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Rogier van der Weyden, Visitation, Museum der bildenden Künste, Leipzig.
Rogier van der Weyden, Visitation, Museum der bildenden Künste, Leipzig.

누가복음에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임신한 마리아와 그녀의 사촌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로저 반 데르 바이덴의 1445년 작품 '방문(The Visitation)'입니다. 여기 두 여인이 만납니다. 긴 여행 끝에 찾아온 사촌 마리아를 배웅하러 언덕 꼭대기 집에서 엘리사벳이 달려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가의 상상

성경에는 없는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이 그림에 숨겨 있습니다. 왼쪽 마리아가 서 있는 뒤편의 배경은 탁 트인 시골이고, 오른쪽 엘리사벳 뒤엔 언덕 위에 집이 보입니다. 시골길을 ​​가로질러 언덕까지 이르는 길이 보입니다. 이것으로 작가는 마리아가 어떤 험한 여정을 달려왔는지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을 잠깐이라도 읽어 보면 여기 만난 두 여인의 차이가 엿보입니다. 한 사람은 미혼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결혼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미혼인 마리아의 적갈색 머리는 등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결혼한 엘리사벳은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천으로 가렸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고, 1세기 유대인에게도 낯선 모습입니다. 순전히 15세기 플랑드르 지역의 오래된 풍습입니다. 화가는 자기가 살던 지역의 오랜 풍습을 성경 이야기에 덧입혀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오래된 성경의 이야기인 동시에 자기네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림에서 마리아는 완숙한 여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렸을 겁니다. 유대인의 문화를 고려하면 마리아는 고작 열두 살, 아니면 적어도 청소년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소녀였을 겁니다. 이에 비해 엘리사벳은 중년을 넘어선 주름 가득한 여인입니다. 언덕 꼭대기에는 엘리사벳과 그녀의 남편 스가랴가 살고 있는 집이 보입니다. 그 집은 성전 제사장인 스가랴의 신분을 나타내듯 언덕 위에 늠름하게 서 있고, 그 앞에 아주 작게 제사장 스가랴가 보입니다. 그 옆엔 충성과 신실함을 상징하는 개가 함께 서 있습니다. 집을 유심히 살펴보면 정문 한쪽이 열려 있어서 누구라도 환영할 것 같은 교회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리아 뒤에 펼쳐진 풍경도 퍽 정갈합니다. 잘 정돈된 밭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그런 방식으로 성서의 사건에 상상력을 동원하는 일은 일반적입니다. 풍성한 이해를 위해 반 데르 바이덴은 1500년 전 건조한 유대 구릉지를 질서 정연하고 번성했던 15세기 네덜란드 풍경으로 바꿔 놓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의미를 갖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두 여인의 만남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대목은 두 여인이 만나 서로를 축복하는 방식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임신한 상태입니다. 왼손을 뻗어 아이가 숨겨져 있음을 느끼고 축복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서로 간의 친교 속에서 사람 안에 숨겨진 귀한 존재를 상호 인식하고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림에서 엘리사벳은 살짝 구부려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앞에 있음을 인정합니다. 마리아도 엘리사벳의 몸에서 움찔거리는 아기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이 아이가 후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옷의 색감은 인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진한 군청색은 마리아의 성스러움과 정결을 상징하고, 엘리사벳의 붉은 옷감은 그의 아들이 순교할 것을 미리 보여 줍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나중에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만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의 길이 이 여인들을 통해 열립니다. 그러니 이 두 여인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현실과 운명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두 여인의 처지는 측은하기 짝이 없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빛,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게 이젠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고, 그냥 그렇게 평생 살다 갈 줄 알았습니다. 매번 사람들이 묻습니다. 

"애를 안 갖는 거야, 아니면 안 생기는 거야?" 

묻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심장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 뒤엔 언제나 '아이 못 낳는 여자'라는 복선이 깔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질문이 바뀌어 버렸죠. '애를 안 가졌던 거야, 아니면 안 생겼던 거야?' 아이가 생기자마자 사람들의 질문은 이렇게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희망을 포기한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희망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어디를 가든 자기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빛, 자기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게 점점 커지고, 그만큼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매번 이렇게 물어 옵니다. 

"너, 어쩌다 애를 가졌어?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앞날이 두렵고 막막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람 모인 곳을 자꾸만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죠. 그 누구도 사정을 이해해 주거나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소녀였기에 미혼모라는 수군거림을 감당하기엔 벅찹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한 소식은 이리도 가슴 아픈 미래의 예고편입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한 사람은 평생 가슴 졸이던 모든 짐이 과거로 넘겨졌고, 다른 한 사람은 또 다른 짐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만, 서로의 처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처지를 확인하던 순간, 이제껏 드리웠던 어두운 그늘이 두 사람 모두에게서 벗겨졌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마리아의 찬가 그리고 교회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천사를 통해 전해진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하늘의 선언이 이 만남 가운데 주어집니다. 그렇게 이 두 여인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역사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드디어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름하는 노래를 힘차게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나를 만세에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8)

그런데 이 찬송이 저에겐 마리아의 독창이 아니라 합창으로 들립니다. 마리아 같은 처지에서 냉가슴을 앓던 모든 여인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라헬, 레아, 나오미와 룻 그리고 엘리사벳의 합창이 바로 '마리아의 찬가'가 아닐까요?

누가복음 1:46 이하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한 구절씩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에는 20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 내 이웃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그 서러운 사람, 억울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고 노래합니다.

성공회 대주교인 로완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성탄과 그날의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1)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단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엘리사벳처럼, 사라처럼, 라헬과 한나, 나오미와 룻처럼 냉가슴을 앓고, 마음이 상한 자가 가장 좋은 위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장 가난한 자, 가장 마음이 상한 자, 가장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비극의 심연을 살피시고 그 어두운 곳, 포기와 절망의 늪에서 당신의 능력을 흘러넘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의 뜻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만나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용기를 얻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모임, 그리고 서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서로의 힘이 되는 만남.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 

1) 로완 윌리엄스, <삶을 선택하라>, 민경찬/손승우 역(서울: 비아, 2017),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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