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복적정의협회 회복적정의연구소가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라는 주제로 회복적 정의의 개념과 사회 곳곳에 회복적 정의가 적용되는 모습들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마다 발행됩니다. - 편집자 주

 

회복적 정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정의(正義) 관점과 다른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오래된 상식(常識)에 질문을 던진다.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고 나면, 그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회복되는가를 묻는다. 행위자는 벌을 받는 방식으로 책임졌는데도,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 그 피해를 회복해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생기는 질문이다.

이처럼 패러다임의 전환(轉換)을 자극하는 질문은 합리적인 데에 기인하기보다 단순한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이전 패러다임이 가진 한계를 넘어, 새로운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인정해 주기 전에, 발생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책임을 스스로 지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를 통한 분쟁 해결은 경찰에게 중요 이슈였다. 경찰은 사건을 최초로 접수하고 처리하는 국가기관이다. 그래서 지역과의 밀착성 등으로 분쟁 해결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또한 당사자 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피해 회복을 위해 가해자가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게다가 피해자 보호 및 지원은 경찰 활동의 만족도를 향상시키고, 직무 수행 과정에서 시민들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실제로 경찰은 2007년 2차례에 걸쳐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경찰서를 대상으로 학교 폭력 사건에 대하여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인 '회합'을 시범 실시한 바 있으며, 2014년에는 강원지방경찰청에서 회복적 대화 모임 '너와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그동안 회복적 정의 이념에 기반을 둔 경찰 활동을 수차례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법률상 한계, 실무상 부담 등을 이유로 이러한 시도들이 끝내 실무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이후 경찰청에서는 2015년 경찰청 감사관실에 피해자보호과를 신설하고 피해자 보호·지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온 데에 이어, 2018년 12월에는 '회복적 경찰 활동 도입 추진 계획'을 수립하는 등 다시 한번 회복적 정의에 기반한 경찰 활동이 추진 동력을 얻게 되었다. 2019년 2월 회복적 정의 분야 전문가 13명을 '회복적 경찰 활동 자문단'으로 위촉하여 회복적 경찰 활동 운영 모델을 마련하였으며, 2019년 4월 '회복적 경찰 활동 시범 운영 계획'을 수립하여 수도권 15개 경찰서를 대상으로 시범 운영을 실시하였다.

회복적 경찰 활동은 회복적 대화 전문 기관(갈등해결과대화, 비폭력평화물결, 한국회복적정의협회, 한국NVC센터, 평화비추는숲)과의 협업을 통해 운영되었으며, 2020년 4월에는 경찰청과 이들 기관이 정식으로 업무 협약을 체결하여 협력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편, 회복적 경찰 활동은 2019년 시범 운영 결과 국민·경찰관 등의 만족도가 높고 피해 회복 및 범죄 예방 효과 등이 인정되어 이후 점차적으로 운영 관서를 확대해 나갔다. 2024년 현재 전국 259개 경찰관서에서 회복적 경찰 활동을 운영하고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회복적 경찰활동' 정책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찰청은 이날 갈등해결과대화, 비폭력평화 물결, 좋은교사운동 등 관계기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피의자 처벌 중심의 기존 수사 활동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회복적 경찰활동'의 전국시행을 위해 관련 전문기관과 정책 방향을 논의했다.
2020년 4월 17일 민갑룡 경찰청장이 '회복적 경찰 활동' 확대를 위해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경찰청 본청에서 회복적 대화 전문 기관 대표들과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2020년 6월 2일 ㄱ경찰서 청문감사관실 A 경장이 이메일을 통해 가정 폭력 사건을 의뢰했다. 그해 들어 스물여덟 번째 의뢰였다. 여청1팀에서 폭행으로 수사 진행 중에 있는 사건으로,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부녀지간 문제뿐만 아니라 부부간에도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2020년 8월 1일까지 회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관련자들은 부녀지간으로 큰딸(21)이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아버지(52)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아무 이유 없이 "한심한 것들", "너희들 필요 없다", "당장 아들 입양해야겠네"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양손으로 큰딸의 목을 졸라 숨을 쉬지 못하게 했고 바닥에 넘어뜨리는 등 폭행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회복적 대화 모임 주 진행자와 협력 진행자가 섭외되었고, 주 진행자는 사건을 의뢰한 A 경장에게 전화하여 사건이 접수된 것을 알려 주면서 특이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당사자들과 연락하여 사전 모임 일정을 잡았다. 

6월 5일 금요일 오후 1시부터 2시간에 걸쳐 ㄱ경찰서 회의실에서 큰딸과 둘째 딸, 어머니, 그리고 전담 경찰 A 경장이 배석한 가운데 사전 모임을 진행했다. 주 진행자는 사전 모임을 위해 큰딸과 통화하면서 알게 된 사건 관련 내용을 반영하여, 둘째 딸과 어머니도 사전 모임에 참여하도록 했다. 큰딸에 의하면, 사건 당일 아버지가 밤 10시 반쯤 술을 마신 상태에서 방에 들어와 뜬금없이 일방적으로 "그런 식으로 살 거면…"이라는 비난과 함께 비하하는 말을 했고, 이에 화가 난 큰딸이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큰딸의 목을 졸랐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큰딸이 어렸을 적부터 겪었던 일이다. 신체적인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언어 폭력이었다.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고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무산이 되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큰딸이 직접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둘째 딸은 이런 가족 분위기가 너무 힘들어서 일부러 1년 동안 쉼터 생활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가족 내에서 본인으로 인해서라도 뭔가 변화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더욱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 남편으로부터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바람에 자녀들의 교육을 제대로 지원해 줄 수 없었고, 남편이 아이들에게 해 왔던 가정 폭력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본인 또한 언어 폭력, 정서 폭력, 경제적 폭력으로 지쳤다고 했다. 더구나 어머니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 보니 아이들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서 미안하고 후회스럽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딸들 또한 어머니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딸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아버지가 더 이상 언어 폭력을 하지 않기를 바랐고, 가족들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길 원했다. 

큰딸이 사전 모임을 마치면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 주변 이웃들 집 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도움을 청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신고를 철회해 경찰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 일이 터지고 난 뒤, 어느덧 21세라는 성인이 된 지금은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찾아보았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회복적 경찰 활동'이라는 사업이 있고, 이를 통해서라도 본인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상 사전 모임을 마치고 난 지금 드는 생각은 "국가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 준다는 느낌이다"라고 했다. 

같은 날 오후 7시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를 만나서 사전 모임을 진행했다. 회의실에 들어오는 아버지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그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며 그것들을 펼쳐 놓고 설명하려 했다. 그것들은 본인이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 왔는지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들, 교육적이면서도 교훈적인 글들이 적혀 있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여서, 다소 의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당시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건이 발생되기 며칠 전 어느 밤중에, 큰딸과 둘째 딸이 싸우는 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딸들이 아버지에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듣고 몹시 힘들고 자괴감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한밤중에 동네 골목길을 걸으며 마음을 달랬다는 것이다. 그 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큰딸에게 사과를 요구했다가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다소 험악한 말도 오갔으며 신체적인 접촉도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방에서 홀로 올라와 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른다며 서글퍼했다. 은행 대출이 좀 남아 있지만 본인 소유의 건물을 가지고 있고, 운영 중인 자동차 정비 센터도 임차인이 아니라서 쫓겨날 일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대장암 2기 진단을 받고 용종 11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1년 36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직원 없이 혼자 일했으며,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화장실도 마음 놓고 편안하게 가질 못했다.

그런데 가족들은 모든 경제적인 부담을 아버지에게만 주고 본인들은 전혀 경제적으로 기여하려고 들지 않으니, 걱정도 되지만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딸들은 감정 기복이 심해 싸울 때가 있어서 자신이 말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 아버지가 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등 자녀 양육에 애로가 많다는 입장이었다.

회복적 경찰 활동은 회복적 대화 모임이 핵심이다. 사진 제공 한국회복적정의협회
회복적 경찰 활동은 회복적 대화 모임이 핵심이다. 사진 제공 한국회복적정의협회

6월 13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 5시간에 걸쳐서 본 모임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딸, 둘째 딸 그리고 셋째 딸도 참석했다. 사전 모임에는 오지 못했던 셋째 딸까지 포함해 일가족 모두가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진행자들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아버지와 A 경장이 앉았고, 맞은편에는 딸들과 어머니가 자리를 잡았다. 한 가족인데도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그나마 들은 말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딸들의 이야기에 대해 화를 내며 자기 입장에서 변명을 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더니, 결국 큰딸이 답답한 마음에 자기의 말을 이렇게 정리해 줬다.

"아빠, 사랑해 달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왜 나에게만 이렇게 힘들게 요구하는 거야?" 

그동안 가족 간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대화가 중단되지 않았고 5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에도, 양측이 분리하여 각자의 입장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다시 만났을 때는 어느 정도 이야기의 진척을 볼 수 있었다. 5시간에 걸친 대화 모임은 약속 이행문에 이와 같이 정리되었다.

아버지는 아내와 딸들에게 언어적·물리적·경제적 학대를 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고, 큰딸에게 동생들을 위한 부모와 선생님 역할을 강요해서 힘들게 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큰딸도 아버지와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욕설을 하면서 달려들어서 아버지를 당황스럽게 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동안 가족 안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약속도 했다. 아버지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아이를 낳고 양육해 온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존중하기로 했다. 그동안 아버지는 아내를 살림만 한다면서 비하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딸들의 요구에 따라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기로 했고, 칭찬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갖기로 했으며, 딸들의 꿈이 바뀌더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술을 자제하기로 했고, 만약 술을 먹은 상태이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곳에 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과목에 상관없이 둘째 딸과 셋째 딸이 원하는 한 곳 정도의 학원비와 큰딸이 원하는 댄스 안무실 대여비 그리고 대학 입시를 위한 지원을 하기로 했다. 아내에게는 직업을 갖도록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경제적인 부담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힘들어서 아내에게도 직장을 구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가족들은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긍정적인 관계를 갖기로 했고, 서로 이해하면서 가능성을 무시하거나 자신감을 무너뜨리지 않기로 했다. 또한 대화할 때 천천히 말하고 경청해 주고 화내지 말고 대화하며, 상대방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딸들과 아내는 아버지와 함께 가족여행을 제안했고, 아버지는 가족 전체가 대화하는 기회를 더 갖자고 제안했다. 긴 시간의 대화였지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회복적 경찰 활동은 회복적 대화 모임이 핵심이다. 경찰은 분쟁 당사자들에게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회복적 대화 모임을 제안한다. 피해자의 피해가 회복되고, 그 피해 회복을 위해서 가해자가 책임을 지고 싶다면, 당사자들은 서로 대화해야 한다. 그 대화 모임의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대화가 불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다. 대화를 해야 새로운 대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윤구식 / 한국회복적정의협회 회복적정의실천센터 소장이며, 협회의 회복적 경찰 활동을 총괄 운영하고 있다. 회복적 대화 모임 진행자로서 학교 및 여러 기관 그리고 경찰서 등이 의뢰한 사건을 통해서 많은 갈등 및 분쟁 당사자를 만나고 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글 순서'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6. 회복적 정의와 장애 - 황필규(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장애인소위원회 위원장)
7. 회복적 정의와 사회적 참사 - 김훈태(회복적정의연구소 연구원)
8. 회복적 정의와 웰엔딩 - 남태일(세사람 대표, 어.울림교회 목사)
9. 회복적 정의와 공동체 - 한정훈(한국평화교육훈련원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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