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쌀이(임보라 목사의 반려견) 엄마한테 신세를 많이 졌어요. 동네에서 한 유흥업소의 불법 시설물을 신고하고 보복성으로 미행과 협박을 당했는데, 찹쌀이 엄마가 그 시설물이 없어질 때까지 혼자 그곳에 가서 계속 신고를 해 줬죠. 가족이 입원해 혼자 남겨진 반려견을 집으로 데려가 돌보기도 했고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렇게 선한 활동을 많이 해 온 분인 줄 알게 됐어요. 찹쌀이 엄마하고 찹쌀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2월 3일 눈이 채 녹지 않은 남양주 모란공원 민주 열사 묘역 안, 강동구반려견순찰대 '짱순 아빠'가 '초록나무 임보라'라고 적힌 비석 주위로 멀찌감치 섰다. 한 손으로는 집에서 챙겨 온 반려견 간식과 손 편지를 어루만졌다. 임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강동구반려견순찰대' 활동을 함께해 왔다는 그는 임 목사가 "선하고 정의로웠던 분"이었다며 눈물지었다. 

2월 3일 임보라 목사 1주기 추모식이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2월 3일 임보라 목사 1주기 추모식이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고 임보라 목사의 1주기를 하루 앞둔 이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란공원에 모여 추모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섬돌향린교회 교인들은 1시간 전부터 묘지 앞 가득히 놓인 꽃을 새로 갈고, 얼어붙은 길을 녹였다. 일찌감치 도착한 사람들은 임 목사가 잠든 곳을 지켜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추모식 시작 전부터 곳곳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김민지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잠긴 목소리로 추모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우리 마음의 시간은 그리 빠르지 않은 것 같다. 목사님은 내게 '왕언니'였다. 왕언니에게 전화를 하면 '네, 여보세요'라며 받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가끔 속상한 일이 있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도 '누가 그랬어요?'라며 온전히 편을 들어 주셨던 목사님이 너무 그립다"며 울음을 삼켰다. 

김민지 목사는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아름답고도 처절한 외침으로 우리의 서글픈 마음까지 따뜻이 아물게 했던 당신은, 참 예쁘고도 순박한 기적을 경험하게 하신 곱고 맑은 영의 사람이었다. 당신은 늘 우리를 환하게 비추는 보랏빛 무지개와도 같았다"면서 "봄이 찾아오지 않는 겨울은 없다. 목사님께서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당당히 나아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곁에 있는 친구들, 동지들과 흔들림 없이 따라 걷겠다"고 말했다. 

김민지 목사는 여성 목회자들에게 '왕언니'였던 임보라 목사를 떠올리며 추모사를 읽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김민지 목사는 여성 목회자들에게 '왕언니'였던 임보라 목사를 떠올리며 추모사를 읽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섬돌향린교회 교인 임승계 씨는 임보라 목사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이유를 알려 주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목사님은 언제나 숭고한 신념으로 무자비한 권력과 부정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세상은 무자비하고 냉혹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명감으로 헌신했지만 기독교 세력에 격려받기는커녕 이단으로 취급당했고, 강정 구럼비를 지키기 위해 철조망을 끊고 부대 내까지 진입해 구속됐으나 해군기지가 들어섰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임 씨는 "목사님의 사랑은 우리 가슴에 뜨겁게 깃들어 있다. 그분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면서, 보라답게 새로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자"고 말했다.

참가자 80여 명은 차례로 임 목사의 묘지 앞에 국화를 내려놓으며 그를 추모했다. 추모식 내내 슬픔을 참아 내던 이들은 끝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긴 헌화가 이어진 후 섬돌향린교회 우금환 씨는 "이제는 목사님이 하시고자 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더욱 열심히 이웃을 섬기며 살겠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 하신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기도했다. 

참가자 80여 명은 임보라 목사를 추모하며 슬픔에 잠겼다. 그가 잠든 곳에도 무지개가 가득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가자 80여 명은 임보라 목사를 추모하며 슬픔에 잠겼다. 그가 잠든 곳에도 무지개가 가득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다음 날인 2월 4일에는 '임보라 목사 1주기 기억 예배'가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예배당에는 임 목사를 기억하려는 이들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본당 자리가 부족해 예배는 다른 층 두 곳에서도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예배 전 임 목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메시지를 포스트잇에 적어 초록빛 나무에 걸었다. 임 목사의 뜻을 이어 가겠다는 다짐들이 열매처럼 가득 걸렸다. 

2월 4일 임보라 목사를 추모하는 예배가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예배는 육색 무지개 초에 불을 밝히며 시작했다. 임보라 목사와 생전 인연을 맺거나 그가 헌신해 온 분야의 활동가들이 평화·정의·사랑·생명·희망·믿음을 주제로 기도문을 읽고 초에 불을 붙였다. 무지개색 스톨을 두른 목회자들은 임보라 목사의 사진과 무지갯빛 소품들을 단상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이날 설교는 오현선 목사(한국예수교회연대)가 맡았다. 그가 "설교할 때 울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설교자로) 선택됐다"고 말하자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 목사는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버린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는 두려운 사람이었으나,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다정했고, 개신교 종교 개혁가였던 임보라 목사"를 회상했다. 울지 않겠다고 했지만, 오 목사는 중간중간 임 목사를 회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년 3월 11일 임보라 목사님 추모 문화제에서 다짐을 하나 했었다. 목사님의 이단성을 총회 차원에서 결의했던, (내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탈퇴를 반드시 마무리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달 후 열린 노회에서 발언 기회를 요청했지만, 결국 내 마이크는 켜지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을 견디던 그 순간에 '임보라 목사가 겪은 수치감은 이보다 얼마나 깊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현선 목사는 생전 그와 고인을 연결해 준 무지개색 목걸이를 만지며 동료였던 임보라 목사를 그리워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오현선 목사는 생전 그와 고인을 연결해 준 무지개색 목걸이를 만지며 동료였던 임보라 목사를 그리워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오현선 목사는 생명과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임보라 목사의 삶처럼, 서로가 연결돼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했다. 그는 "초록나무의 삶처럼, 하나님의 뜻을 일상에서 깨달아 기억하고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지만, 어디에 있든 함께임을 기억하자. 비처럼 눈처럼 서로에게 스며들어 싹과 열매를 내고, 열매 속 씨마저 소중히 여겨서 또 다른 생명으로 잇는 또 다른 '초록나무'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숲을 이뤄 가자"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예배 내내 임보라 목사를 그리워하며 숨죽여 울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가 만들고자 했던 혐오와 차별 없는 평등 세상을 이뤄 가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다함께 "초록나무의 말처럼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초록나무가 내어 준 그늘과 열매로 또 하루를 살아갈 위로를 얻은 우리가, 이제 혐오와 차별에 힘겨운 이들 곁에 서겠다"고 말했다. 자캐오 사제(대한성공회 길찾는교회), 이동환 목사(큐앤에이), 김하나 목사(섬돌향린교회), 김수산나 목사(NCCK인권센터), 김경호 목사(강남향린교회), 오현선 목사가 무지개색 꽃잎을 뿌리며 참가자들을 축복했다. 

참가자들이 적은 추모 메시지들과 임보라 목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참가자들이 적은 추모 메시지들과 임보라 목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차별과혐오없는평등세상을바라는그리스도인네트워크(그리스도인네트워크)는 임보라 목사 1주기 추모 행사를 이어 간다. 3월 8일 저녁 7시 30분에는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초록나무 임보라 이어 말하기'를 열고, 임보라 목사와 연결된 각자의 기억과 애도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네트워크는 임보라 목사가 헌신했던 생명·평화, 성 정의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한 '초록나무 추모사업회'를 운영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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