돌리며 소리의 출처를 찾는 동안 그들이 보는 것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는 모습입니다. 바람의 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고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의 형상은 소리의 결과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소리의 근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곧이어 마음에 거룩한 영이 가득 들어차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면 제자들 가운데에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라'(요 16:13)는 말씀이 떠오른 이들도 있었을까요. 거룩한 영은 그들을 마음의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오십니다. 빗장 같은 칠흑같이 어두운 곳의 가장 내밀한 곳을 만지시고 영혼의 깊숙한 곳으로 자리하시지요. 그리고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이제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로 옮겨 갑니다. 거룩한 영은 그들을 말하게 하시고, 그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누가는 기록하지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낯선 언어들은 마음속에 뜻으로 자리 잡고 있던 원형으로부터 소리를 입어 입 바깥으로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를 막을 길이 없는 '듣는' 제자들은 홀연히 나오는 급하고 생경한 소리들의 향연을 다시 한번 귀로 듣게 됩니다.
연주자의 손에 들려진 악기의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저 몸을 맡겨 소리가 안에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자신의 몸을 최대한 자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지요. 단지 자신의 몸이 소리를 통과하는 것을 느낄 뿐, 어떤 의지나 고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잘 조율된, 잘 준비된 악기일수록 연주자의 의도와 의지에 온 존재를 기대어 있는 것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최상의 미덕이지요. 때로는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소리들이 들리는 생경한 경험이 악기에게 문득 찾아오기도 합니다.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색깔과 질감이 몸을 통과하여 지나갈 때 악기는 더욱 공고해집니다. 신비한 사건은 오직 우연처럼 찾아온 것이고, 그저 시작과 끝은 연주하는 이에게 달려 있음을 말입니다.
|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
거룩한 영은 제자들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 임하셨고, 제자들은 말하게 하시는 이에게 이끌려 오직 새로움을 입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이곳에서,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고백하지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행 2:11)
연주자의 손에 들린 조율된 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사람들은 듣습니다. 어떤 이들은 소리의 근원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도 하지요(행 2:13).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마음의 내밀한 곳을 통행하는 어떤 빛줄기를 경험합니다. 악기와 연주자의 상호 간에 흐르는 빛줄기가 타자인 자신에게도 흘러 홀연히 음악의 진실한 이야기를 깨닫게 해 주지요. 성령강림 주일을 지난 이번 주의 경건한 청음은 영국 작곡가 윌 토드(Will Todd, 1970~)의 2014년 앨범 'Lux Et Veritas-Music for Peace and Reflection'에 수록된 무반주 합창곡 '이곳에서 In this place'입니다. 거룩한 영이 임재하여 그의 영이 이끄는 곳은 현재성을 띠고 있습니다. 홀연한 때에 이 공간에서, 화자는 새로워지고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고백하며 곡은 시작합니다. 내 발이 딛고 있는 이곳에서 큰 꿈이 주어지고 그로 인해 영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지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다움을 얻어, 새로움을 입어 진실한 존재로 변화되었다고 고백하지요. 다 같이 한곳에 모여 홀연한 바람의 소리를 듣고,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 거룩한 영에게 들린 '악기' 같은 그날 그곳에서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이곳에서' 그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영원에 잇대는 삶을 꿈꾸어 보고 싶습니다. 5월의 한복판 거룩한 영의 이끄심으로 우리 자신으로 아름답게 존재할 새창조를 기대하며, 윌 토드의 '이곳에서 In this place'를 테네브래 콰이어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멀리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과, 제자들과 함께 들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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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is Place -Will Todd(2014) In this place I have been made new; 이곳에서 나는 새롭게 되었답니다 In this place I am light, 이 공간에서 나는 빛으로 있습니다 In Your love, starting and ending; 당신의 사랑 안에서, 시작과 끝에서; I will fly with angels to this place 나는 천사들과 함께 이곳으로 날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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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표준국어대사전, 유의어로는 갑자기, 급작스레, 돌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