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프랜시스 영 <신경의 형성>(비아)
평일 성찬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도 그렇지만, 주일 성찬 예배에서 니케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시간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느낀다. 성령강림 이후에 시간과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떠난 교회의 신학적 고민과 대화가 니케아신경 안에 깊고도 두텁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의 분열과 동·서방교회의 분리 훨씬 이전에 열린 첫번째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년) 1700주년을 기념할 2025년을 바라보며, 세계 교회가 저마다 교회의 공교회성과 일치와 더 충만한 상통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는 지금, 일년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스마트폰을 기다리는 요즘, 그토록 오래된 니케아신경을 한목소리로 낭독하는 일은 분명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다.
구약 독서와 시편 낭독, 서신 독서와 복음 독서, 그리고 이에 기초한 설교를 나누고 나면, 니케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한다. 유형과 무형의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신 성부 하느님, 성부 하느님과 똑같은 참하느님이시면서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계에 내려오신 참인간이신 성자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같은 경배를 받으시며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느님, 그리고 이 모든 창조와 구원과 완성의 활동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 삼위일체 하느님. 앞서 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구절들에서 드러난 하느님이 니케아신경에서 삼위일체 신앙으로 표현된다. 성서와 신앙을 신학으로 벼려 낸 니케아신경이 길고 지루한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여전히 교회의 신앙을 떠받치는 공동의 고백으로 생생하게 발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주일 성찬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덜어 낼 수 없는 책무이자 흥미롭고 창의적인 도전이다.
간혹 당혹스런 순간이 있다면,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조우를 살아 내야 하는 신앙인의 책무를 저버리고, 이 어렵고도 도전적인 과제를 아주 가볍게 덜어내 버리기 위해 단순하고 쉬운 논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경우를 목격하는 때다. 교회의 신경이 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하등 관계없이 신적 승인을 득한 초월적 명제라는 순진한 주장도 그렇지만, 오해와 이해, 반목과 화해, 갈등과 합의, 권력과 저항, 단절과 대화를 통해 신경이 형성되어 온 과정 속에 하느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가 전혀 부재한 것처럼 단정하는 단순한 주장은 더욱 당혹스럽다.
역사적 인격체인 교회의 사목자가 집전하는 성사(성례전) 안에 성령이 임재하고 활동한다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이 신경의 형성 과정에서는 성령의 활동을 배제하는 이해를 보일 때 당혹스러움은 배가한다. 교단을 막론하고 역사와 성령, 전통과 성령의 섭리적·역동적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사목자와 평신도들에게 이 책 <신경의 형성>(비아)이 필요한 이유이다. '신경의 형성'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교리의 발전'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20세기 후반, 정경과 정통에 대한 반발로 위경과 이단에 대한 치우친 관심들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정경과 신경의 형성은 '박해받는 교회'에서 '박해하는 교회'로 변질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 교회'의 통치 전략이라는 단순한 주장이 널리 퍼졌다. 새라 코클리가 새문안교회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엄에서 지적한 대로, 공의회의 개최와 신경의 형성을 통한 정통의 발생은 "억압적 권력-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미셸 푸코가 선물한 권력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이 전통과 역사에 대한 두텁고 신중한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물론,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교회는 이미 신경으로 표현되는 정통을 '헬라 철학 때문에 변질된 성서 사상의 결과물'로 보고 재빨리 '새로운 정통'을 주장하며 '오래된 정통'을 수정하거나 해체하고자 했다. 교회 밖에서는 종교적 신앙은 '태생상' 과학적 지성을 억압하고, 교리는 '본질상' 폭력을 일으키고, 선교는 '예외 없이'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동지이며, 종교적 권력은 '속성상' 여성을 억압하고 성을 착취하고 원주민을 탄압한다는 세간의 주장이 교회의 신경을 새로운 정신으로 고백해야 할 '유산'이 아니라 더 이상 아무런 현실 관련성도 없는 빛바랜 '유물'로 보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교회 내·외부의 손쉬운 주장에 비해, 로완 윌리엄스가 말한 "창조적 고고학"의 모험을 떠나는 일, 20세기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 새로운 신학)'의 "원천의 회복(ressourcement)"에 참여하는 일은 보다 더 세심하고 찬찬한 식별을 동반하는 길고 어려운 여정이다.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은 이처럼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여정을 떠나는 이들을 위한 섬세한 지도를 제공한다. 버밍엄대학교 신학종교학부의 유서 깊은 에드워드 캐드버리 석좌교수로 활동한 영의 이 책은, 초대교회의 교리적 발전과 신경의 형성을 다루는 다른 책들이 양보한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신경의 형성 및 교리의 발전과 관련된 핵심들을 두루 다루면서도, 이를 간결하게 풀이해 선명히 드러낸다. 무로부터 창조 교리가 가진 문화적 함의, 육화의 그리스도론과 신화의 구원론을 함께 사유하는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적 그리스도론, 아우구스티누스와 카파도키아 교부의 삼위일체론이 공유하는 근원적 통찰들,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론의 관계,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분되면서도 연관되는 관계 등,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 할 논의들, 현대 신학과 교회가 여전히 오해하고 이해하며 씨름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매우 간결하고 생생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이것이 이 책이 지닌 장점의 전부는 아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교리(특히 무로부터 창조 교리)가 어떻게 기존의 지배적 사상 체계에 저항하는 반문화적 역할을 수행했는지 강조하는 부분은, 교리가 억압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단순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동·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차이보다 일치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은, 반대의 주장을 전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는 이들과 공명하는 부분이다. 황제의 권력과 이단 사상이 신경 형성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얼굴 붉히지 않고 드러내는 영의 접근은, 그러한 역사적 역동성이 신경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근거가 된다는 주장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교리의 형성을 히브리 사상의 헬라화로 치부하는 현대 신학의 한 영향력있는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도 현대 신학의 주요 주제들에 근원적 도전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순교자와 주교의 권위가 작동하는 초대교회의 삶을 설명하는 부분은 작금의 교회에서도 신앙적 권위와 사목적 권위가 맺어야 하는 건강한 관계를 고민하게 한다.
이 책은 두껍지도 크지도 않지만, 위와 같이 신학 연구와 교회 생활 핵심에 가까이 놓인 주제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생성·발전해 왔는지 고민하도록 독자를 초대한다. 부드럽고 세심한 번역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하는 요인이다. 일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드는 'psychological analogy'를 기존 번역어인 '심리적 유비' 대신, 어원으로나 내용으로나 보다 더 정확한 '영혼 혹은 정신의 유비'로 번역한 점은 매우 반갑다.
이 한 권의 작은 책을 최근에 소개된 다른 책들과 함께 읽는다면, 초대교회에서 신경의 형성과 교리적 발전에 대해서 조금 더 풍성하고 온전한 접근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복있는사람), 로완 윌리엄스의 <과거의 의미>(비아), 앤드루 라우스의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분도출판사)은 이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는 훌륭한 단권 연구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화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체입니다." (259쪽)
영의 이 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살아 움직이는 신경과 정통의 생명력을 강조한다. 신학을 '생동하는 실체', 즉 생명을 가지고 역동하는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존재가 하느님의 얼굴을 희미하게 보는 유한성의 시간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완전하게 보는 텔로스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여정 안에서, 아니 그 여정으로서 신학을 하기 때문이다. 니케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근원적 사랑의 열정을 되뇌며 우리 영혼에 사랑의 불을 지핀다. 옛 신앙인과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 안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성도의 친교와 상통'을 이룬다.
차보람 / 대학에서 물리학·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교회에서 사목을 하고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비아)를 한국어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