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엄태빈 기자]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태원참사특별법)'이 1월 9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특별법을 조속히 공포·시행하라며 다시 한번 길거리로 나섰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1월 17일 오후 1시 59분, 희생자 159명의 영정을 들고 서울시청 앞 분향소에서 용산 대통령실까지 4km를 행진했다. 유가족 70여 명을 포함해 종교인·시민 등 150여 명이 함께했다.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조속히 공포되길 바라며 유가족과 종교인·시민 150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조속히 공포되길 바라며 유가족과 종교인·시민 150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행진에 앞서 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운영위원장(희생자 이주영 씨 아버지)이 침묵으로 행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정민 위원장은 "정부와 여당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며 특별조사위원회가 엄청난 권한을 가지는 것처럼 왜곡하는데, 원인 규명을 위해 잘 협조하면 아무 문제 없다. 법은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공포만 하면 된다. 이제 더 이상 정부에 할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오늘 침묵하며 행진한다. (대통령이) 부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가족이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것은 이태원 참사 100일 시민 추모 대회를 위해 당시 녹사평역에 있던 분향소에서 서울시청 광장까지 행진한 이후 두 번째다. 10·29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시민대책회의) 안지중 공동운영위원장은 "정부의 거짓된 추모를 비판하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분향소를 설치하는 날, 영정을 들고 행진했다. 유가족들은 왜 우리 가족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계속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영정을 들고 행진한다"며 이태원참사특별법을 통해 참사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대책회의 이지현 공동운영위원장도 이태원참사특별법 공포에 힘을 보탰다. 이지현 위원장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온몸으로 외쳐야만 마지못해 한 발짝 떼는 이 현실이 너무나 참담하다. 감추려는 자가 범인이다. 참사의 진실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면 여당은 특별법 공포 의견을 확정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가 특별법을 이송하는 즉시 공포해 달라.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호소했다.

유가족과 함께해 온 종교인을 대표해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상임대표 전남병 목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 목사는 "아침에 나오면서 참 서럽고 분하고 지긋지긋하더라. 내 가족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다는 가족의 외침을 어떻게 '정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개신교인들은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2000년 전 죽은 한 청년을 매주 혹은 매일 기억한다. 우리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온전한 애도가 실현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지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들과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전남병 목사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온전한 애도가 실현될 수 있을 때까지 유가족들과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전남병 목사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온전한 애도가 실현될 수 있을 때까지 유가족들과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행진 내내 비와 눈이 내렸다. 거세게 내리던 눈은 이내 비로 바뀌며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교통 통제로 길 위에 자주 멈춰 서 있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영정에 떨어지는 눈과 비를 계속해서 닦아 냈다. 주최 측에서 행진을 시작하며 나누어 준 얇은 흰 장갑이 젖어 참가자들의 손이 비치기도 했다.

눈비를 맞으며 행진한 참석자들은 약 1시간 반을 걸어 용산 대통령실 앞에 도착했다. 10·29이태원참사를기억하고행동하는그리스도인모임(그리스도인모임) 김지애 간사가 "유가족과 시민들의 요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 10월 29일,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길 바라고 있을 희생자 159명의 바람을 유가족들이 대통령에게 대신 전한다"고 외쳤다.

순서는 4대 종단(개신교·가톨릭·불교·원불교) 지도자들의 기도로 마무리됐다. 그리스도인모임 박세론 목사가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이 모습을 지켜본 모든 국민들도 이태원참사특별법이 공포되어 희생자들이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이 일상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지켜보며 159명을 모신 이 두 손을 놓지 않겠다"고 기도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영정에 떨어지는 눈과 비를 계속해서 닦아 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참가자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영정에 떨어지는 눈과 비를 계속해서 닦아 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유가족들은 특별법이 무사히 시행될 수 있도록 종교계 지도자들에게도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행진에 앞서 17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김종생 총무를 찾아 이태원참사특별법의 조속한 공포를 위해 한국교회가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희생자 김의진 씨 어머니 임현주 집사는 김 총무에게 "유가족과 시민들의 노력 끝에 겨우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제정됐지만 '누더기법'이라고 할 만큼 양보하고 포기하며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번 정권에서 이태원 참사뿐만 아니라 보게 되는 여러 불의에 대해 종교계 지도자들이 분명히 소리를 내 달라"고 호소했다.

김종생 총무는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되고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할 말이, 면목이 없다"며 "우리가 조금 거들고 있지만,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변에 함께할 분들을 모으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유가족들과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만남을 마무리하며 "최종 책임자인 윤 대통령이 다른 마음먹지 않고 다른 것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이 나라가 지켜 주지 못한 159명의 아픈 목숨들에게 사과하고 사죄하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임현주 집사는 종교계가 여러 불의에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임현주 집사는 종교계가 여러 불의에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유가족 10명이 김종생 총무뉴스앤조이 엄태빈
유가족 10명이 서울 종로5가 교회협 총무실에서 김종생 총무와 만났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아래는 침묵 행진을 나서며 유가족이 낭독한 기자회견문 전문. 

간절한 침묵으로 호소합니다
진실을 향한 희생자 159명의 호소에 응답해 주십시오

오늘 다시 159명의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 앞에 섰습니다.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이 뜨거운 햇빛에 바래고, 폭우에 색이 번지고, 혹한의 바람에 꽁꽁 얼어 버려도 버티고 버텨 낸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고 희생자들의 억울함이 풀리는 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지 1년 2개월, 광장에 분향소를 세우고 거리에 나선 지 1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유가족들은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에게 수십만 번 허리 숙여 인사했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거리만큼 걷고 또 걸었습니다. 삼보일배 행진으로 마포대교를 건너고 두 팔꿈치와 두 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찧으며 오체투지로 국회 담장을 따라 갔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을 만나 특별법 제정 지지를 목이 갈라질 때까지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태원참사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곧 정부로 이송됩니다. 특별법이 정부로 이송되면 15일 안에 대통령은 특별법을 공포하거나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여야 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특별법이 순조롭게 공포될 때까지 우리 유가족들의 눈물과 한숨은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특별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 직후부터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특별법에 대한 부정적인 언사를 반복했습니다. 여당과 정부가 주장하던 요구들을 상당 수준 반영한 특별법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지만, 특별법이 "무소불위 권한을 조사 기구에 부여한다", "총선용 정쟁 악법이다"라는 식의 정치적 수사를 앞세우며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1년이 넘도록 정부와 여당의 회피와 외면 속에서 특별법 제정을 목소리 높여 외쳐 왔던 유가족들은 받아들 일 수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정부와 여당은 우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똑똑히 들어 주십시오. 이태원참사특별법은 정쟁의 대상도, 총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법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참사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공포되고 시행되어야 하는 법일 뿐입니다. 여전히 그 날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이들은 책임 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날의 진실을 밝혀 달라 호소하고 싶어도, 그날의 억울함에 대해 절규하고 싶어도, 여기 영정 속 159명의 희생자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유가족들이 그 답답함과 억울한 심정을 대신 전하고 싶어도,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족들은 그동안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몫까지 해야 할 말이 많아 정부에, 국회에, 시민들에게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 유가족들이 하늘의 별이 된 159명 희생자들이 하고 싶어 할 말들을, 그 간절한 그 외침을, 침묵으로 무겁고 무겁게 전하고자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숙고 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국민 여론을 청취한 후에 곧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에게 재의 요구권 행사 건의 여부를 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에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가장 아프고 억울한 국민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침묵으로 절규하는 유가족들의 호소를 들어 주십시오. 자신의 죽음 뒤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 달라는 희생자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돌아온 생존자들의 숨죽인 목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10·29이태원참사특별법을 신속하게 공포하고 법에 따라 설립되는 조사 기구에 적극 협조하여 진실을 찾아 떠나는 길의 출발선에 유가족들과 나란히 서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2024. 1. 17. 

10·29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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