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1월 7일, 예수 세례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29 / 창세기 1:1-5 / 사도행전 19:1-7  / 마가복음 1:4-11

 

"나는 아침마다 샤워 물줄기를 맞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  담당 교수님의 안식년을 대신해 오신 할아버지 교수님은 이 에피소드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아, 저 얘기는 지난번에도 했는데.' 교수님의 수업 시간에는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자신의 경험을 회상한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것을 연결하여 예배학 이론으로 전개하는 교수님의 수업 방식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좋기도 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때로는 대가가 한 영역에서 평생 공부하고 쌓아 온 지식들을 함축된 '학구적 언어'의 향연으로 듣고 싶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요. 공부한 지 십수 년이 훨씬 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교수님의 '세례 에피소드'입니다. 아침마다 물을 맞으며 세례 받은 경험을 재현하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왜 그렇게 자주 스스로 당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이 이야기를 전해 주셨던 걸까요? 할아버지 교수님이 한평생 해 오신 리추얼(ritual)은 그분을 어떻게 형성해 갔길래 중단하지 않고 계속되었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물소리를 들으면, 물줄기가 떨어지는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면, 문득 그 소리도 함께 들립니다.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 소리는 물이 된 걸까요? 물이 소리가 된 걸까요? 찰나의 소리는 어떻게 인생의 길고 긴 물줄기를 타고 잊히지 않는 소리가 된 걸까요?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시 29:3)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전시된 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 출처 artnews.com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전시된 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 출처 artnews.com
요단의 물속

소리가 물이 응집된 표면 장력 위로 저항 없이 흘러 다닙니다. 소리는 이야기를 담아 간직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운동력 있게 움직여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요단강의 물 위로 도착합니다. 수많은 인생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안고, 온 유대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몰려들어요(막 1:5). 오랫동안 걸어온 인생들의 발은 이내 강가에 도착하자 조여진 샌들의 끈에서 벗어나며 잠시 고단함에서 해방됩니다. 이미 세례 터는 당도해 있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요단의 물은 기억하고 있죠.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이들의 자손들의 소리와 그들의 발들을 말이에요. 광야에서부터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가나안의 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니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요단의 강을 건넜었습니다. 물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을 만나자 한곳으로 쌓여 서서 기다렸죠(수 3:13). 물이 쌓여 있는 동안 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물은 처음으로 마른 강의 바닥을 보았답니다. 그날의 소리는 오래되었지만 어제 같고, 오늘의 들리는 소리 또한 오래되어 들립니다.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옛 소리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 시작합니다. 죄 사함을 받으라는 쩌렁쩌렁 울리는 세례 요한의 소리와 더불어, 요단의 강가는 신발 끈을 풀고 걸어 나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과거의 자신들, 차마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던 망가진 자아들, 죄악이 묻어 얼굴조차 분간할 수 없었던 거짓의 자아들로 금방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물에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물은 어두웠고 예전의 자아는 거기에서 죽음을 맛보았죠. 숨이 끊길 것 같은 아득한 물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떠나보낼 것들을 다짐합니다. 매달리고 몰입했던 대상들을 하나하나 손아귀에서 놓아주니, 물속에서 느껴지는 부력은 육신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물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새로운 숨을 들이마실 때, 마치 처음으로 호흡이란 걸 해 본 것마냥 낯설고 급한 숨을 들이켰습니다. 다음 세례를 받기 위해 신발 끈을 푸는 사람들이 보이고, 봇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는 분주함이 여전한 가운데 한 신성한 분이 물 가까이로 다가옵니다. 

사진 출처 communautesaintmartin.org
사진 출처 communautesaintmartin.org
자궁의 물속

그때는 요한이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외치던 직후였습니다. 물 가까이로 걸어오는 존재와 맞이하는 존재. 물은 다시 기억합니다. 이 두 사람은 전에도 물속에 잠겨 만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에도 예수는 물에 둘러싸여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요한을 감싸고 있던 물은 요한이 내는 기쁨으로 경쾌하게 움직였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아온 날, 마리아는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자 중에 복이 있으며 당신의 태중의 아이에도 복이 있습니다." (눅1:40-44) 자궁 속 안에 따듯하게 있던 물은 이 말을 기억합니다. 엘리사벳의 자궁 안에 있던 물도 소리를 기억합니다. 축복을 받은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를 말이에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눅 1:46-50, 공동번역)

엄마의 배 속에서 경쾌하게 움직이며 뛰노는 요한과 예수는 이렇게 물에 잠겨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요단의 강에서도 이 둘은 다시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만나 알아봅니다. 나사렛으로부터 오신 이는 겸손하게 몸을 낮춰 낙타 털옷을 입은 사람의 손을 기다립니다. 시끌벅적했던 요단의 강가는 일제히 정지되는 듯 많은 물방울의 소리로 가득해집니다. 예수의 몸이 물에 잠기자 물은 그의 몸을 감싸안으며 기억했던 노래를 들려주어요. "복이 있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감싸안은 물들은 하늘로 오릅니다. 수증기가 되어 물방울이 되어 오르고 올라 하늘 문을 열어 주어요. 물에서 올라온 예수, 씻을 필요 없는 순결하고 복된 자는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1)

클로드 드뷔시의 '물의 반영' 악보 일부분.
클로드 드뷔시의 '물의 반영' 악보 일부분.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영향을 깊이 받은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자신의 작품, '영상 Images'을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도합니다. 총 2권으로 되어 있는 Images의 첫 번째 곡에서는 '물의 반영 Reflets dans l'eau'을 묘사하지요. 마치 화폭의 풍부한 수채화 그림이 펼쳐지듯, 물이 빛에 반영되어 빛 조각이 되는 물방울들을 느끼게 하는, '보이는 소리'로서의 음악을 작곡합니다. 유려하게 흐르는 물의 소리는 무언가를 섬세하게 반영하고 시간을 잊도록 몰입하게 만들지요. 그의 친한 화가 친구들과 시인 친구들은 드뷔시가 색채적이고 몽환적인 후기 음악을 작곡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어쩌면 드뷔시 영혼이 반사체가 되어 다른 영혼을 고스란히 비추는 것을 음악으로 풀어 냈는지도 모르겠어요.

주현절과 예수 세례 주일이 지나고 듣는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드뷔시의 'Images' 중 '물의 반영 Reflets dans l'eau'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운행하시는 태초의 시간으로부터(창 1:2)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만 했던 요단의 물소리,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자궁 속 물소리를 건너 세례를 받는 예수님을 휘감은 요단의 물소리와 하늘에서 들리던 여호와의 소리까지 '물의 반영'을 보고 들어 보시지요. 저도 오랜만에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들렸을 단 샐리어스(Don Saliers) 교수님의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는 말의 물소리를 들어 봐야겠습니다. 음원은 드뷔시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2015년 베를린 기념 연주회에서 연주된 조성진의 실황과 2017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스튜디오 버전 두 가지로 골라 보았습니다. 요단의 강가에서 몸을 담그며 들어 보시지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