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프라도 미술관 제단화, Fra Angeloco, The Annunciation, 1435 ca., Tempera on panel, 154 × 194 cm, Museo del Prado, Madrid.산마르코 벽화, Fra Angeloco, The Annunciation, 1440-1445, frasco, 230 × 297 cm, Convent San Marco, Florence.
​산마르코 벽화, Fra Angeloco, The Annunciation, 1440-1445, frasco, 230 × 297 cm, Convent San Marco, Florence.
산마르코수도원

피렌체에 가면 산마르코수도원을 꼭 찾아갈 겁니다. 여기 가고 싶어 지도와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릅니다. 잠자리에 들어 이 건물 구석구석을 머리에 그려 보는 일이 그리도 즐거울 수 없습니다. 원래 도미니크회 탁발 수도원이지만,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꾸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늑한 수도원이라고 극찬합니다. 세상의 소유물을 포기하고 오직 기도와 경건에 모든 걸 걸었던 이들의 공간은 안토니오의 뜰을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선 2층 건물입니다. 1층 회랑 곳곳엔 메디치 가문의 수많은 문장과 도미니크수도회 출신의 고위 성직자와 성인들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 건물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누가 후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조금 게으른 보폭으로 천천히 회랑을 걸어 보렵니다. 새소리도 경건하게 들릴 것 같아요.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들이 속삭이듯 곁을 지날 겁니다. 2층의 작은 창문은 1400년대 수도사들이 기거하며 기도하던 방들입니다. 이곳엔 44개의 작은 방들이 복도 양편에 길게 이어져 있고, 방안에선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벽화가 진실하게 기도할 사람을 기다릴 겁니다. 정갈한 1층 회랑 끝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 오르면 그토록 만나고 싶던 프레스코 벽화가 기다릴 겁니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수도사들은 2층에 오를 때만 아니라 2층에서 1층 예배실과 식당에 가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그림을 지나야 했을 겁니다. 다른 대성당 벽화와 달리 이 벽화는 실물 크기에다가 눈높이에 있고, 정말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벌써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수태고지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붓을 잡지 않는다'던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0/95-1455)의 대표작 '수태고지(Annunciation)'입니다. 그림 속 천사와 여인이 서로에게 신비로이 인사합니다. 왼편 정원 나무 담장이 닫힌 것은 이 그림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상징입니다. 복음서의 설명 그대로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립니다(누가복음 1:26-38). 여유롭고 고즈넉한 건물, 정원, 현관과 창문, 회랑이 보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방금 1층 회랑에서 보았던 실제 풍경입니다. 그림은 마치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이 수도사들의 공간에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들게 합니다. 이런 장치는 수도사들의 묵상을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그림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중세 수태고지 그림을 본 일이 있다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발견할 겁니다. 우선 수태고지 그림마다 예상되는 상징물들이 있을 텐데 여기에는 없는 게 많습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백합이라든지, 아니면 경건을 상징할 성경이 마리아 무릎 위에 놓여 있다든지, 마리아를 높이기 위해 그녀가 앉은자리가 멋진 교회 건물이라든지 황금 의자라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안젤리코만 하더라도 수태고지로 남긴 대표작만 네 편인데, 산마르코수도원 작품을 제외한 다른 수태고지 그림엔 이런 장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없습니다. 산마르코수도원 벽화는 화려한 장식과 꾸밈, 그리고 상징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가장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감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묵상하게 만드는 가장 종교적인 그림입니다. 아마 이 벽화를 감상하는 주요 대상이 평신도들이었다면 성서 교육을 위해 안젤리코도 그런 상징을 그려 넣었을 겁니다. 그 증거를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안젤리코가 그린 똑같은 수태고지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프라도의 수태고지는 벽화가 아니라 교회 제단화로 제작되었는데, 거기엔 앞서 말한 상징들이 꼼꼼하게 들어 있습니다.

프라도미술관 제단화, Fra Angeloco, The Annunciation, 1435 ca., Tempera on panel, 154 × 194 cm, Museo del Prado, Madrid.
프라도미술관 제단화, Fra Angeloco, The Annunciation, 1435 ca., Tempera on panel, 154 × 194 cm, Museo del Prado, Madrid.

제단화의 중요한 기능은 평신도를 위한 성서 교육에 있지요. 프라도에 전시된 안젤리코의 작품은 그 기능에 충실합니다. 피렌체 벽화와 달리 왼편 상단 정원엔 천사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장면도 있고, 그 위엔 하늘의 성스러운 빛이 하나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그 빛은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와 함께 마리아에게 내려옵니다. 이런 요소를 꼼꼼히 그려 넣은 건 모두 성서를 읽지 못하는 평신도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프라도의 수태고지에 비해 산마르코수도원의 벽화는 단순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상징물은 생략하고 단순함만 남깁니다. 상징물이 누락된 건 벽화 속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수도사들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생략법은 오히려 장점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지나는 수도사들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이로써 기도와 묵상에 도움을 줍니다. 

겸손과 순종

벽화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합시다. 어색한 구석도 보입니다. 15세기 초기 르네상스 그림이라 그런지 원근법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마사초가 이 그림을 본다면 피식 웃었을 법합니다. 기둥과 거리를 계산해 보면 균형이 안 맞고, 건물과 공간에 비해 인물은 지나치게 큽니다. 마리아가 나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건, 수태고지의 장면이 경이로울 정도로 고요하고 엄숙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핑크 빛 감도는 옷의 천사 가브리엘의 날개는 무지갯빛 찬연합니다. 그 천사가 단아한 나무 의자에 앉은 마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몸을 굽힙니다. 서기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Θεοτόκος)'라고 선언한 이래로 중세 미술에서 마리아는 황후처럼 그려집니다. 그녀의 옷은 당시 황금보다 비싼 염료 울트라 마린의 푸른색으로 치장되고, 그녀가 앉은 의자는 주교만 앉을 수 있는 주교좌(Cathedra)나 왕후를 상징하는 황금 망토의 의자, 심지어 성체를 보관하는 제단이나 교회당이 마리아의 의자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안젤리코의 마리아의 의자를 보세요. 등받이도 없고, 장식도 없는 소박한 나무 의자입니다. 마리아는 이 벽화에서 작은 고을의 신앙심 깊은 소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평범한 여인이 하늘의 위대한 길로 사용됩니다. 수도사 안젤리코는 이 그림을 지나치는 모든 수도사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순전한 신앙인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가슴에 팔을 포개어 존경과 경건을 표합니다. 중세 수태고지 작품에 나오는 천사 모습과 참 다릅니다. 대개 천사는 백합이나 올리브를 들고 찾아옵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에게 천사가 인간에게 인사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늘의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보다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여기 그려진 천사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살짝 무릎을 굽힐 정도로 겸손과 순한 모습, 고요한 자세로 마리아 앞에 나타납니다. 천사의 옷은 이 수도원에서 입는 수도사들의 옷입니다. 그러고 보면, 천사가 취하고 있는 이 모습은 하나님 종이라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안젤리코가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도 같은 모습으로 천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동작 역시 그녀의 겸손과 복종을 뜻합니다. 마리아의 순결함은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으로 상징됩니다(Hortus Conclusus). 그녀는 왕실의 지위와 정결을 상징하는 파란색 옷을 입고 천사를 마주합니다.

하나 되게 하는 빛

2층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그림 속 기둥과 천사의 등, 마리아의 배에 따사로이 들어옵니다. 자연광과 그림 속 명암이 조화롭게 일치합니다. 건물의 기둥들은 안과 밖, 천사와 마리아 사이를 분리하지만, 빛은 모두를 하나로 연결합니다. 이로써 벽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으나 동시에 하나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세계는 우리 세상 가까이 있습니다. 이 프레스코화는 단순히 미적인 목적만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닙니다. 벽화 하단 대리석을 가로질러 새겨진 라틴어 문장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Virginis Intacte Cvm Veneris Ante Figvram Preterevndo Cave Ne Sileatvr Ave."

이는, 당신이 거룩한 동정녀 앞에 올 때마다 '아베(Ave)'라고 외치는 걸 게을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아베(Ave), 인사 또는 문안을 이르는 라틴어이지만, 공경 또는 찬미라는 뜻이 더 어울립니다. 이 짧은 문장에 이 프레스코화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앞을 지나는 수도사들에게 이 그림은 매일 기도와 찬미를 상기시킵니다. 매일 아침 2층 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이 그림을 더욱 신비롭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수도사들은 이 그림을 신비롭게 마주했을 겁니다. 거기서 이어지는 수도사들의 기도와 묵상은 땅과 하늘을 이어 주는 통로가 됩니다. 

피렌체에 갈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나중에 딸내미가 효도 관광이라도 시켜 준다고 하면 이곳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놔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늘부터라도 딸내미 앞을 지날 때마다 기도와 찬미를 소리 높여 올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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