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세운 사람의 이야기를 '전기'로 쓴다면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흔히 '전기'라고 하면 역사 속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저명한 인물이나 영웅, 천재, 악당 등 범상치 않은 행적을 기록한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브루더호프(Bruderhof) 공동체 초기 개척자인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1913~1982)의 생애와 브루더호프의 초기 역사를 다룬 <부서진 사람>(바람이불어오는곳)은 이러한 예상을 비껴간다. 이 책의 저자이자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의 손자인 피터 맘슨은 서문에서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몇몇이 되지 못한다. 이토록 평범하고 무명에 가까운 사람에 관해 글을 쓰는 건 처음부터 전기의 요건에 맞지 않는다"(18쪽)고 말한다.

저자는 전기의 조건에도 맞지 않는 글을 왜, 무엇 때문에 쓰려고 했을까. 저자의 당위는 자신이 목격한 할아버지의 삶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이야기"로서, "어떤 일이 있어도 소명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투철한 의지"가 "수백만의 가슴속에 어떤 갈망을 일으킬 것"(18쪽)이라는 고백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 책을 펼치는 첫 장부터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과 상식이 부서지는' 경험이다. '공동체라면 응당 이럴 거야', '개척자라면 이렇겠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놀라울 거야' 등 나름의 기대들은 산산히 부서진다. 이 책은 브루더호프 개척자에 대한 소개이기 이전에, 십자가의 도 안에서 '부서질' 또 '부서져야 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이야기이자, 부서진 그 자리에서 부르심을 다시 재고하게 된 우리 자신의 이야기, 즉 우리 각자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서진 사람 - 부르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 하인리히 아놀드의 생애> / 피터 맘슨 지음 / 칸앤메리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펴냄 / 544쪽 / 2만 5000원
<부서진 사람 - 부르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 하인리히 아놀드의 생애> / 피터 맘슨 지음 / 칸앤메리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펴냄 / 544쪽 / 2만 5000원
왜 부서지는가?:
소명, 그 영혼의 불꽃에 대하여

때론 상징적인 단어가 이야기를 꿰는 좋은 메타포가 된다. 필자가 540쪽이나 되는 이 책에서 밑줄 긋고 감동받은 지점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부서진 편견과 상식, 이를 통해 뒤바뀌게 된 사유 방식은 이 책을 추천하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왜', '어떻게', '무엇이' 부서지는가 하는 메타포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왜 부서지는가?' 사실 이 질문은 필자의 질문이 아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 창립자인 아버지 에버하르트 아놀드를 바라보는 아들, 하이너(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의 애칭)의 물음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이야기의 시작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끌고 나간다. 전쟁의 화마 속에서 비폭력을 주창하고 인종과 계급 차별에 반대하며 만들어진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엄밀히 말해 아버지의 소명이었지 하이너의 소명이 아니었다. 어린 하이너는 사유재산을 나누며 고난받고 버려진 아이들·난민·범죄자·미망인들을 품고자 하는 공동체의 소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하이너는 단지 그런 '영성적靈性的 장'에서, 그런 '가치관'을 가진 부모님의 아이로 태어나 자라고 겪으며 의문을 가졌을 뿐이다.

일례로 버려진 어린아이 '조피'와의 만남은 어린 하이너의 시선으로 본 '공동체 소명'의 당혹스러움과 받아들여짐을 담담한 에피소드로 그려 나간다(75~76쪽). 한 의문의 여성이 공동체 놀이방에 버리고 간 조피. 한참을 울다가 옆에서 흔들 목마를 타고 있는 자기 또래 남자아이 하이너를 발견하곤 자신도 목마를 타고 싶다고 말한다. 어린 하이너는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조피는 고개를 빼꼼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선 모든 걸 나눠 쓴다고 하던데…."

"맞아! 하지만 널 여기서 받아 준 건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가 널 받아 주셔서 네가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거라구!"

자신의 대답을 듣고, 서럽게 우는 조피를 달래며 하이너가 하는 말은 '공동체가 되어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이들의 언어로 대변해 준다.

"엄마를 잃었구나, 근데 사실 나도 엄마가 없어. 아니, 있기 하는데, 나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어. 청소하고 요리하고 밭에서 일하고, 손님을 맞이하느라고 너무 바빠. 고아들도 돌봐야 하고, 내 생각엔 우린 같은 처지인 거 같네."

이러한 에피소드는 소명이란 '한 사람을 향한 부르심'에서 그치지 않고 '소명 공동체에 깃들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형성·확장돼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어린아이와 노인도 제외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공동체가 오히려 이들에 의해 고백·증언·유지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어린 하이너의 시선을 통해 왜 우리가 서로를 돌봐야 하는지, 왜 이기적으로 살면 안 되는지, 왜 어른들은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의 당위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또, 하이너의 아버지를 비롯한 공동체의 어른들의 대답은 우리가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다시금 추적하게 만든다. 그들은 공동체에 깃든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 가운데 살 때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삶으로 보여 주며 가르친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들의 때에, 그들의 방식으로 깨닫을 것을 믿으며 묵묵히 기다린다. 이 책을 탐독하는 또 다른 묘미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공동체 어른들의 태도에 있다. 어른들은 하나님이 어린아이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어른들의 태도는 아이들 안에 있는 영혼의 불꽃, 즉 '소명'을 깨우는 산파 역할을 한다. 버려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진 아이들이 '영성적 장'에서 자라며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도리어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중보 기도 모임을 만들고, 노숙자·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복음의 의미를 논한다. 아이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해 나가는 장면은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편견을 멈춰 세운다.

독자들은 이 책이 단순히 브루더호프의 창립자 에버하르트와 이를 목격하고 공동체 개척을 이어 간 아들 하이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점차 깨달을 것이다. 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성원 각각이 지닌 영혼의 불꽃(소명)이 마주하는 자리, 즉 서로가 서로에 의해 빚어져 가는 사랑의 공명 속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이 책 곳곳에 담긴 고백과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증언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부서지는가?:
배신과 추방,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

두 번째, 이 책은 '낭만적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부순다. 실제로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초석이 된 자네츠는 핵심 맴버 간 분열을 겪는다. 그 분열이 어찌나 강했는지 평생을 함께 일군 출판 사업의 판권과 자본, 땅과 지분까지도 파렴치하게 앗아갈 정도였다. 어제의 동료가 부지불식간에 오늘의 철천지 원수가 된 것이다. 혹자는 자네츠 사건 이후에도 공동체 내에서 계속 펼쳐지는 배신과 갈등의 이야기를 읽으며 '맞아. 사실 나도 공동체가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필자는 '분열'을 다르게 해석하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모습에서 또 다시 사유의 부서짐을 경험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이 배신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집중하며 갈등과 분열을 통해 예민한 영적 감각을 익혔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배신·갈등뿐만 아니라, 사탄의 간계, 내면적 씨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권세·신분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공동체가 '신앙의 공통 감각'을 형성하며 이를 헤쳐 나가는 모습은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예를 들어, 유년시절 그토록 아끼던 공동체가 한순간에 분열되는 충격을 경험한 하이너를 향해 어머니가 들려준 말은 간명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대하는 사고방식에 차이를 가져다 준다.

"하이너야. 남은 사람이 착하고, 떠난 사람이 나쁜 건 아니란다. 떠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저 (자신들의 생각에 의한 - 필자 주) '실험'으로 보았을 뿐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 필자 주) '소명'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우리는 계속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단다." (74쪽) 

공동체가 무너질 때마다 공동체의 리더들이 무엇에 주목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묘미다. 틈만 나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주님의 용서'와 각자에게 소명을 불러일으킨 '영혼의 불꽃'에 집중하자는 리더들과, 다른 한편에서 이제는 종교적인 이야기는 좀 그만하자고, 현실감각을 잃은 채 믿음만 내세우지 말자고 불평하는 리더들의 힘겨루기는 독서 여정 내내 반복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힘겨루기가 개인을 넘어, 보이지 않는 집단 감각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히틀러로 대변되는 시대적 징후가 브루더호프의 여정과 선택을 어떻게 흔드는지,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대안·대항 공동체로 브루더호프를 연합해 행동하게 만드는지 볼 수 있다. 저자는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를 '시대와 분리된 개체'로 서술하지 않고, '관계 속의 개체'로 소개한다. 분열을 조장하고 갈등의 영이 패거리를 짓는 시대적 사건 속에서, 브루더호프 구성원들이 어떻게 흔들리며 자신들의 중심을 잡아 가려 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대하는 방식을 재고하게 만든다. 즉, 공동체 갈등의 원인을 누군가의 성격·기질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경향을 멈추고, 더 깊은 차원에 숨겨진 어둠의 간계를 주목하게 한다.

<부서진 사람>에 서술된 갈등은 단순한 현상적 이기심 이전에 보다 본질적인 영역, 즉 보편적인 죄성이 우리를 어떻게 괴롭히며 갈등·반목을 반복하게 만드는지 조명한다. 공동체는 증언한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 다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옛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돼야 할 노예이지만, 동시에 승리자 예수로 인해 구속받은 혹은 받아야 할 주님의 자녀들이라고.

한편, 이 책에서 필자가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신학자는 창설자 및 공동체 리더들의 서재에서 종종 발견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다. 필자의 경우 이 책을 보다 구체적으로 읽고 상상하는 데 있어,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불꽃 속에서 탄생하는 아들의 탄생' 개념[매튜 폭스<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분도출판사) 참고]과 블룸하르트의 '어둠의 권세와 승리자 그리스도의 주권' 개념[임희국<블룸하르트가 증언한 하나님나라>(대한기독교서회) 참고]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무엇이 부서지는가?:
희망,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향하여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이 고생스러운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나?' 필자도 "눈물 흘리며 씨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5:5)라고 외치며 나아가는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마냥 곱게 보이진 않았다. 배신과 추방을 당하고, 창립 정신마저 빼앗기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전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밟히다 못해 처참하게 해어지는 모습(공동체를 돌보다 불구가 된 아버지 에버하르트, 어이없는 오진으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오해받는 아들 하이너, 속절없이 당하는 걸 지켜보는 손주 크리스토프)은 어리석다 못해 '저런 모습이라면 절대 닮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이쯤 되면, 이 책을 펴기 전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내어놓고 계급과 인종을 넘어서서 급진적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상상했던 독자들은 이내 실망할 수도 있다. 어떤 독자들은 '나는 저 정도로 희생과 사랑을 할 깜냥은 아니야. 이건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작할지 모른다. 어딘지 모르게 어리석어 보이는 저들의 모습은 우리가 꿈꾸고 동경하던 공동체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 편견이 이야기의 본의를 곡해하는 또 다른 어둠의 속삭임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를 고집스럽게 묶고 있는 이기적인 옛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서져야, 바로 그 자리에서 새 사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서에 나타난 '고난' 이야기는 '자아의 할례'로 대변되는 '자유'를 노래한다. 할례의 원어적 해석은 '애굽의 수치가 굴러떨어지다'1)인데, 이는 우리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진리처럼 여겨지는 애굽적 삶의 방식에 대한 죽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자유를 동경하지만, 노예에게 주어지는 고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떠날 수 없고 떠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나와는 상관없는,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려는 유혹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심지어 조롱할 수도 있다. '찌질하고, 불편하게 살 바에는 적당히 행복한 삶과 타협하겠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하나님이 우리의 고집스러운 자아를 추적하고, 관계에 칼을 대며, 갈등을 통해 무엇을 걷어 내려 하시는지 주목해야 한다. 다른 방식의 삶,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추구한 예수의 길을, 우리의 옛 자아는 자신의 진영을 위협하는 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선물로 받아들인다. 자기 안에 갇힌 '우리의 고집스러운 옛 자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서짐에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난 새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빚으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고자 한다.2)

이 책은 그 시대 혹은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한다. 우리의 이기적 자아,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집단의식이 우리를 실제로 자유하게 하는지 자문하게 한다. 이 질문은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가 부서지고 애굽적 삶의 방식이 떨어져 나갔을 때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진정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혹여나 이 책이 그저 '부서지기만 하는' 공동체의 역사로 기억되지 않길 바란다. 부서짐은 하나의 사실로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영적 실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부서진 사람들이 세워 나가는 '자유와 해방'의 이야기,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짊어진 온전한 경청과 순명, 즉 그리스도의 길을 떠올리게 한다.

부서진 당신의 자리에 세워질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스도, 그분의 부르심은 우리를 '더불어 함께' 살리시려는 사랑의 초대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부르심이 때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부서짐으로 다가올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브루더호프 이야기처럼 그 실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점검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신앙의 공통 감각을 익혀 가자고 말하고 싶다. 고난이라는 이름의 칼이 고집스러운 우리 옛 자아를 수술하려는 주님의 음성인지, 사탄의 간계에 넘어간 자아가 쳐 놓은 덫인지 기도하며 분별해 나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부서진 현상 이면에 있는 역설적인 영적 실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처참한 상황 한가운데서 만나는 분은 우리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생명의 이야기 혹은 생명들의 연대를 시작하시는 그리스도다. 우리 영혼의 불꽃이 공명하는 그곳에 계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진정한 수치는 노예 본능으로 익숙해진 애굽의 수치가 아니라, 자녀된 신분의 망각(수치)이라는 것을. 소명을 따르는 길에는 우리 자아가 갇혀 있는 세계를 깨뜨리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영혼의 치유·회복이 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 상처를 치유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고난받는 세상을 변혁하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필자는 이 책을 이제 갓 태어난 첫 아이를 돌보며 읽었다. 에버하르트를 보며, 또 자신도 모르게 '영성적 장'에 내던져진 채 의문을 품었던 하이너를 보며 상상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 어린 하이너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다른 또래 아이들에게는 어리석고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에버하르트와 하이너처럼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 내고, 꿈꾸며, 물려주기 위해 부서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물 흘리며 뿌린 씨가 반드시 자신들 세대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고통받는 세계를 향한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인 '복음' 안에서, 자신들의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넘어 온 인류와 연결돼 있음을 안다.

또한 이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통한 경이로움이 반드시 특별한 사람들이 만드는 저명한 이야기를 통해서만 입증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오히려 이 경이로움은 "가련하고 실수투성인 이 땅의 자녀들",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3) 안에서도 능히 역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필자는 이 긴 글을 읽어 준 독자에게, 당신의 부서진 자리에 세워질 가장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당신 안에 숨기신 영혼의 불꽃, 그 생명의 이야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 성서 말씀대로 온 피조 세계는 그 생명의 이야기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고,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흑과 백,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동역자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성현철 / 학부에서 신학을,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나다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적 소명의 마디를 감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 D. A. 카슨 외, <IVP 성경 주석>(IVP), 332쪽
2) 김리아, <생명의 순례 - 소책자 1권: 기적같은 선물 z·o·e>(신의정원), 12~13쪽
3) "가련하고 실수투성이인 이 땅의 자녀들을 깨우칠 자는 생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부서진 한 사람. 사랑의 군영에는 오직 상처입은 병사만이 복무할 수 있으니." 저자는 손턴 와일더의 '물을 휘저은 천사'에 서술된 이 구절로 책의 서두를 연다(7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