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⑨]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전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김희원 장로
| <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여성 안수제 도입을 위한 투쟁에는 여성 교역자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장로교단에서 1930년대 여성 장로를 세워 달라는 요구로 시작된 여성 안수 운동은 평신도·교역자·신학자 등 다양한 교단 구성원의 연대 속에서 이뤄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은 1959년 예장합동과 분열한 후 본격적으로 여성 안수 투쟁을 벌였다. 그 핵심에는 여성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여전도회)가 있었다. 이들은 물심양면으로 남성 총대들을 설득했고, 그 토양 위에서 젊은 여성 교역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희원 장로(84)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여전도회 회장을 맡았다. 1977년 여전도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사무처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와의 인터뷰는 수차례 거절과 설득 끝에 성사됐다. 약속을 잡고 만난 장소에서도 그는 "다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우리 교단에는 더 대단한 어른이 많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김 장로는 이야기보따리를 한껏 풀어내며 수십 년 전 일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장신대 교수들과 <교역과 여성 안수>라는 책자를 만들어 총대들의 가방에 하나씩 넣었다", "1300여 명이 투표해서 칠백몇 대 육백몇 표로 통과됐으니까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며 구체적인 이름과 수치를 열거할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현재 예장통합에는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연로하거나 작고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 장로는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도회관 내 역사전시관 한쪽 벽에 전시된 역대 여전도회장들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나는 '피라미'로 있으면서 어르신들이 '이거 하자' 그러면 밑에서 따라 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여성 안수 투쟁에 헌신한 그의 생애는 한국교회 모두가 기억하고 존중해야 할 역사였다.
| '바지 입은 분들'뿐인 총회서 마이크 잡다 |
사람들이 헷갈려 하더라고요.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된 건 33년 만이 아닙니다. 61년 만이지요. 1933년에 함남노회 최영혜 여전도회장이 처음 여장로제를 헌의했으니까요. 61년 전부터 건의했는데 안 된 거잖아요. 하도 안 되니까, 하루는 제가 교단에 직접 물어봤어요.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쓰여 있느냐고요. 교단에서 자료를 찾아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통일 될 때까지 여성 안수는 보류한다'고 했다고. 여성 안수가 통과된 후 이제 통일도 금방 될 것 같다며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전까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도 없이 차별당했지요. 전부 남자 위주로 교회·교단을 이끌어 갔으니까요. 여성들은 회의에도 못 들어가고, 결정권도 없고,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까 내용도 모르고 답답했어요. 제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교단에는 여성이 더 많은데 왜 '바지 입으신 분들'만 저렇게 임원이 되느냐"는 거였어요. 당시 저는 남자분들을 '바지 입으신 분들'이라고 표현했거든요.
저는 교회에서 부서장을 정할 때도 처음부터 목사님께 말씀드리는 사람이었는데요. "봉사부장은 안 하겠다", "부엌에서 앞치마 입고 일하는 건 싫다"고요. 그동안 봉사부장은 주로 여자한테 시켰거든요. 저한테도 그걸 시킬까 봐 아예 먼저 하기 싫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저한테 음악부장을 맡기시더라고요. 제가 성가대 가운을 다 지어서 입혔다니까요.(웃음)
교회 여전도회 임원을 하다가 1977년부터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니까 만 38살부터 지금까지 쭉 여전도회 회원으로 있는 거예요. 1989년부터 1991년까지는 회장을 맡았고요. 장로 안수를 받기 전까지 여성들은 공식적으로 총회 석상에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 여성 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죠. 여전도회 차원에서 여성 안수 관련 책자를 만든다거나, 노회를 다 찾아다니면서 여성 안수의 당위성을 직접 말씀드리고 그랬어요.
그때 전국에 안 간 노회가 없을 거예요. 회장 임기를 마쳤을 때인데, 다음 회장이 된 김옥인 장로랑 같이 노회에 인사하러 다녔죠. "여성 안수가 꼭 필요하다", "총회 투표에서 꼭 찬성을 찍어 달라"고 이야기하면, 남성 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은 다 "좋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작 투표할 때는 찬성을 안 찍더라고요. 부결된 거 보면 안 찍은 거죠. 오죽하면 선배들이 "바지 입은 분들은 믿지 말라"는 말을 했을까요.
여성 안수 운동을 하다 보니까 "여자들이 설치면 안 된다", "여자들은 잠잠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남성분들은 성경 구절을 꺼내면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셨어요. 여성들은 총회에 간다고 해도 발언권이 없다 보니 아무 대꾸도 못 했지요. 총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여성은 여전도회장이 유일했어요. 제가 여전도회장일 때 한번은 총회에서 여성 안수 투표가 끝나고 마이크를 잡은 적도 있었어요. 분명 가결된 분위기인데, 사회자가 몇 표 차이로 부결됐다고 말하는 거예요. 정말 화딱지가 났어요. 그때 손을 들고 나가서 "투표용지 보전 신청을 해 달라"고 발언했어요. 욕 직사하게 먹었지요.(웃음) "어디 여자가 보전 신청을 내냐"고요. 근데 여성분들은 그걸 보고 잘했다고 손뼉 치고 그랬어요.
제가 여성 안수 역사를 공부해 보니, 총회에서 투표만 14번을 했더라고요. 부결됐을 때는 막 울고 그랬어요. 속상하니까요. 더 서러운 건 여전도회 회원들은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울어야 했다는 거예요. 보는 데서 울면 "여자들이 또 운다"고 야단치니까. 그래도 금세 "우리 또 하자"며 일어서고 그랬어요. 다시 노회를 찾아다니면서 인사하고, 장신대 교수들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면서 같이 회의도 많이 했지요. 고맙게도 장신대 교수들이 우리 편을 많이 들어 줬어요.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 '어떻게 하라'고 조언해 주셨지요.
1992년에는 장신대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교역과 여성 안수>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어요. 총대들 가방에 그 책을 전부 넣어 드린 적도 있어요. 총대들에게 점심을 대접한 적도 많아요. 총회 때마다 선물을 돌리기도 했고요. 우리가요, 이 모든 걸 사비로 했어요. 공금으로 한 게 아니에요. 그때 저도 돈 많이 썼어요.(웃음) 1000명이 넘는 총대들한테 선물로 수저 세트를 돌렸는데 그것도 좋은 걸로, 은으로 된 걸로 줬거든요. 내키지는 않지만, 여성 안수 도입을 간절히 원하니까 그렇게 했던 거예요.
여전도회 후배나 동료들이 애를 정말 많이 썼지요. 나중에는 여교역자들 도움도 받고, 여성 신학생들과 더불어서 일하고 그랬는데요. 여성 안수는 그런 합작의 결과이지만, 처음에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수고를 참 많이 했어요. 그렇게 최선을 다하신 분들이 이제 대부분 작고하시고 얼마 남지 않았네요.
| 교단 첫 여성 총회 임원이 되다 |
여성 안수가 통과되던 날 제가 총회 석상에 있었거든요. 거수로 투표를 진행하는데, 총회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님께서 "찬성하시는 분은 (머리 위로 두 팔을 크게 벌려 원을 만들면서) 동그라미를 이렇게 하고, 반대하시는 분은 (손가락으로 작게 엑스 자를 하면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여성 안수 찬성을 암시하는 제스처였지요. 그 모습에 사람들이 막 웃고 손뼉도 쳤어요. 총회장까지 여성 안수 도입에 협력하는 상황이 온 거였죠.
너무 좋아도 눈물이 나잖아요. 여성 안수가 통과됐을 때, 2층 방청석에 모여 있던 여전도회원들은 울고, 손뼉 치고, 할렐루야 부르고, 아주 그냥 난리가 났지요. 평소에는 힘이 쭉 빠져서 내려오고는 했는데, 그날은 손 흔들면서 나오고 그랬어요. 이후에 우리끼리 잔치도 열고 감사 예배도 드렸지요.
"교단에는 여성이 더 많은데 왜 '바지 입으신 분들'만 저렇게 임원이 되느냐"라는 제 말이 하늘에 닿았는지, 나중에는 제가 교단에서 첫 번째 여성 총회 임원이 됐어요. 89회·90회·91회기 3년 동안 총회 부회록서기를 했지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총회 임원이 된 거였으니까 최선을 다했어요. 첫해에는 총회 임원석에 여성이 있는 게 낯서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저를 막 훑어보더라고요. 이상한 사람이 와서 앉아 있는 줄 알고. 그래서 제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얼굴 보러 왔다"고 그래요. 제가 무슨 괴물처럼 생겼나 했어요.(웃음) 그만큼 여성이 총회 임원이 된 게 이상했던 거지요.
여성 안수 통과되고는 그래도 여성 임원이 조금씩 나왔는데, 올해 총회 임원회에 여성이 없어요. 우리 교단에 여성이 130만 명이거든요. 전체 교인의 절반 되는 숫자예요. 그럼 여성 임원이 한두 사람이라도 꼭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여전도회가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고 있지만, 아직도 "이 자리는 목사 자린데 왜 여장로에게 주느냐"고 말하는 남자 목사님들이 있어요. "여장로는 부회록서기가 아니라 부회계자리를 줘야 한다"고 하는 분도 계신데,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들도 얼마든지 역할을 잘할 수 있거든요. 우리 여전도회에도 조직을 체계적으로 잘 이끌어서 능력을 인정받고, 회의법에 정통한 사람이 참 많은데, 여자들이 인정받는 게 남자들한테는 보기 안 좋은가 봐요.
전 여성 할당제는 반대해요. 왜냐면 할당제가 정한 숫자 이상으로 여성을 세울 수 없잖아요. 규정에 발이 묶이는 거지요. 물론 여성 총대는 지금보다 훨씬 늘어야 해요. 총회를 하면 보통 여성 총대는 전체 총대 1500명 중 30명 안팎이에요. 나머지는 다 남자인 거예요. 이건 도저히 균형도 안 맞고, 하나님 뜻도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여성 안수가 법제화하고 3년 만에 장로 안수를 받았어요. 우리 교회가 규모가 큰데도, 그때까지 여성 장로가 안 세워졌어요. 1998년에 우리 교회에서 1500명이 장로 임직 투표에 참여했어요. 그때 장로가 된 사람 중 여자는 제가 유일했고요. 처음에는 그렇게 여성 장로를 잘 안 세우다가,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우리 교회는 여성 장로가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니까 나중에는 여성 장로 6명이 한꺼번에 안수받기도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 장로에 대한 시선이 좋아서 여성 장로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지 여성 장로가 적게 나와요. 보통 한 교회에 남성 장로가 20여 명 있다고 치면, 여성 장로는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죠. 여성들 얘기를 들어 보면, 먼저 자기 남편을 장로로 세우고, 다음에는 아들을 세워야 한대요. 그러니까 장로 될 만한 여성이 있어도, 여성들이 좀 나중에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남성 목사님들은 여자가 여자를 안 찍는다고도 얘기하고. 사실 그런 면도 있지요. 근데 어느 교회에서는 남편이 장로면 아내는 장로를 할 수 없다는 법을 정했대요. 제가 "그런 법은 우리 교단에 없다. 듣지 말라"고 했어요.
과거에 비해 여성 장로 숫자가 자꾸 줄어드는 현상을 어떻게 개선하느냐가 요즘 가장 큰 고민이에요. 여성 장로를 세우는 건 여성의 지위 향상뿐만 아니라 교회를 성평등한 관점에서 올바르게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교회 민주화 운동을 한다면서 조직에 남자분들만 속해 있는 게 과연 민주화일까요. 민주화는 여성과 남성이 공히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가 여성 장로를 많이 세워서 남녀 장로 숫자를 동등하게 해야 해요. 교회가 발전하려면 여성의 소리가 많이 들어가야 하고, 남녀가 함께 일해야 해요.
| 끈질기게 싸우는 여성이 이긴다 |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은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면에서는 고루한 거죠. 이제는 시대가 달라진 만큼 생각을 바꿔야 해요. 지금은 21세기잖아요. 시각을 바꾸셔야지. 그런 점에서 남자들의 머리·생각을 바꾸는 일이 중요해요. 여성 안수에 찬성하는 교수·목사분들이 여성들에게 설명할 게 아니라 남자들한테 가서 설교를 많이 해야 해요. 그렇게 그분들 생각을 바꿔야지, 여성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더라고요. 그쪽 신학교에 필수과목으로 '여전도회학'을 집어넣으라고 해 봐요. 남성 목회자 후보생들을 대상으로 그런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여러 방면의 협력도 필수적이에요. 우리 교단만 봐도 여성 평신도들과 교역자들이 협력했고, 신학 교수들이 글을 쓰면 여전도회 회원들이 그걸 책으로 묶어 총대들에게 전달했다니까요. 감리회 등 다른 교단에 계시던 분들이나 미국장로교회(PCUSA), 아시아교회여성연합회(ACWC) 등도 우리 교단 여성 안수 통과를 위해 음성적으로 참 많이 도와줬어요. 기도해 주고, 직접 총대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설득해 주기도 하고. 그런 많은 일을 함께 협력해서 했지요.
안 돼도 계속했거든요. 결국에는 끈질긴 사람이 이기니까요. 그러니까 여성 안수는 전적으로 여성들이 만들어 낸 거예요. '이건 절대로 아니다', '끝까지 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숨어서 일하고, 이름도 알리지 않고 열심히 싸운 선배들이 있었지요. 여성 안수를 위해 일구월심日久月深 기도하는 후배들도 있었고요.
여성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들도 곧 있으면 도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단은 여성 안수를 도입한 지 27년이 지났지만, 사실 더 오래된 곳도 많잖아요. 그분들은 우리한테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암암리에 다 받았어요. 남자분들이 '기장이나 감리회도 여성 목사·장로가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느냐'고 인식하게 됐기 때문에 결국 통과된 거지요. 그런 이유로 여전도회가 지금까지도 교단이 해 달라는 거 다 하면서 소리 없이 일하고 있는 거예요. 먼저 여성 안수를 도입한 교단에서 여성인 우리들이 일 잘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 보니까 잘하더라'고 말하면서, 다른 교단도 마침내 여성 안수를 통과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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