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12월 31일, 성탄절 후 첫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48 / 이사야 61:10-62:3 / 갈라디아서 4:4-7 / 누가복음 2:22-40

 

출산 직후 고통과 출혈 등으로 쇠약해진 산모는 아기가 태어난 40일쯤이 되면 다소 불편했던 상처가 아물고, 이젠 외출을 해도 괜찮을 회복의 상태가 됩니다. 그 시간을 산욕기라고 부르지요. 이 시기를 잘 보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기운을 얻을 수 있어요. 여느 여성들과 같이 마리아 또한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맞이했지만, 그의 40일은 어땠을까요. 베들레헴 길 위에서 아기를 낳고, 난민이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40일은 그야말로 고단한 시간이었을 거예요. 두세 시간 간격으로 젖을 물리며 부족한 잠은 짧은 틈을 타서 쪽잠으로 보충했겠지요. 추위와 배고픔이 있는 고된 육아의 삶 속에서도 아기가 오직 의지하는 것은 엄마뿐이니 엄마는 씩씩하게 아기와 더불어 자라 갑니다. 잠투정이 점점 줄어들고, 이젠 아-, 우- 같은 옹알이도 시작했어요. 새로운 풍경이나 소리에 제법 반응을 할 줄 알죠. 엄마는 아기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장가를 불러 주고 아기는 잠을 청하지요. 그렇게 시간이 차서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예루살렘의 떠들썩한 무리들 사이로 정결 예식을 하러 성전을 오르던 날이었어요.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되던 날이었지요.

아기의 눈은 새로운 것을 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맑은 눈 위로 날아가는 새가 담기고, 굽어보며 아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 정결 예식을 하러 온 또래의 다른 아기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쩌면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모르지요. 40일이 된 아기 엄마들의 공감과 연대가 불쑥 생겨 버리곤 했지요. 그때 아기 눈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가득 담깁니다.

렘브란트, '성전에 있는 시므온'. 사진 출처 wikipedia.org
렘브란트, '성전에 있는 시므온'. 사진 출처 wikipedia.org

맑은 눈이 이리저리 할아버지의 희게 세어 버린 눈썹과 주저앉은 눈꺼풀의 주름, 늘어진 귓불을 쳐다보아요. 주름 속에 숨어 있던 입이 움직이네요. 오물오물.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이제, 주님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군요, 주인이신 주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것은 노래인가요, 자장가인가요? 아니면 기도인가요, 축복인가요? 아기는 엄마 마리아가 불러 주었던 잘 때 들었던 노래를 떠올려요. 아빠 요셉이 고운 눈으로 읊조렸던 기도를 떠올려 봐요. 할아버지의 찬송은 계속되어요.

"저의 두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으니까요. 모든 백성이 보도록 마련해 두신 그 구원을.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를 주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인 그 구원을." (눅 2:29-32, 새한글성경)

어느새 아기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고, 느릿느릿한 할아버지 시므온의 노래는 성전 이곳저곳을 울립니다. 오래된 나무에 바람이 휘감기듯이 그의 목소리는 느리고 무겁게 울려요. 나지막하지만 끊기지 않고 멀리멀리 나아가요. 분명 눈물이 섞인 소리인데 슬프지 않지요. 소리가 투명한 색깔을 입을 수 있을까요? 소리는 둥실둥실 사람들의 귓가를 노크하고 방문하고 감싸안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의 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안온하게 덥히고, 시므온의 눈은 구원의 빛을 만나 보석같이 작은 빛의 어떤 광채를 내었습니다.

나는 흡족히 만족합니다

평생을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렸던 시므온에게 이날은, 주가 말씀하신 대로 평안을 얻어 놓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는 시므온에게 진정으로 평화를 선물한 것입니다. 묶여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은 이가 얻은 것은 평화이며 그것은 동시에 영원히 눈을 감을 수 있는 안도감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리워하며 찾았던 존재를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었길래, 이제 하나님께서 종을 놓아주신다고 노래했을까요? 시므온에게 있어 죽음은, 축복이자 예언의 성취인 듯 모든 것을 이룬 이가 부르는 노래에는 기쁨과 평안이 가득합니다. 모든 것을 초연한 모든 것을 다 이룬 온전함의 상태에 이른 존재. 그와 이제 겨우 40일이 된 생기를 발산하는 어린 생명의 대비와 조화가 성전 안에 가득히 공존합니다. 아기이면서 신인 존재를 보는 눈빛과 생명과 죽음이 교차되는 시간의 선들이 성전 안을 금세 우주로 만들고, 별들의 탄생과 죽음으로 빚어지는 빛은 여기저기서 반짝입니다.

"너는 야훼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인 왕관처럼 어여쁘리라." (사 62:3, 공동번역)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나는 만족합니다'. Netherlands Bach Society 유튜브 갈무리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나는 만족합니다'. Netherlands Bach Society 유튜브 갈무리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칸타타 '나는 만족합니다 Ich habe genug (BWV82)'를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합니다. 이 곡은 주님 봉헌 축일(Benedictio mulieris post partum)을 위한 곡이지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남자아이를 낳은 후 40일째 되는 날 정결 예식을 치르는데,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이 있고, 그 예배를 위해 바흐는 작곡을 하게 됩니다. 이 곡은 칸타타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합창이나 코랄의 형태를 과감하게 벗어나 있습니다. 오직 베이스의 노래(아리아와 레치타티보)만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것은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바로크 칸타타 형식입니다. 그리고 그 형식 안에 독일 경건주의의 내용을 담고 있지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 간 대립 때문에 처참하게 맞이한 30년 전쟁 그리고 기근으로 인해 독일 전역이 메마른 신앙의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거기서 작은 꽃이 피어나는데, 바로 생명력 있는 신앙을 회복하려는 경건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작은 모임들이 독일 곳곳에 일어났고, 그들은 실천적이면서 경건한 삶과 신앙의 일치를 추구하죠. 극심한 대립 속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경험. 바흐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역사에 참여한 것이고요.

물론 바흐는 경건주의가 주장하는, 수난곡 연주를 금지하거나 예배가 오직 단순한 회중 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경건주의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성찰하는 신앙은 그의 칸타타 가사에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관점을 바흐는 그의 곡에 자연스럽게 녹여 냅니다. 이는 영원한 삶으로서의 전이이자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로서의 이행을 강조하죠. 바흐의 곡들에는 종종 죽음에 대한 극도의 만족감이 드러납니다. '오라, 달콤한 죽음의 시간이여(BWV161)',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BWV478)', '평화와 기쁨으로 나아가나이다(BWV616)'나 마태 수난곡 속에서도 죽음을 가리켜 달콤한 휴식이며 안식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바흐의 죽음을 향한 관조적인 눈길은 그의 곡 곳곳에 드러나죠. 죽음으로써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상태는 세상에 없는 안식과 평안으로 가득하고, 이것은 분명 이 세상의 고통·투쟁과의 결별을 뜻하게 됩니다. 육신의 속박은 벗어지고 오직 하늘나라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성탄절 후 첫째 주일이 지난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바흐의 칸타타 '나는 만족합니다 Ich habe genug(BWV82)'입니다. 시므온의 긴 기다림이 끝이 나고, 소명을 다한 날 부르는 온전함에 이른 존재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과 그 뜻을 이룬 사람이 바라보는 죽음은 과연 뭇사람과 다르겠지요.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시므온의 목소리를 우리도 성전 안에서 함께 들어 보시지요. 우리 곁에는 고이 잠든 아기 예수와 엄마 마리아, 아버지 요셉 그리고 저기 안나 할머니도 계시네요. 숨이 멈추어야 할 곳, 음악의 종지가 비로소 일어날 곳, 글의 마침표를 넣어야 할 곳, 죽음으로 찾아오는 평안과 구원의 영광을 미리 맛보시지요. 한 해를 마감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구간에 만나는 음악, 바흐의 칸타타, '나는 만족합니다 Ich habe genug(BWV82)'를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의 연주로 들어 보시겠습니다. 

1.아리아
나는 흡족합니다
구원자, 경건한 이들의 위로와 희망이신 구세주를
내 포근한 팔로 안았습니다
나는 만족해요
난 그를 보았답니다
내 믿음이 온 마음으로 예수를 감격스럽게 안았어요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오늘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2. 레치타티보
나는 만족하답니다
내게 위로는 오직 이것뿐이지요
바로 예수가 나의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것이 되는 것
나는 믿음으로 그를 붙잡습니다
시므온과 함께, 나는 이미
저곳의 기쁜 삶이 올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 함께 시므온을 따라가도록 해요
아! 주님께서 저를 몸의 사슬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면
아! 진실로 내 자유가 곧 찾아온다면
나는 기쁨으로 세상에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3.아리아
고이 잠들거라, 너 피곤한 눈이여
부드럽게 눈꺼풀은 떨어지고 깊은 안도 속에서 감기어라
세상이여, 나는 더 이상은 여기에 없으리
진실로 나는 세상 속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라
그것이 내 영혼을 기쁘게 할 것이라
이곳에서의 비참함에 단념하여 떠나리라
하지만 거기서 나는 보리라
달콤한 평화와 고유한 안식을

4.레치타티보
나의 하나님! 언제쯤 그 소중한 단어를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 이라는 말씀을!
그러면 나는 평화롭게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대지의 흙 속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당신의 품에서 있을 거예요
나의 작별은 이제 곧 시작되니
세상이여, 부디 잘 계시오 굿 나잇!

5.아리아
나는 나의 죽음을 기다린답니다
아, 벌써 죽음이 찾아왔다면!
아직도 나를 이 땅에 묶어 놓았던
모든 절망에서 도망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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