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고 임보라 목사의 삶과 활동을 기억하고 나누는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 행사가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을 몸으로 실천했던 고 임보라 목사의 1주기 추모 행사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가 3월 8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행사는 생전 임보라 목사가 속했던 차별과혐오없는평등세상을바라는그리스도인네트워크(평등세상)가 준비했다. 평일 늦은 저녁 시간에도 참가자는 80명이 넘었다. 이들은 임 목사와 나눴던 경험과 그의 삶·활동을 추억하며 울고 웃었다.

정경일 집행위원장(평등세상)은 임 목사의 글, 설교, 인터뷰와 개인적 경험을 담은 8페이지 분량의 '임보라의 소명, 연대, 그리고 돌봄'이라는 추모글을 읽었다. 그는 고통과 연대의 현장 어디에나 있었던 임 목사를 추억했다. 임 목사는 남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곤경에 처한 이를 지나치지 못하던 '참견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임보라 목사님은 고소공포증이 있으면서도 콘크리트 테트라포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곳을 타고 넘어가 말 없는 구럼비바위를 만지고, 그 위에 눕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나서 '구럼비는 살아 있어요!'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소수자들의 소리 없는 한숨과 신음을 천둥소리처럼 듣고 응답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 답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왜' 그는 어디에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답은 목사님이 자주 말씀하셨던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아픔이 있는 곳, 슬픔이 있는 곳, 그곳이 세상의 중심인 이유는, 거기서 그가 사랑한 예수, 고통받는 이의 얼굴로 오는 예수를 만났기 때문일 겁니다."

정경일 집행위원장은 임 목사가 고통을 지나치지 못하던 '참견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정경일 집행위원장은 임 목사가 고통을 지나치지 못하던 '참견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정 집행위원장은 임 목사의 '심방'은 교회 안의 교인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사회적 심방'이었다고 했다. 그는 "목사님의 돌봄에는 경계가 없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어서 사랑하고 돌본 게 아니라,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하고 돌봤다. 그의 사랑은 돌봄과 도덕 너머, 법 너머에 있었다"고 말했다. 

정경일 집행위원장은 임 목사가 보여 준 돌봄의 가치를 이어가자고 했다. 정 집행위원장은 "돌봄은 특별한 사람, 강한 사람의 덕목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돌보며 살아가야 하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하는 활동가도 서로를 돌봐야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불안하지 않도록 서로 돌보는 것이 목사님이 우리에게 보여 준 돌봄의 영성"이라고 말했다.

임 목사와 함께해 온 각 현장 활동가·목회자들도 그가 떠난 빈자리를 애도하고, 임 목사의 삶이 남긴 것들을 나눴다. 김수산나 목사(섬돌향린교회), 박신원 실장(기독교반성폭력센터), 임왕성 목사(강정개신교대책위), 자캐오 신부(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장예정 집행위원장(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정민석 대표(청소년성소수자지원센터 띵동)가 나란히 마이크를 잡았다. 예고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에, 행사장에는 위로와 격려의 박수가 수시로 울려 퍼졌다. 

임 목사와 함께했던 다양한 현장의 활동가·목회자들도 그와 얽힌 경험을 나눴다. 좌측부터 임왕성 목사, 장예정 집행위원장, 자캐오 신부, 김수산나 목사, 정민석 대표, 박신원 실장. 뉴스앤조이 나수진
임 목사와 함께했던 다양한 현장의 활동가·목회자들도 그와 얽힌 경험을 나눴다. 좌측부터 임왕성 목사, 장예정 집행위원장, 자캐오 신부, 김수산나 목사, 정민석 대표, 박신원 실장. 뉴스앤조이 나수진

임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성폭력 대응 활동을 해 온 박신원 실장은 "목사님은 정말 뜨거운 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 편인가'가 정말 확실하고 분명한 분이었다. 각 사건에 있어서 적당히 타협하거나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것 없이 임하셨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뛰쳐나갔다. 단지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구조와 제도를 개혁하려고 힘쓰셨다"고 했다. 그는 "목사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피해자가 회복될 수 있다고, 이 세상과 구조가 조금씩 바뀌어 갈 수 있다고 느꼈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게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써 온 장예정 활동가(천주교인권위원회)는 "나중에 사진을 찾아보니까,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단식 농성을 할 때 목사님이 정말 많이 찾아오셨더라. 찹쌀이(반려견)를 유아차에 태우고 나와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동조 단식을 하기도 하며 그저 옆에 계시다가 가시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보수 개신교의 반대가 심해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목사님이 계셔서 희망을 갖고 이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정민석 대표는 임 목사의 지지와 도움으로 단체를 시작하고 운영할 수 있었다면서, 임 목사는 큰 기여를 하고도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교회와 같은 건물에서 일하면서 어딘가로 나가시기 전 목사님의 모습을 많이 봤다. 그 바쁜 와중에도 주방과 짧은 복도가 연결된 공간을 활용해 항상 누군가를 맞을 준비를 하셨다"고 기억했다. 

임보라 목사의 뒤를 이어 섬돌향린교회에 부임한 김수산나 목사는 "이번 주부터 교회에 남아 있는 목사님의 책장과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편지나 엽서가 그렇게 많다. 정말 다양한 분들이 목사님과 처음 만났던 장면들을 기억하고, 감사와 안부를 묻곤 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후임의 무게감이 크게 느껴지지만, 섬돌향린교회는 그동안 섬돌 한 명 한 명이 주체가 되어 길을 만들어 왔다"면서,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를 서로 살피고 담아내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자캐오 신부(성공회 길찾는교회)는 "작년 한 해가 임보라 목사님의 부재로 시작해 이동환 목사의 출교로 끝나면서 '내가 뭘 했나'라는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성공회라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리에 있는 내가 많은 것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목사님은 '한 사람에게 많은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 '누구도 영웅은 아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는 분이었다. 앞으로는 그 말을 이정표로 가지고 활동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임보라 목사 덕분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경험,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경험, 주변 이들을 돌본 경험 등을 나누며 그를 기억했다. 이야기는 2시간 넘게 이어졌다. 행사 말미, "임보라 목사의 첫 번째 목사 수련생이자 마지막 목사 수련생"이었던 김하나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1년간 목사님이 계셨던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임보라'를 들으면서 목사님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분들이 경험하신 목사님에 대해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목사님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이었다. 

'할 일도 많은데 굳이 욕을 먹으면서 저걸 해야 되나'하는 마음이 들었던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반대를 뚫고 교단에서 구조를 세우고, 틈을 내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것이 임보라 목사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자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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