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렘브란트,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 사진 출처 Staatliche Graphische Sammlung München
렘브란트,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 사진 출처 Staatliche Graphische Sammlung München
하늘 땅 빛 어둠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1634년 동판화입니다.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라는 작품인데, B4 용지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지만, 강렬한 명암 대비 탓에 오페라 무대가 앞에 펼쳐진 느낌도 듭니다. 예리한 침으로 동판을 긁어내고 그 위를 부식시키는 에칭 기법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훌륭한 길이 됩니다. 누가복음 2장 8-14절이 배경입니다. 일과를 마치고 어둠이 깔린 들판에 목자들이 쉬고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립니다. 렘브란트는 천사가 나타난 그 찰나를 플래시 터트리며 사진 찍듯 담아냅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시간, 지친 몸에 졸음이 쏟아지는 시간에 하늘이 열리며 강한 빛 가운데 천군 천사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이 기이한 현상에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모두 얼어붙거나 혼비백산합니다. 강한 빛이 하늘에서 비치자 환상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고, 시간은 순식간에 정지돼 버립니다. 

렘브란트는 시간을 정지시키면서 하늘과 땅을 대각선으로 갈라놓습니다. 하늘과 땅은 차원이 다릅니다, 서로 하나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하늘과 땅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건, 빛이 하나로 이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빛을 내고, 땅은 그 빛을 오롯이 수용합니다. 언덕 위 나무들이 그 빛을 강렬하게 받아 내는 탓에, 나무도 살아 움직이듯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니, 하늘과 언덕 사이에 강도 보이고, 강 건너 어렴풋이 마을도 보입니다. 그곳에서도 빛이 어슴푸레 새어 나옵니다. 하늘의 광원과 목자의 땅을 밝히는 빛과 비교하면 마을에서 나는 빛은 어떤 것도 밝히지 못할 만큼 힘이 없고, 이 사건과 동떨어진 세상으로 보입니다. 

목자에게 임한 성탄 소식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왜 하필 목자들에게 전해졌을까요? 저기 마을의 힘센 왕이나 거룩한 성전 대제사장들에게 나타났더라면 홍보 효과는 더 확실하지 않았을까요? 고위 관리나 지식인들에게 먼저 전해졌더라면? 적어도 유대교 최고법원 역할을 하던 산헤드린의 임원들에게 나타났더라면? 그들 모두 나름대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믿던 사람들입니다. 천사가 이들에게 먼저 나타났더라면 그리스도의 탄생은 극진하게 축하받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은 안정적인 삶을 사는 마을이 아니라 저 너머 예상치 못한 장소에 전해집니다. 이 소식은 잘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소식이 아닙니다. 그분의 소식은 가난하고 연약하며 기댈 곳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집니다. 그 상징이 바로 '목자'입니다. 

목자는 유대인 사회에서 천대받던 직업군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 사회에서 양은 필수 품목입니다. 고기와 옷감, 그리고 성전에 바칠 제물로 꼭 필요한 동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양을 기르자면 하루도 빠짐없는 노동이 요구됩니다. 안식일이라고 예외를 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유대인 사회에서 양은 필요하지만, 율법 중의 율법인 안식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양은 누군가 돌봐야 합니다. 그럼, 누가 돌봐야 할까요?

안식일을 안/못 지키는 목자

안식일도 지키고 양도 돌보고,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만족시킬 방법은 없을까요? 양을 기르자니 안식일을 못 지키겠고, 안식일을 지키자니 양을 못 기릅니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안식일 지키는 것보다 입에 풀칠하는 게 더 시급한 사람을 고용해 양을 맡기게 됩니다. 그들은 7일 꼬박 양에게 붙어 있어야 했고, 이것으로 일반인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목자들이지요. 그들은 안식일도 '못' 지키는, 아니 '안' 지키는 죄인, 율법을 거스르며 사는 부정한 사람으로 몰리게 됩니다. 

실제로 유대인 사회에서 목자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임금도 낮은 하층 노동계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일해야 생계가 가능한 직업군입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면서 자기들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가 팽배할수록 목자들은 이전보다 더 멸시당하게 됩니다. 유대 사회에서 목자는 믿음이 없고 부정직하고 구제받지 못할 자로 낙인찍혀 버립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목자들 스스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 이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들로 비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성탄의 복음

이처럼 힘없이 내몰린 사람에게 하늘의 빛이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난하고, 상하고, 연약하고, 버림받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이 사실을 힘주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 기댈 곳이 없습니까? 더는 희망이 없나요?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천사의 소식이 당신에게 전해집니다. 이 소식에 깜짝 놀라 얼어붙을 수도 있고, 환상으로 치부하며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입니다. 목자뿐 아니라 바로 당신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식이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달려가 확인해 봅시다! 하늘 빛이 강 건너 목자들을 비추고, 우리를 그곳으로 달리게 만듭니다. 그 빛은 마을에서 나는 희미한 빛이 아닙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