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은(가명)아, 알츠하이머에 걸린 네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동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로 한 뒤, 나는 우리가 함께 겪은 일들을 여러 꼭지로 나누어 글을 쓰기로 기획했단다. 연재의 마무리로는 '나는 내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소제목을 달아 놓았지. 제목을 의문형으로 달아 놓고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마지막 제목을 그렇게 계획했을 때부터 이 연재를 '나는 내 치매를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끝내려고 했던 거 같아. 늘 구원의 소망을 말하는 신학자라는 직업 습관이 그러한 해피 엔딩을 기획하게 한 걸까?

하지만 용기가 지나쳤던 것 같아. 연재를 시작하고 이제 마감을 앞둔 게 겨우 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의 병은 그동안에도 꾸준히 진행된 거 같아. 연재를 시작할 때는 엄마가 주는 용돈도 스스로 챙길 만큼 경제관념을 갖고 계셨는데, 지금은 당신 지갑이 무엇에 쓰는 용도인지도 잊어버리셨지. 그 사이 집에 찾아오는 네 외삼촌을 할아버지는 거의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어. 주일날 외삼촌이 담임하는 교회에 가서 양복 입은 '목사 아들'을 볼 때만 자기 아들로 알아보시는 것 같아. 너도 잘 알겠지만, 요즘은 매일 밤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밖에 나가겠다고 조르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만 잠을 주무시고. 그냥 증상이 조금씩 악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 네 아빠는 혼자 외출하겠다고 우기는 할아버지를 막다가 사위인 줄 못 알아보는 할아버지에게 얼굴을 맞아 입술이 부르트고 눈 핏줄이 터지기도 했지. 그때 우리가 느꼈던 속상함은 말로 할 수도 없을 만큼 컸잖니.

원래 글쓰기란 게 말도 안 되게 굴곡진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인 거 같아. 그러니 아마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나와 우리 식구들에게 일어나는 말도 안 되게 절망적인 사건들을 그냥 날것으로 접하는 게 아니었어. 내가 글의 소재로 선택하여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한 경험과 '더 잘 살아 내고자 하는' 의미를 부여한 해석, 그리고 희망 섞인 다짐의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을 읽었던 것일 거야. 물론, 글을 쓸 때는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매끈한 글이 대중에게 공개된다고 해서, 삶까지 매끈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닌 거 같아. 조금씩 악화하는 할아버지의 증상에 나는 치매 환자와 함께 사는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생활 속에서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지. 

그러다 보니 연재의 마지막 글을 '나는 내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써 나가는 게 참 쉽지 않더구나. '나의 질병'으로서의 치매는 결국 몸과 마음, 정신이 보통의 노화 속도보다 빠르게 약해지고 망가지면서 나를 이전의 나와는 아주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정말 어려운 문제는 그냥 다른 존재로 변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변화의 방향성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기 힘든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데 있는 거 같아. 이제 할아버지는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가야 할지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잖니. 혼자 결정하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안전이나 생명마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상태에 계시는 거지. 누군가의 돌봄을 꼭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건 어린아이들의 의존성과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그렇지만 치매 환자의 의존성은 어린이처럼 개선되는 게 아니라 더욱 강화되고, 또 그 의존성이 삶의 시간보다는 죽음의 시간을 더 빠르게 재촉하고 있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고 슬퍼.  

그 점을 생각하니, 내 치매를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문제는 오로지 나에게만 달려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질병이 꼭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문제는 결국에 너를 사적으로, 또 공적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나는 내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내 고민을 너에게 미리 공유하기로 말이야. 아직 미성년인 너는 이 글을 지금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글은 글쓴이가 자기 글을 잊어버릴 정도로 약해지거나, 심지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그대로 남아 있잖아. 철학자 리쾨르 말대로 글은 "죽음을 모르는 지속성의 시간"을 갖고,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갈 다른 존재"에 의해 언젠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초역사적인 시간"을 가지니까 말이야.1) 그러니 나중에 내가 나이 칠십이 넘어 혹시나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그때 마흔 즈음에 네가 이 글을 다시 꺼내 이 엄마의 생각을 다시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때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나의 진심을 말이야. 

너에게만은 덤덤하고 의연하게 보이고 싶었지만, 엄마도 사실 많이 불안했어. 네 할아버지를 대학병원 신경과 치매(퇴행성 뇌질환) 전문의에게 처음 모시고 간 것은 동네 정신과 의원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을 드셔도 감정의 이상 증상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2) 처음 문진한 신경과 전문의 선생님은 간이 검사를 통해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치매일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뇌 촬영과 추가 검사를 통해 치매 종류를 확실히 진단하자고 했단다. 그렇게 할머니와 나는 할아버지의 병명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어. 

최종 진단을 받던 날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질문을 담당 선생님께 쏟아 내었어. 증상은 어떻게 발전하는지, 진행 속도는 어떻게 되는지, 치료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집에서 돌봄이 가능한지 등….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도 선생님은 차분하고도 친절하게 답해 주셨어. 적지 않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을 때쯤, 나는 용기를 내어 마지막 질문을 했어. 

"알츠하이머는 자녀에게 유전이 되나요?"
"아니요,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내게 의사 선생님은 아주 간단히 답해 주었어. 사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알츠하이머 의심 증상이 나타나니 뇌 정밀 검사를 더 해 보자고 했던 첫 진료일 이후 알츠하이머병의 예후에 대해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보았어. 그런데 결국에는 어느새 '알츠하이머 유전'이라는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검색하게 되더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기사에서는 부모가 알츠하이머 질병에 걸렸던 자녀에게서 그렇지 않은 자녀들에 비해 발병 비율이 높다고 했어. 아포지질단백질(ApoE4)이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게서 알츠하이머 발병률이 높다는 거야. 나는 이렇게 명백한 의학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의사 선생님이 왜 내게 유전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해. 대학 병원 교수이자 치매 전문 의료인이 유전자에 대해 모를 리 없지 않니? 짐작하건대 의사 선생님은 확률이 조금 더 높은 것일 뿐, 반드시 유전되는 것은 아니기에 내가 괜히 근심에 싸여 낙담하지 말라고 그렇게 답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야. 

그런데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의사 선생님이야 그렇다고 쳐도, 왜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제가 알아보니, 알츠하이머 유전자가 있다던데요?"라고 다시 묻지 않았는지. 나는 어릴 적부터 질문이 생기면 어떤 경우에도 묻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도 두려웠던 거 같아. 할아버지처럼 나도 언젠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릴까 봐. 

너도 잘 알듯이 나는 네 할아버지를 너무 닮았어. 얼굴 생김새뿐만 아니라 작은 체구와 체형, 심지어 내성 발톱까지 닮았지. 성격과 성질은 외모보다 더 닮아서, 할아버지가 어떠한 일로 화를 내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나는 그 생각의 흐름이나 마음 씀의 결까지 다 짐작되더라. 너도 알겠지만,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앓아 온 질병도 내게 나타났지. 그러니 네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던 날, 나는 내 미래를 함께 걱정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거야. 의사 선생님이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표정에서 이미 어떤 느낌이 있었거든. 그런데도 나는 그 순간만큼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말에 기대어 이제 막 내 삶을 삼킬 듯이 닥쳐온 큰 근심을 외면하고 싶었어. 그렇기에 진료실을 나와 네 외삼촌에게 최종 진단을 전화로 알려 주면서도, 유전에 관해서 묻지도 않은 외삼촌에게 "선생님이 알츠하이머는 유전 안 된단다셔"라는 말을 굳이 전해 준 거지. 

확률을 계산해 낼 수 있는 인지능력은 전능지全能知를 갖지 못한 인간에게 위험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기도 해. 아무리 발병률이 0.1%라고 해도, 막상 내가 걸리면 그 고통은 언제나 100%로 다가오거든. 그러나 불안을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아. 늘 거의 모든 일을 작심삼일로 끝내는 성격상 엄격한 식이요법이나 인지 훈련, 신체 운동은 언제나 그냥 계획에 머물고 있어. 그나마 내가 지금 꾸준히 하는 것은 치매 보험에 가입하여 매달 납입하고 있는 일이야. 혹시나 내게 질병이 발생한다고 해도, 형제자매 없는 네가 나를 낙후된 요양원에 보내 놓고 괜히 혼자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러니 채은아, 너무 고민하지 말고 국가가 치매 환자에게 주는 급여에 엄마가 미리 준비해 놓은 보험금을 더해 괜찮은 요양원에 보내 주라. 엄마는 그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삶을 열심히 살아 내는 새로운 공간이자 사회라고 생각할 테니. 걱정하지 마. 먹고 싸는 것도 열심히, 숨쉬기도 열심히, 사부작사부작 걷는 것도 열심히, 그래도 욕은 조금만 할 테니.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엄마를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목사가 믿음도 없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고, 한낱 자본주의 금융 상품 따위에 자기 미래를 맡겨 놨냐고 말이야. 실제로 그리스도인 중에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거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반드시 지켜 주신다'라는 믿음을 굳세게 가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있거든. 

그러나 채은아. 엄마가 네게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정말로 크더라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말로 선하고 바르게 살더라도,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이 닥쳐올 수 있어. 구약성서에는 하나님 앞에 가장 신실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손꼽히던 욥이 갑자기 닥친 재앙과 불행으로 인해 전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기 건강까지 잃는 이야기가 나와. 그러니 욥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얕은 신앙과 형편없는 인격을 갖춘 내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누군가에게 닥친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지적인 욕망이 있거든. 타인의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잘 이해해 두면, 자기 고통을 미리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사람들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인과응보'라는 도덕적 논리를 떠올려. 인류 사회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은 사실 사람들에게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하는 도덕적 당위로 작동하지. 결과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간에, 그리고 사회 안의 질서와 안정을 수월하게 만들어 내는 효과를 내고. 문제는 인과응보의 도덕을 내가 무엇을 실천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는 데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현재 처한 불행이나 고통의 원인을 그의 탓으로 돌려 비난할 때 발생해. 하나님 앞에 가장 신실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불리던 욥에게 엄청난 재앙과 불행이 닥치자, 친구들은 그에게 몰래 저지른 죄가 있지 않느냐며 돌이켜 반성하라고 비난했어. 그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꼭꼭 숨긴다고 해도 다 아시며 반드시 벌을 내리신다고 확신했던 거지. 잘못한 사람에게 벌로 고통을 내리시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한 거야. 그들은 하나님을 그의 뜻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심판'을 내리시는 절대적 존재로 숭배한 거지. 

욥은 처음에는 꽤 오랫동안 담담하게 고통을 견뎠어. 자기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전능한 하나님만의 숨겨진 뜻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친구들이 자꾸 자신의 탓을 하자 결국 하나님 앞에 원망이 터졌어. 그도 유한한 인간이니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게 왜 없겠느냐마는,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또 이웃에게 선하게 살려고 무척이나 노력해 온 사람이었거든. 그를 비난하는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지. 엄마 아빠 모두가 목사인 딸로 살고 있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야. 하나님을 잘 모르겠어"라고 솔직히 말하는 네가 이러한 이야기에 관심이 갈지 모르겠지만, 욥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불행이나 고난은 우리에게 도대체 '하나님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하는 원망 섞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해. 

다신교의 종교들은 다양한 신들 중에 악하거나 열등한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러한 신이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불행이나 고난을 발생시킨다고 설명해. 그러니까 선한 신과 악한 신이 따로 구분된 종교에서는 의인의 고난을 논리상 선한 신에게 따질 수 없는 거지. 그러나 유일신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본성을 최고의 선과 최고의 의로움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닥치는 고통이나 불행을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하기가 사실 어려워. 그나마 설명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절대자이면서도 인간에게 자유를 준 창조주인데, 인간은 그의 깊은 뜻을 저버리고 그 자유를 남용하는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다. 그러니 인간의 고통이나 불행은 죄를 저지른 인간의 탓이다"라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욥의 친구들도 결국 그러한 관점에서 욥에게 죄를 추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나도 그래서일 거야. 사실 가끔 사람들이 평생 목사로 살아온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혹시나 할아버지의 삶을 비난하거나 조롱할까 봐 두려워. 

채은아, 나는 사람의 고통 원인을 그가 저지른 죄로만 설명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낮은 단계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네가 꼭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절대자이자 전능자라면 왜 인간이 자유를 오용할 것을 미리 몰랐는가", "만약, 알고 그랬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죄짓는 것을 방조한 것인데, 그러한 신을 선한 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 질문들에 연이어 부딪힐 수밖에 없어. 또, 세상 살다 보면 진짜 나쁜 짓을 저지른 인간들이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살다 죽고, 그 후손들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되거든. 그런 이들을 놔두고 하나님이 굳이 욥과 같이 최대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에게 그렇게 매서운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면, 그러한 신은 논리상 편파적이라는 말이 되잖니? 당연히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말지.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삶 속에 닥치는 불행이나 고난을 사람이 저지를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연단하려거나 시험하려고 일부러 내리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해. 실제로 욥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가 당했던 고난은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너무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신실하고 의로운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한번 시험에 봐야 한다고 나선 사탄의 말에서 시작했단다. 이야기 후반에 욥은 결국 하나님께 원망을 터뜨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바로 사죄하면서 결국 고난받기 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지.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해피 엔딩을 위한 사전 테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가 다시 축복받아 새로운 아들들을 얻게 되지만, 그 아들들은 죽은 아들들을 결코 대신할 수 없잖니.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욥이 받았던 연단과 같은 것으로 굳게 믿고, 그 과정을 이겨 내기 위해 더 애를 쓰고 고통을 견디는 이들도 적지 않아. 그러나 이러한 설명 방식도 결국에는 "시험의 결과를 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인가"라는 질문, 즉 그의 전능함에 손상을 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하지. 심지어 "하나님은 더 큰 복을 위해 엄청난 고통을 참아 내는 인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마조히스트인가"라는 불경스럽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한 질문을 발생시켜. 교회 변증가들이 아무리 험한 세상에 자식이 잘 살아 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엄격한 가부장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져다 '고난을 기꺼이 주시는 하나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그러한 질문들의 날카로움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아.  

"하나님은 전능하다면서, 또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롭다면서, 왜 세상의 비극과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는가." 결국 앞에서 말한 비판적 질문들은 모두 이 질문 하나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어. 이 질문이야말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토록 의심 없이 신앙하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선함, 그리고 정의로움을 결정적으로 훼손할 만큼 강력한 질문이거든. 

채은아.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는 게 쉽지는 않다. 인간에게 왜 불행과 고통이 닥쳐오는지, 전능한데 선하고 정의롭기까지 하다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는 도대체 그 문제에 완벽하게 답하기가 어려워.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조금씩 명확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교는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거야. 대신에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함께 나눠 지고 고통을 멈추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삶의 종교라는 생각이 점점 들더라. 브라질의 여성신학자이자 생태신학자인 이본 게바라는 고통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탐구할 때 등장하는 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어떤 악들(evils)의 의미를 찾고자 최초의 원인을 찾는 일을 그만두기를 제안한다. 우리는 단지 사람을 위로하고, 불의와 육체적 고통과 같은 현재의 악의 뿌리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우선 없애야 하는 책임을 수용해야만 할 것이다. 행복과 관용의 경험 중의 일부가 그런 것처럼, 어떤 악들은 자주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다."3)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읽는 성서 독자로서 하나님과 사탄의 사전 모의를 알고 있지만, 욥의 관점에서는 왜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죄나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발생 원인을 당장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에게 전부 돌리는 것은 참 잔인한 일이라는 거야. 게바라가 악의 최초 원인을 찾는 일을 그만두자고 제안한 것도 세상의 악들은 다양한 사회적인 원인들과 얽혀 있기 때문에, 한두 명의 죄인을 골라내는 것만으로는 그 원인을 모두 밝히기 어려운 것투성이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기독교의 원죄론은 아담이나 하와에게 지금 우리 모두가 물들어 있는 죄의 원인을 떠넘기기 위함이 아니었던 거라고 나는 믿어. 현재 피조 세계의 고통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 모두에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공동체적 책임의 고백이 신화적 언어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나는 그리스도교의 '죄'와 '악'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학에서 창조주 하나님만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되는 것도 사실 같은 이유란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 위치에 놓고 숭배하는 일에 열을 올리지.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 자신이자 그의 아들로서 그의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죽음으로 점철되는 인간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때문이야. 과학이나 철학의 논리로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 성육신 고백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신앙神仰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전능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 전능하신 거라고. 혹은 전능하기 때문에 죄인을 심판하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능한데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죄인을 기다리며 용서하시는 거라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사랑과 기다림, 용서의 절정이라고.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모든 죄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정결하기 지키는 결벽증으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우리는 죄를 어차피 지을 수밖에 없고 벌은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이니, 절대적인 심판관 앞에 납작 엎드려 시키는 대로 복종하며 그의 관용을 간구하며 살까? 

나는 확실히 그 두 방법 모두 아니라고 너에게 말할 수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거든. 그리스도인들이란 죽기까지 인간의 고통에 참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가 보여 준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에 함께 더불어 사랑으로 살기로 다짐하며 노력하는 이들이어야 해. 정결이나 복종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핵심이 되어야 해. 

채은아. 혹시 나중에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거든, 이렇게 생각해 주라. 엄마는 잘못한 것이 분명히 적지 않을 테지만, 하나님은 그 잘못 때문에 벌을 준 게 아니야. 나중에 더 큰 복을 내리시려고 하나님이 엄마를 연단하시는 것도 아니란다. 너도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이 나를 성숙시키기 위해 네 할아버지에게 치매라는 고통을 주면서까지 나를 연단하신다거나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아. 할아버지도 하나님에게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생명일 테니. 그러니 채은아, 21세기 현대인답게 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과 의학의 몫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여 줘. 엄마는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놀랍게 늘어났지만, 인간 지식이 불균형하게 발전하여 아직까지는 뇌의 건강까지 함께 확보하지 못해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거라고 알아줘. 

물론 여전히 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들은 남아 있어. 기술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땅을 수고롭게 일궈야지만(cultivate) 생존이 가능한 인간의 문화적 존재 방식이자 도구라는 점이지. 그래서 기술은 인간을 생존하게도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권력 싸움과 착취의 원인이 되기도 해. 참 아이러니하다는 말이야. 기술 덕분에 알츠하이머의 병리적 원인을 분석하고 더 나은 치료 방법도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기술의 사용은 결국 정치와 자본의 권력을 가진 정도에 따라 접근 가능성이 현격히 달라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초래하게 되어 있어. 국적에 따라, 계층에 따라 치료받을 수 있는 정도가 확연하게 다르지 않니? 

채은아. 나는 네가 언젠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너와 네 주변의 사람들에게 닥친 고난이나 불행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길 바라.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의 원인을 따져서 책임 출처를 밝히는 것보다, 고통을 함께하며 고통으로부터 함께 벗어나는 책임을 공유하는 데에 더 초점이 가 있으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우리의 잘못 때문이라고 쉽게 치환하는 사람과 멀리하렴. 최후의 복을 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이나 시험이라고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도 의심하고. 고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부러 내리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다만,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고백하는 것이지. 

그러니 타인의 고통에 함께 가슴 아파하고 손잡아 주며, 할 수 있는 한 그 고통을 덜어 내고 막아 내는 사람이 되도록 해 보자. 나는 우리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통해 결국에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고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지. 물론 너무 어려운 일이라 나도 매번 실패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길은 그 길밖에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 고통을 함께 없애기 위해 책임을 공유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가족을 돌아보자. 우리는 할아버지의 고통을 할아버지 혼자 당하도록 놔두거나, 할머니 혼자 돌보도록 하지 않았지. 온 가족이 할아버지의 고통을 함께 나눠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니.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할아버지에게는 다행히 할아버지를 돌볼 책임을 나눠 질 아내도 있고, 자녀도 있고, 손주도 있지만, 세상에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그 책임을 전부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단다. 그래서 책임은 언제나 가족보다 큰 사회 공동체로 확대되어야 해. 21세기 사회에 그 사회 공동체는 주로 지역이나 국가 단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가족, 나아가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지역과 국가 공동체의 더 좋은 돌봄의 제도들을 만드는 일에 애를 쓸 수밖에 없어. 교회의 봉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부만으로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가 역부족이거든. 그러나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권력 다툼으로 오인하고, 돌봄을 위한 사회복지를 공산주의식 제도라고 꺼리고 있어. 

그렇다면 이제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와 볼게. '나는 나의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제 정말로 솔직해진다면, 나는 지금 당장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나는 결국 내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아. 먼저, 나는 한없이 취약해져 가며 철저하게 의존적으로 변화하게 될 내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해야겠지. 아마도 기억이 남아 있고 의식이 남아 있을 때까지 수치심과 싸우게 될 테지만, 나는 그것을 퇴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볼 거야. 아침에는 네 발로 걷다가,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게 당연한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주인공처럼, 나는 아침과 낮이 있었으니 저녁도 자연스럽게 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러나 나 혼자 그렇게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내가 나의 치매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내 고통이 너의 삶 전체를 억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돌봄 제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두껍게 만들어져야만 해.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공동체에 더 좋은 돌봄 제도와 서비스, 돌보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해. 그것이 좋든 싫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인간 나라(the City of Man)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나 가능해. 그러니 이것만은 기억해 줄래?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나라(the City of God)를 기준으로 인간 나라의 정치를 선하게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채은아. 만약에 엄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면, 드라마틱하게 치료의 방법이 개선되지 않는 한 언젠가 너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지 몰라. 아마도 너무 슬프겠지. 그러나 기억의 능력만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니. 네가 내 배 속에서 꿈틀대던 것도, 막 태어나서 새빨간 얼굴로 온몸에 힘을 주어 울던 것도, 젖을 물고 자다가 씩 한 번씩 웃어 주던 것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배 밀기를 하고 뒤집었던 것도, 두 발로 일어나 첫걸음마를 내딛던 것도, 처음으로 미끄럼틀을 혼자 타고 내려왔던 것도, 처음으로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린 날도 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잖니. 기억은 그렇게 한참 늦게 온단다. 그러니 기억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야. 내가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기억하며 너를 나의 딸로 붙잡고 살 듯이, 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될 시간을 기억하며 나를 너의 엄마로 붙잡고 살 수 있을 거야. 슬프겠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나는 기억이 사라지고 취약함이 더해질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어. 그런 나의 길을 지켜보고 기억해 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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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연재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끝)

주)

1) Paul Ricoeur, Vivants jusqu'à la mort (Paris: Seuil, 2007), p.7.
2) 치매 치료는 기본적으로 신경과가 담당하는데, 이상행동 증상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치매 진단은 두뇌 촬영과 인지 기능 검사 등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2차나 3차 병원 진료를 통해 정확히 진단되어야 한다.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치매 종류에 따라, 증상에 따라 환자의 상황을 현격히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약을 처방받을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새로운 증상 발생에 너무 좌절하지 말고 담당 의사를 찾아가 상담하기를 권한다.
3) Ivone Gebara, Out of the depths–Women’s experience of evil and salvat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2), p.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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