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2회 여성 안수자 이수경 목사
| <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여성 안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교단 및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이수경 목사(67·새사랑교회)는 여성 안수에 마음을 크게 두고 제도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교단 내 성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투쟁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목회를 하라고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따라가다 보니 목사 안수를 주셨다"는 신앙고백이 있을 뿐이다.
기성은 2004년 여성 안수제를 도입했다. 2001년부터 새사랑교회를 개척해 담임전도사로 사역하던 이수경 목사는 200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해 여성 목회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방회에서 소외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본질에 집중하며 묵묵히 목회하다 보니 교단에서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목사는 기성 교단 목회자를 양성하는 서울중앙신학원 영성신학 교수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제도 변화를 외치기보다 "예수를 닮아 가자"는 이수경 목사의 말은 보수적이고 일면 고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다 보면 그 말이 마냥 신기루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목사는 자기 생각에만 갇히지 않았다. 저마다의 이유로 좀 더 투쟁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했고, 그들과 연대하며 교단의 여성 안수제를 이끌어 냈다.
| '여자가 무슨 목회를' 하던 시절 |
제가 늦은 나이에 주님을 만났어요. 서른에 예수님을 만났는데요. 제가 다니는 직장에 독실한 장로님이 계셨어요. 그 장로님이 예수를 안 믿으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대요. 되게 치사하더라고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은혜가 넘치는 일이지만요. 그래서 "교회 가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그 옆에 있는 교회 목사님한테 전화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5분 만에 오셔서 저를 교인으로 등록해 가셨죠. 그 교회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이었어요. 그때부터 기성 교단 성도가 됐죠. 저를 전도해 주신 분이 김윤환 장로님이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나안농군학교 땅을 기증하신 분이셨어요.
그렇게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당시 기성 교단에는 담임목사님이 그만두면 부목사님도 같이 사임하는 게 법이었어요. 저를 가르쳐 주신 부목사님이 참 귀하신 분이었는데 그 교회에서 나가게 되신 거예요. 그분이 서울 상계동에 교회를 개척하셔서 저도 거기로 교회를 옮기게 됐죠. 그 목사님이 제 삶의 자리를 모두 아시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 저에게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러면서 "교단 안에 중앙신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를 나오면 노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중앙신학교에 가게 됐죠.
그때가 1996년, 제 나이 마흔이었어요. 서른에 예수 믿고 10년을 단련받은 후 마흔에 부르심을 입은 거죠. 주님의 이끄심이었어요. 그때는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1%도 없었고요. 신학교에 가면 전도사가 된다는 흐름 정도만 이해하고 있었죠. 공부는 정말 재미있게 했어요. 제 나름대로 신앙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됐죠. 당시는 기독교 신앙이 기복 사상에 물들어서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하고 행복하다' 이런 것들을 많이 얘기했을 때잖아요. 근데 제 삶을 보면 너무 아닌 거예요. 예수를 믿는데도 힘들고 가난하고 실패하고 이런 과정들이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나는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아직도 죄 때문에 심판받고 있나?'라는 물음표가 항상 있었어요.
홀로 많이 돌아다녔어요.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중앙신학교 와서 요한 웨슬레(존 웨슬리)의 성결론을 만나게 됐어요. 그때 내가 겪는 이 고난이 칭의와 거듭남 그리고 성화, 영화의 자리까지 이끌어 가기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비로소 제 고통의 깊이를 다 풀어낼 수 있었죠.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셔서 영생을 주신 것도 감사한데, 주님을 따르는 길 위에 서게 해 주셨다는 것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이었어요. 그 은혜로 신학 공부를 했어요.
2001년 11월 15일 지금 이 새사랑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개척을 했고, 신대원에 가서 공부를 3년 더 해야 했죠. 목회하면서 배우기도 하니까 그에 따르는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목사'라는 목표를 향해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전달자로 만들기 위해서 공부를 통해 기회를 주신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전도사였지만 굉장히 행복한 목회를 했죠.
사실 당시 교단은 '여자 전도사가 무슨 교회를 개척하느냐'는 분위기였어요. 여성들이 목회한다고 하면 '은사 집회'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은사 집회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려는 목회 방향이 있었고, 예배와 성도 간 교제, 말씀, 기도를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은사는 성령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방향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2년 동안은 정식 교회가 아니라 '기도 처소'로 있을 수밖에 없었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차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을 때 박해를 받았잖아요. 제가 지방회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외당하는 걸 경험하고서는 '아, 나는 정말 예수를 따르는 복음 전도자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왜? 나는 하나님나라를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지금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게 증거라고 생각하면서 겸손히 복음을 전하며 기다렸죠.
전도사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못 주잖아요. 지방회 치리 목사님이 분기별로 오셔서 세례식을 했는데, 그때마다 새 가족이 많게는 10명, 적게는 5명 이렇게 계속 나오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죠. 그러니까 치리 목사님이 "여기가 진짜 교회다. 여기에 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수경 전도사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제는 창립 예배를 드려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춰 가도록 해야 한다"고 지방회에 말씀하신 거예요. 그래서 2003년부터 지방회에 소속된 정식 교회가 됐죠. 그렇게 인내한 결과로 새사랑교회가 탄생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요. 너무 감사한 일이었죠.
| 가시밭에 백합화가 되겠다고 |
목사 안수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개척하고 교회를 이루어 감에 있어서 불편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제가 새 가족들을 전도해서 양육하고 했는데, 정작 세례는 다른 사람이 줘야 하잖아요.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마음껏 축도도 못 하죠. 또 저는 성만찬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전도사는 성만찬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있어 세례와 성만찬과 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문수영 목사님과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당시는 전도사님이셨죠. 문수영 목사님의 아픔은 뭐였냐면, 서울 불광동에 기자촌이 있었어요. 그 일대에 성매매 여성들과 넝마주이들이 있었다고 해요. 목사님이 그분들을 전도해서 예배를 드리고는 했는데, 그분들이 예배당을 나가면 또 사고를 치는 거예요. 담임전도사로서 경찰서에 가서 "우리 성도입니다" 하고 데리고 나오려고 하면, '전도사'라는 말에 경찰들이 무시했다는 거예요. "목사도 아니고 웬 여자 전도사가 와서 떠들어" 이러면서. 그런 일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는 거죠.
제가 지방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문수영 목사님은 제가 여성 전도사라서 무시당한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저에게 "이제부터 우리가 여성 목사 안수를 위해 한번 기도하면서 열심을 내 보자" 제안하셨죠. 근데 저는 그런 관점은 아니었어요. 저는 이런 시간들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해서 '목사 안수를 안 받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다'라는 생각으로 돌입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교제잖아요. 저도 그랬지만 당시 여성 전도사님들이 목사 안수를 원하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어요. 한 여성 전도사님은 개척해서 목회를 크게 키웠는데, 남성 목사님들 중에는 그 모습을 좋게 보지 않는 분도 더러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여성 전도사님은 무시당할 수도 있었겠죠. 거기에서 오는 아픔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여성이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 무시한다"고. 그렇게 여성 선배님들을 만나게 되면서, 2002년부터 여성 안수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 시작됐어요.
'여성안수추진위원회'를 조직해서 먼저 일하신 분들도 계셨는데, 저는 그냥 삼삼오오로 참여했어요. 그래도 여성 교역자들은 서로의 노력을 알고 있었죠. 특히 문수영 목사님과 김숙하 전도사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은 항상 같이 다녔어요. 제가 마티즈를 타고 다녔는데 거기에 항상 모시고 다녔죠. 어디서 교단 총회가 있다고 하면 그게 지방에 있는 교회라도 무조건 하루 전날 모시고 가요. 가면 우리 여성 교역자들이 어느 숙소를 잡아 놓죠. 거기 들어가서 "이번에도 우리가 애써서 해 보자. 으쌰으쌰, 파이팅!" 하고는 밥도 같이 먹고 밤에 기도도 했어요.
다음 날 아침 9시에 총회가 열리잖아요. 그럼 저희는 더 일찍 나가서 홍보했어요. 목사님들 모여 있는 곳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여성 목사 안수 꼭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꼭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문수영 목사님도 나도 차 들고 과일 들고 많이 다녔죠. 해 달라고 사정도 하고, 우리 입장도 얘기하고, 꼭 돼야 한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
목사님들이 첫해에는 그냥 냉소적으로 보셨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또 왔어?", "에이 그냥 전도사 해. 뭐 때문에 목사 안수 받으려고 해", "목사 안수 받으면 부교역자로도 못 가. 개척해야 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무슨 말씀이세요. 개척이 더 재밌어요" 이래 가면서 설득했어요. 한쪽에서는 "아휴, 목사 받지 말고 그냥 전도사를 하라니까" 그러고, 또 한쪽에서는 우리 여성 교역자들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따뜻하게 "그래, 이번에는 꼭 되게 해 보자"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총회에서는 몇 번 부결이 됐어요. 그때마다 우리 여성 교역자들은 "참 내가 어이가 없다", "아니 왜 안 주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런 말을 많이 했죠. 어떤 전도사님은 "우리 다 같이 떠나자. 교단 탈퇴하자. 소망이 없는 것 같다" 그러셨어요. 그래도 저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가시밭에 백합화가 되겠다고 노래 불렀어요.(웃음) 몇 명은 "떠나야 돼", 몇 명은 "안 떠날 거야" 이래 가면서 그 밤에 다시 모여 울고 기도하고…. 안 된 것에 대한 아픔, 그럼에도 잘될 거라는 기대, 서로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고는 했어요. 사귐이죠. 그런 코이노니아가 우리 안에 깊이 있었어요.
여성 안수가 통과된 2004년 총회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진행됐어요. 저희는 방청객으로 들어가서 위층에 앉아 있었죠. 저 아래에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땅땅땅)" 했을 때, 같이 앉아 있던 전도사님들이 일제히 쫙 일어나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얼싸안고 끌어안고…. 그때 성결교단 신문에 우리 사진이 나왔어요. 너무너무 감사했죠.
그동안 성결교단에 몸담고 있던 여자 전도사님들이 목사 안수가 안 돼서 많이 나가셨어요. 타 교단으로 얼마나 많이 뺏겼는지 몰라요. 귀하신 분 정말 많았는데. 너무 안쓰러웠어요. 목사가 돼야 목회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근데 이 교단 사정은 너무 요원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탈했던 거죠. 그분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어요. 그것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으니까요. 여성 안수 통과 이후 소감을 이야기할 때 아쉬움을 내비쳤던 기억이 나요. "진작 줬으면 우리 성결교단의 여성 목회자가 더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갔을 텐데 아쉬움이 많습니다"라고.
| 세례, 축도, 성만찬 |
이듬해 2005년에 그동안 목사 안수를 기다리던 선배 여전도사님들이 소급 적용돼서 시험을 치르고 안수를 받았어요. 저는 2006년 두 번째 여성 안수자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여성 전도사 8명이 정식으로 목사 고시를 치르고 통과해서 받은 거예요. 제가 속한 서울북지방회에서는 최초였고요.
목사 안수를 받고 나니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쁨이었는지요. 새 가족을 전도해서 양육하고 그리고 시간이 되어서 세례를 베풀 때는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내 안에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축도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니 너무 행복했어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이끄심에 맡기는 축도는 그 자체로 평안함이었습니다.
지금 예배당에 온 지가 10년인데 저희는 매주 성만찬을 했어요. 성경에 보니까 날마다 했더라고요. 성만찬이 주는 은혜가 굉장해요. 설교는 설교자가 전달하고 회중이 듣는 방식이지만, 성만찬은 모두 직접 참여하며 예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예식입니다. 성만찬 할 때면 꼬맹이 아이들이 쭉 줄 서서 나와요.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노래를 부르면 세 살 걸음마 하는 애들부터 열 살, 열한 살 아이들까지 쭉 와서 가슴에 손을 모으고 서 있어요. 그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쁜지요.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야' 이렇게 고백하면서 떡을 주죠. 그렇게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나와 성만찬에 임할 때 목사로서의 기쁨이 크게 일어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도 여성 사역자의 처우가 약한 건 사실이에요. 제가 성결교단 안에서 목회한 지 20년 차가 됐습니다. 초창기에는 여성 교역자를 좀 생경하게 보셨죠. '정말 목회를 할까?' 이렇게. 특히 우리나라에 깊이 뿌리내린 가부장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걸어가는 사역자인데도 여성 목회자를 그리 좋게 봐 주지 않더라고요. 주로 남성 목사님들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오신 분들도 여성 목회자를 좀 버거워하는 면이 있고, 뭔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여성 성도님들은 남성 목사님한테 선물 줄 때 넥타이나 와이셔츠를 주잖아요. 근데 여성 목회자한테는 뭐를 해 줘야 할지 잘 모르시더라고요. 저도 남성처럼 칼라 있는 와이셔츠를 한 벌 받아 봤어요. 기쁘게 받았어요.(웃음)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이렇게 가부장제가 깊게 뿌리내려 있으니 여성들은 교회 안팎에서 어려움이 많겠다는 거였어요.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은사 사역을 하는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낮은 마음으로 사역하는 여성 사역자의 처우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할 수가 있겠죠. 그게 사실이니까.
근데 천천히 바뀌고는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지방회에 소속한 지 20년이 되다 보니까, 다른 목사님들과 신뢰 관계가 생겼어요. 제가 그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는 부분들을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저에게 지방회 내 부장 자리를 주기도 하셨고, 감찰장 자리를 주기도 하셨어요. 충남지방회 같은 경우는 여성 지방회장까지도 나왔더라고요. 여성의 자리가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천천히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봐요.
| 예수를 깊이 닮아 가는 것 |
여성 안수 이후의 과제라…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데 조심스럽기도 하네요. 저는 여성 목사로서 남성 목사님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불편하기도 하고 갈등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긴장감이 흐를 수 밖에 없어요. 근데 저는 '이것을 해 보세요, 저것을 해 보세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어요. 제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지금까지 그냥 주님이 원하시는 데 가서 서 있었을 뿐이야. 그걸 보고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어요.
저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예수를 깊이 깊이 닮아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위가 향상돼서 높아지는 게 아니라, 지위를 다르게 주신다 할지라도 한결같이 주의종으로서 섬김의 영성으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어 가면서 우리의 빛을 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다름은 있잖아요. 서로 인정해 주면서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받아 줘야 하지 않을까. 사역지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그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충분히 모든 이에게 여성으로서의 주님 따르는 길을 잘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모습으로 나아 왔더니, 요즘은 남성 목사님들이 지방회 대의원도 남성과 여성 비율을 몇 대 몇으로 해서 파송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거죠. 제가 힘으로 뭔가 하려고 했다면,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서 계속 그런 얘기를 했다면 바뀌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더라고요. 제가 감찰장을 할 때 어느 교회를 치리할 일이 있었거든요. 남성 목사님들이 하지 못하는 얘기를 제가 하게 됐죠. 그랬을 때 목사님들이 자신들은 못 했는데 여성 목사님이 해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인정받는 일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여성 대의원 파송 얘기도 나오고 제도의 변형이 와야 한다 그래요. 우리 지방회가 둘로 나뉘었는데 그러면서 감찰장을 여성 2명, 남성 2명으로 세웠어요. 이런 식으로 제도도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 참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모든 것을 성실하게 해서 그 모습을 보는 분들이 생각을 달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일을 우리 여성들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의 영성은 성경 시대에도 그랬지만 상당히 깊어요. 말씀을 묵상하고 내 삶을 성찰하면서 살아간다면, 거기엔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힐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목사'가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전도사일 때든지 목사일 때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부르심을 따라 성실하게 화답하면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다 보면,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오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왜 이때에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실까 저도 질문을 한번 해 봤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지부터 지금까지 쭉 되짚어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성이나 남성이나 차별 없이 선택하신다', '선택하신 후 하나님은 그 선택에 맞는 기쁨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꼭 목사가 돼야지'라고 목표점을 세워 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목회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 '목사 안수'였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시대를 따라 움직이는데, 여성 목사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게 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아직도 여성 목사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교단에 계시는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다면, 이렇게 여성도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사 안수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부르심을 따라가는 여성들의 마음에 맺혀 있는 소원들을 풀어서 자유케 해 주시는 일을 같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끝)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