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찬성 및 동조' 혐의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재판을 받고 있는 이동환 목사(영광제일교회)가 2024년 2월 19일 한 최후진술입니다.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제게 우리 감리회의 신학과 전통은 처음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참 자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이중 예정이 아닌 선재적 은총의 교리가 좋았고, 은혜를 진실하게 추구하되 그것이 사회적 성화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희년에 대한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회심을 보며 제 가슴도 덩달아 뜨거워졌고, 더 다양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리를 어겨 영국성공회로부터 출교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꼿꼿이 지키며 '세계는 나의 교구'라 외치던 영혼에 대한 사랑이 제 영혼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지난 2019년에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서 축복식을 집례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성소수자 신자분이 계시기에 저는 매 주일 그분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저 그 마음이면 퀴어 문화 축제에 갈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라고 온전할까요. 복을 비는 사람도 복을 받는 사람도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대어 복을 빌 뿐이지요. 그 일로 2019년 9월에 고발이 되었고, 2020년부터 재판이 시작되어 2022년 10월이 돼서야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정직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참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공황장애가 생겨 지하철에서 졸도하기도 하고, 안면 마비가 와서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양 온갖 욕설과 모욕을 해 대었습니다. 정말 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맞는지, 목회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을 지내면서 제 안에서 '나한테도 이런데, 성소수자 당사자에게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교회는 왜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정된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괜찮은 집단이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은 예수님 시대부터도 있었던 일인 듯합니다. 본디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율법이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교권주의자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때 많은 약자들이 율법으로 인해 배제되었습니다. 마치 당연히 그래도 되는 존재인 양 취급하며 멸시하였지요.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그런 교권주의자들과 불화하셨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으며, 오히려 율법적으로 볼 때 부정하여 성문 밖으로 내어 쫒긴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나라의 꿈을 꾸셨습니다. 이런 모습에 분노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고요. 우리는 혹시 우리 안에 그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늘 성찰하고, 우리 안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모습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감리회의 교리 중 '기독교대한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에 보면 1번 성경 파트에서 "우리의 신학은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들을 해석하는 데 여러 유익한 방법들을 수용한다. 우리 신학의 과제는 성경 본문의 축자적 반복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단언컨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인 신학은 우리 감리회의 신학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을 파악하여 그 안에 담긴 진리를 발견해 내어 오늘에 맞도록 해석되어야 합니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성경에 나오는 노예에 대한 구절을 근거로 '성경이 노예제를 옹호한다. 노예제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노예를 당연시하는 구절이 10군데도 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노예제가 성경적이라고 말씀하실 분은 여기에 단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가 바뀌었고 아무리 성경에 나온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쓰인 구절이라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퇴행입니까. 이로 인해 기독교가 흔들리고 나라의 근간이 무너졌습니까. 아니오. 오늘날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추후 50년 후 100년 후에 지금 우리의 결정이 그 이전 노예제 옹호 때와 같이 부끄러운 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신학을 위한 지침' 4번 '이성' 파트에 보면 "계시와 이성, 신앙과 과학, 은총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을 식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믿을 수 있고 그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교리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아까 김승섭 교수님의 증언에서도 들은 바 성소수자를 고치는 일은 비과학적일뿐더러 의학적으로도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신학 지침의 내용처럼 우리 사회와 또 과학과 소통해야 합니다. 무작정 회개하라고 하면서 돌아오지 않으면 처벌의 대상이고 우리 공동체로 받아 줄 수 없다고 하는 건 결국 나가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환대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조인 존 웨슬리도 그 자신이 쓴 옥스퍼드 다이어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732년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은 보카르도 감옥에서 사역을 진행했는데 그곳에서 동성애로 유죄판결을 받은 토마스 블레어를 지지하고 사역했습니다. 당시에는 동성애가 실정법 위반이었습니다. 그런 블레어에게 웨슬리는 책을 읽어 주고, 변호사에게 연락해 주고, 법률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다른 홀리클럽 회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그를 계속 도왔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정직 2년의 기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깨달았고 배웠습니다. 성소수자가 교회 공동체에서 받게 되는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게 되었고, 함께 웃고 떠들던 성소수자 벗들이 그리스도인들의 혐오를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나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큐앤에이라는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성소수자를 위해 축복식을 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이나마 따르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지금 또다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죄인이라 여김 받던 이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성소수자와 함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위원장님, 그리고 재판위원님들. 우리 사회가 바뀌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법부의 역할이 매우 막중했습니다.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에 매몰되어 있던 사안에 대하여 그동안 진보해 온 사회적 가치에 따라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판결을 했고 그런 판결들이 쌓여 오늘날의 변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부디 이 재판이 우리 감리회에 그리고 한국교회에 그런 귀한 이정표로서 세워지는 재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에는 실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 감리회는 사회신경에 기록된 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성별, 연령, 계급, 지역, 인종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배격하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헌신하는" 신앙 공동체임을 무죄판결로써 증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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