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과학자 창조신학 연속 기고] ⑥ 이상목 교수(평택대)

'창조과학을 비판하고 유신진화론을 옹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서울신학대학교(황덕형 총장)가 박영식 교수를 중징계하려 하고 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과학과 신학 간 대화를 추구하고 건강한 창조 신앙 정립을 위해 고민해 온 학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신학교가 소속 교수를 탄압하고, 학문의자유를 침해하며, 양심에 어긋나는 진술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박영식 교수 징계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 있는 과학자·신학자들은 이 사건이 얼마나 부당한지와 한국교회 전반에 '창조'에 관한 오해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알리기로 했다. 학자들은 다시는 박영식 교수 징계 회부와 같은 사상 검증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뉴스앤조이>에 '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주제로 연속 기고를 싣는다. 다양한 관점에서 창조를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재는 5월 10일부터 6월 초까지 주 2~3회 발행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신약은 구약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인용한다. 이들 인용은 창조에 관한 구약의 기록을 직접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신약은 구약의 창조를 단순히 언급하기도 하고 윤리적 권고나 신학적 담론을 위한 전제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유대교 안에서 태동한 예수 운동의 태생적인 특징을 반영한다.

신약이 보여 주는 유대교의 영향은 구약을 경전으로 삼는 것에서 출발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야훼를 창조자로 고백하는 유대교 신앙의 근거가 된다. 신약은 그러한 고백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창조자로 이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구원의 길을 여신 분이라 믿었다. 구약의 창조자 하나님은 신약에서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자 하나님으로 새롭게 고백되었다.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신약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통해 가능하였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로 이어졌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특히,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의 부활 현현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아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신학으로 이어졌다. 신약은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뿐만 아니라 창조에 동참하는 존재로 고백하였다.

신약은 구약의 지혜 전통을 계승하여 예수를 창조자로 고백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잠언 8장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구약의 신학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지혜를 창조하였고(잠 8:22), 하나님의 지혜는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곁에 "창조자"로 함께했다(잠 8:30; 개역개정)1).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인화된 존재로 묘사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보조 창조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창조자 지혜에 관한 전통은 제2 성전기 유대교와 초기 교회로 이어졌다. 우선, 제2 성전기 유대교를 살펴보면, '솔로몬의 지혜'(또는 지혜서)는2) 하나님의 지혜를 "만물의 능동적 원인"(8:5) 그리고 "만물의 창조자"(7:22; 8:6)라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 시에 그와 함께했으며(9:9)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에 편만하다고 전한다(7:24). 천지 만물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과 구별된 존재로 이해되어 창조의 행위자로 기록된다.

유대교 지혜 전통은 초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는 교회는 그의 신성을 창조자의 신성으로 이해하였다. 가령,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면서 그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고백한다(골 1:15). 또, 나아가 "만물이 다 그로(그리스도 예수는)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한다(골 1:16). 골로새서는 예수의 신성을 만물의 창조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한 초기 교회의 신학을 보여 준다.

골로새서가 보여 주는 창조자 기독론은 요한복음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는 예수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했던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며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존재라고 설명한다(요 1:1-2)3). 만물은 로고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 1:3). 예수는 이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 세상에 온 자이다. 그는 창세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을 버리고 인간 가운데 왔다(요 17:5). 요한복음은 예수의 십자가를 그가 영화롭게 되는 사건으로, 그의 부활과 승천을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으로부터 이어진 창조신학은 예수의 기원과 지상 활동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신학적 틀을 요한복음에 제공하였다.

히브리서는 창조자 예수 기독론을 위의 문헌들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히브리서 1장 2절은 하나님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1장 10절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창조자로 밝힌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순으로 지으신 바라"(시 102:25). 인용된 시편은 야훼가 천지를 창조했다고 고백한다. 반면, 히브리서는 "주"를 야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땅과 하늘을 지었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한 창조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한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편과 히브리서 모두 "주가 손으로" 하늘을 지었다고 고백한 점이다. 물론, 손으로 지었음은 시편의 표현이고 히브리서는 그것을 인용한 것이지만, 히브리서도 시편의 고백에 동의하여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전한다. 인간 창조에 있어서는 '인간이 있으라'와 같은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명시하지 않지만, 다른 피조물의 창조를 주목하면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기록하여 하나님의 손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시편과 히브리서는 창세기와는 다르게 하늘의 창조를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으로 고백한다. 시편과 히브리서는 모두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상술한 세 신약 문헌의 예수 이해는 구약과 제2 성전 유대교의 창조신학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한 예이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는 초기 교회의 기독론적 관심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유대교 지혜 전통의 시각에서 해석하도록 하였다. 예수는 창세 이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로고스(또는 지혜)로서 신성을 가진 창조의 행위자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기독론적 창조 이해는 유대교 지혜 전통이 보여 주는 창세 이전에 관한 신학적 질문과 창조의 동인과 과정, 그 행위자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자양분 삼아 예수의 기원과 역할에 관한 이해를 발전시킨 초기 교회의 신학이다. 여기서 창세기 창조 기사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창세기 1장이 기록하는 창조의 순서, 하루의 시간적 길이 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신약에서 창세기의 내용이 직접 인용되는 예도 있다. 베드로후서는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벧후 3:4)를 언급하면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한다. 곧, 땅은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이라 설명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 9-10절을 떠올리게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후서가 땅의 창조에 뒤이어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기록한는 점이다. 이는 창세기가 기록한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암시한다. 베드로후서는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전제로 삼아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권고한다(벧후 3:9-10). 과거엔 물의 심판이 있었으나 미래에는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하늘과 땅은 심판과 멸망의 때에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되는 것이다(벧후 3:7). 종말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베드로후서는 창세기의 창조와 대홍수 이야기를 과거의 사건으로 전제한다. 이것만 주목하면 베드로후서는 창세기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한 이해는 창조의 각 날(日)을 24시간의 하루라고 보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후서는 창세기를 인용한 다음에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한다(벧후 3:8). 이는 시편 90편 4절4)을 인용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전혀 다름을 지적한다. 신자들은 자기 시간 개념이나 시간 계산으로 하나님의 때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창조가 6일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각 날이 인간의 하루와 같다는 해석은 베드로후서의 창조 이해와는 다를 것이다. 애초에 그러한 해석은 베드로후서의 관심이 아니다.

신약은 윤리적 권고를 위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여러 예를 보여 준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의 윤리적 교훈을 들 수 있다. 예수를 찾아온 바리새인들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라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는 모세가 이혼에 관해 명령한 바를 질문자들에게 되묻는데, 그들은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는 것으로 모세가 허락했다고 답한다(막 10:1-4; 마 19:3, 7 참고). 그들의 답변을 들은 예수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혼은 옳지 않다고 밝힌다.

예수는 이혼 금지의 이유로 하나님의 아담과 하와 창조와 그들에게 준 명령을 든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으며 남녀의 결혼은 부모를 떠나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막 10:6-8; 마 19:4-5; 창 2:24 참고). 부부가 된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며 사람이 그들을 나누지 못한다(막 10:9; 막 19:6). 예수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윤리적으로 해석하여 이혼에 관한 실천적 교훈을 끌어낸다.

하나님의 창조는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도 발견된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며 이삭을 자르는 제자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선생인 예수를 힐난한다(막 2:23-24).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힐난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면서 다윗이 진설병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사건을 언급한다(막 2:25-26).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일갈한다(막 2:27). 안식일 준수는 십계명에 규정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안식한 날을 안식일로 지키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여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옭맬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예수와 구원에 관한 바울의 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아담 기독론이라고 널리 알려진 바울의 신학은 예수와 아담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여 예수로 인한 부활과 생명을 설명한다. 아담의 죄를 통해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듯이 새로운 아담인 예수의 부활로 인해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고전 15:21-22), 예수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를 것이다(롬 5:17-21). 창세기의 아담 창조와 이후 실낙원 이야기는 바울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을 이해하는 신학적 관점을 제공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고 기독론과 구원론을 위한 신학적 기초로 삼는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피조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을 말한다. 그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은 있으며 부활한 몸은 죽기 이전의 육체와는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피조물의 다양한 육체와 형체 그리고 영광을 예로 든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각의 육체, 형체, 영광을 가진다. 곧, 만물의 몸은 다양하게 서로 다른 것처럼 부활 이후의 몸도 이전의 몸과 다르다(고전 15:35-49).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부활한 몸은 더는 흙에 속하지 않으며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지상에 있는 피조물의 육체와 하늘에 있는 해, 달, 별들이 다른 것과 같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면서 종말에 있을 부활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활용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약의 여러 문헌은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고 그것을 전제로 새로운 신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신약에 흐르는 신학적 기초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위의 신약 본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창세기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초기 교회는 예수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윤리적 쟁점에 답하기 위해 또는 구원과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를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였다. 신약이 보여 주는 창조 이해는 이러한 신학적 창의성을 통해 새로운 세대와 관련을 맺었고 하나님의 창조를 다양한 맥락 속에서 고백하였다. 창세기 특정 본문의 문자적 해석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지 않았다.

이상목 /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연속 기고 목록                                                          

1.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누가 부정했는가 (손호현)
2. 마르틴 루터의 창조 이해 (이용주)
3. 진화론과 기독교 (정대경)
4. 존 웨슬리의 자연과학 이해와 창조신학 (박창훈)
5. 자연의 신학: 종교(신학)와 과학의 대화 방법 (이성호)
6. 신약의 창조 이해 (이상목)
7. 시작과 에너지 (박일준)
8. 창조, 과연 증명이 필요한가 해석이 필요한가 (신용식)
9. 과학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장재호)
10. 방법론적 자연주의 (김정형)
11. 과학에게 창조과학이란 무엇인가 (신익상)

 

주)

1) 새번역은 "창조의 명공," 공동번역은 "조수"로 번역한다. 영문 성경의 경우, NRSV는 "a master worker"로, NASB는 "a master workman"로 옮긴다. 이러한 번역은 주요 영문 번역에서 대동소이하다. 
2) 본 글은 NRSV의 Wisdom of Solomon을 인용한다. 
3) 서중석, <요한복음 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28-30 참고.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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