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김혜령 부교수가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치매 아버지'를 주제로 연재를합니다. 연재는 격주 월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작년 여름 아버지를 모시고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구립 데이케어센터(케어센터)를 방문하여 상담하던 날을 나는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배회를 우리 힘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언제라도 아버지의 실종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온 가족을 두렵게 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장 가까운 케어센터에 전화를 걸어 간단한 상담을 했는데, 당시 한참 유행이던 코로나 덕분에 빈자리가 있어 다음 날 바로 대면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관리 행정 전반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팀장이 엄마와 나, 그리고 아버지를 정말로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 자리에는 어르신들의 케어센터 등원을 위해 차량 운전을 막 마치고 돌아온 중년 남성 한 분도 함께 계셨다. 처음에 나는 그분이 운전을 담당하는 직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분이셨다. 내 선입견 탓에 요양보호사는 여성만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면서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역시 머리로 배운 지식은 이렇게 연약하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아마도 환자 가족이라면 누구나 첫 상담에서 취하는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3년, 가족끼리 치매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많이 지치고 힘들었기 때문에, 가족도 아닌 케어센터 직원들이 환자의 유별남을 정말로 잘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 가장 앞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센터가 받아 주지 않으면 다른 대안이 없기에, 환자의 유별남이 등록의 거절 사유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환자의 유별남이 얼마나 유별난지 설명해야 하면서도, 그의 유별남이 아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모순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상담에서 내가 느낀 것은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모두 우리의 '유별난 아버지'를 치매라는 질병에 걸린 많은 어르신 중 하나로 대하며 상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병환 중에 있더라도 내 아버지만은 다른 환자들과 같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첫 상담에서 복지사와 보호사가 다른 환자들과 같이 아버지의 유별남을 '일반화하는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상담 과정에서 아버지의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친절하게 인내하며 끝까지 듣고 답하는 그들의 태도와, 엄마와 나의 걱정스러운 질문들에 대해 차분하게 공감하며 답하는 그 내용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아, 이들은 치매 환자를 '직업적으로' 돌보는 '전문가들'이구나'라고 말이다. 그리고 18개월이 지난 지금 그 생각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케어센터는 구청에서 한 대학에 운영을 맡겨 운영하는 노인복지관 산하의 주·야간보호센터로서 치매 환자뿐만 아니라 뇌졸중이나 노인성 질환 등으로 '노인장기요양보호법'에 따라 인정된 장기 요양 급여 수급자 중 주로 5~3등급의 환자들을 돌본다. 주로 1~2등급의 환자들이 입소하는 시설인 요양원이나 요양병원과 달리, 케어센터는 휴일을 제외하고 하루 일정 시간을 돌보아 주는데, 주로 유치원 아이들과 같이 차량으로 아침 등원부터 하원까지 책임진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케어센터의 가족 간담회 자료에 따르면, 총 24명의 노인이 보호받고 있는 센터에는 사회복지사 2명과 요양보호사 5명, 간호조무사 1명과 조리원 1명, 야간 운전원 1명으로 총 1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노인을 돌보는 듯하지만, 행정 일과 의료, 식사 등의 업무 인력을 제외하면 실제로 요양보호사 5명이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돌아가며 노인들의 일상을 챙기고 교육까지 담당하며 돌본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 순간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로 어떠한 머뭇거림 없이 케어센터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분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특히, 돌봄 노동 자체를 주된 임무로 수행하는 요양보호사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다. 그분들께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진지하게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나는 엄마를 대신하여 가끔 아버지의 등·하원을 도울 때 마주치는 요양보호사분들을 보며 가끔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고마움이 차오르는 경우가 있다. 

물론 TV 뉴스에서는 환자를 학대한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하기 때문에, 혹자는 내게 그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는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소수가 저지르는 일탈적인 범죄 사건을 핑계로 요양보호사들 전체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견지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마주할 때 차오르는 고마움을 그저 당장 우리 가족의 힘듦을 덜어 주기 때문에 느껴지는 즉자적인 감정 반응이라고 깎아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충분히 그 고마움의 마음을 우리가 제대로 분석할 수 있으며, 그러한 분석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치매 환자의 가족은 왜 요양보호사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가? 우선 가장 단순한 이유는 요양보호사들의 돌봄 노동 서비스를 제공받는 데에 지급하는 비용이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 케어센터에서 주 5일 하루 8시간의 보호와 돌봄, 교육, 등·하원 서비스뿐만 아니라 점심과 간식까지 제공받는 비용이 월 20~3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치매 등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가구 소득에 따라 그 비용은 더 감액되거나, 심지어 무료로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치매 가족에 대한 돌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그러한 고마움은 착시 현상에서 나온 오인이라고 해야 한다. 환자의 가족이 말도 안 되는 저렴한 서비스 비용을 지불한다고 해서, 요양보호사들이 그렇게 지불된 비용 안에서만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케어센터의 운영 비용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은 치매 환자나 그 가족이 직접 납입하는 '본인 부담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가족은 겨우 20~30만 원의 '본인 부담금'을 내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케어센터로부터 받는 서비스는 150~170만 원 내외의 '주야간 보호 급여금'의 가치에 맞게 산정되어 제공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케어센터는 그 차액을 다른 방식으로 보전받아야만 지속적인 운영이 가능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 케어센터에서 저렴한 '본임 부담금'을 확인하고는 이 모든 것이 '문재인 케어'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문재인 케어'가 '국가 치매 책임제'라는 명칭으로 치매 환자와 가족에 대한 국가 지원을 확대한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순수하게 국가 재정에서 이 모든 것이 무상으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치매 환자를 위한 다양한 급여는 이미 2008년에 실행된 '노인장기요양보호법'에 따라 근로소득이나 재산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의료보험료의 0.9%에 해당하는 금액을 의무로 추가 납부하고 있는 '노인 장기 요양 보험료'에 의해 주로 지급된다. 그러니 크게 보면 국가의 사회복지 제도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민 각자가 소득에 따라 의무적으로 납입하여 예비해 두는 '국가보험'이라고 해야 옳다. 물론, 소득이 없어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국민이 있다면 정부는 국가 재정을 통해 미납한 장기 요양 보험료를 대체하는 '의료 수급제'를 보완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치매 환자를 위한 서비스들(재가, 주야간 보호, 시설)은 결과적으로 치매 등급 판정을 받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로 꼽는다. 

이러한 제도 배경에서 본다면, 센터에 20~30만 원의 저렴한 비용을 낸다고 해서 요양보호사들에게 크게 고마워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장은 제공받는 서비스에 비해 적은 비용을 납입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소득이 있는 국민으로서 계속 납입하고 있는 '장기 요양 보험료'에서 그 비용이 충분히 보전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양보호사를 국민의 '세금'으로 고용된 '국민 하인'처럼 하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인식에서 요양보호사에게 환자를 돌봐야 하는 그의 고유한 업무와 상관없는 것들을 부당하게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특히 재가 요양보호사의 경우 환자 돌봄과 상관없는 집안 허드렛일을 시키거나 심지어 성추행을 하는 일들이 적지 않게 발생해 왔다. 

분명한 것은 2008년 입법을 통해 실시된 노인 장기 요양 보험 제도는 가족의 사적 돌봄 노동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는 중증 노인성 질병자들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에 상당한 효과를 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요양보호사로 대표되는 돌봄 노동자들의 임금 저하라는 희생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인 장기 요양 보험 제도라는 보편적 복지가 시행되기 전까지, 노인을 돌보는 노동을 하던 노동자들은 근무연한에 따라 호봉이 올라가는 '연공제'에 따르는 임금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요양보호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 노인 돌봄 노동자들은 "서비스 항목별 보험 수가와 연동되는 시급제"에 적용받게 되었다.1) 실질적으로 근무연한이나 숙련 정도와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최저임금 직종으로 고정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시설에서 숙식하며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의 임금은 시간당 법정 최저임금을 밑돌기까지 한다. 이러한 임금 저하의 문제는 현재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다른 직종으로의 진입 기회를 좀처럼 갖기 힘든 고령층이 집중되는 '막다른 일자리(dead-end job)'가 되어" 가게 만들었다.2) 다행히도 올해 임금제도가 일부 개선되어 5년차부터 월 15만 원 수당을 추가로 받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돌봄 노동직에 비해 대우가 현저히 낮다. 당연히 사회적 지위도 낮다. 

그러니 '합리적으로' 접근하여, 우리가 혹여나 실제로 만나는 요양보호사의 노동 서비스 질이 그리 높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노동자 개인의 성실성이나 책임성이 결여한 탓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허은에 의하면, 2008년 우리 정부가 노인 장기 요양 보험 제도를 기획하고 실행한 근원적 목적 자체가 전통적 가족 모델의 해체로 인해 사회적 위험 요인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노인 돌봄 공백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하기 위함이었다기보다, "노인 돌봄 서비스 산업 육성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국가 경제정책 수립에 우선적으로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3) 쉽게 설명하자면, 정말로 노인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었다면,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은 저임금 구조에서 탄생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저임금 요양보호사 일자리는 계속해서 공급되었고, 정부는 공공 영역의 일자리 제공의 책임을 다했다고 자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5년간 어느 정부도 노인 돌봄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론화되어야 할 요양보호사 임금 문제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사회보험료 증액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논의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부도 정권의 위기를 자초하는 시민들의 조세 저항을 굳이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낮은 임금과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도 묵묵히 일하는 요양보호사들에게 고마움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우리가 그들에게 품어야 하는 마음은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계의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로 '본인 부담금'이나 '노인 장기 요양 보험료' 인상에 대한 강한 의지는커녕, 눈곱만큼의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국민 일반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이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부끄러움'을 저버리고, 그들이 받게 되는 낮은 임금을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으로 흘러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능력과 기술 부족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에 너무 쉽게 익숙해졌다. '누가 그 일을 강제로 시켰는가? 다른 일자리를 찾을 능력이 안 되니, 치매 환자들 수발이나 하고 사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표현의 방식이야 그렇게 과격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라고 별수는 없었다.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의법칙에 너무나 익숙하게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남들이 하기 싫은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은 시장 시스템의 공정성을 훼방하는 과도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양보호사들의 낮은 임금 문제는 불쌍하기는 해도, 미안함이나 고마움의 감정으로 다가서서는 안 되는 것으로 다시 판단이 내려진다.

그러나 나는 이내 여전히 요양보호사에 대한 나의 고마움의 감정이 여전히 정당한 것이라는 이유를 다시금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단순히 임금수준이 적절한가에 대한 관점에서 벗어나, 혹시라도 돌봄 노동자의 임금을 최고치로 높인다고 해도 그의 돌봄 노동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나는 던져 보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명시한 요양보호사라는 전문 인력이 어떠한 직무 수행으로 급여를 받는지 살펴보았다.  

표에는 요양보호사 임무로써 말벗이나 의사소통 도움 등이 '정서 지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생성형 AI와 거의 모든 대화가 갑자기 가능해진 오늘날, 이제 '말'은 주고받는 쌍방의 감정의 교류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세상이 왔다고 해도, 나는 환자의 가족으로서 치매 환자인 내 아버지를 돌보는 사람이 아버지와 말을 주고받으며 그저 필요한 의미만을 전달하는 기계적 대화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따뜻하게 말해 주고, 더 바란다면 마음을 담아 대꾸해 주길 원한다. 임금을 받는 체계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 달라고 바라는 것은 지나치지만, 그래도 직무에 굳이 '말벗'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면 나는 그이가 우리 아버지에게 '친구처럼' 재미와 진심을 담아 말을 걸어 주기를 소망한다. 단순히 말을 주고받는 일 말고도,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 드리거나 양치질을 도와줄 때도, 화장실에 동행할 때도, 나는 그가 돈 받는 만큼만 일하지 말고 마음을 진심으로 다해 주길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진심 어린 마음은 결국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때때로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고 푸념하지만, 마음을 돈으로 사는 순간 진심이 깨져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안다. 진심 어린 돌봄 행위라는 것은 그 행위의 동기가 돈을 벌겠다는 목적보다는 환자의 복지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때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설령 아무리 많은 돈을 돌봄 노동의 대가로 지불할 수 있다고 해도, 진심을 담아 주는 돌봄 행위는 임금을 위한 직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환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로 마음먹은 그의 '자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시장주의가 압도한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환자 가족들이 요양보호사의 저임금을 노동시장에서 인적 자본으로 취급받는 학력이나 능력이 부족한 탓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그저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진심의 자유를 담아 자기 가족을 정성껏 돌보아 줄 수 있는 요양보호사를 만나는 '행운'을, 아니 '요행'을 막연히 기대한다.  

그런데 그러한 요양보호사를 만나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드문 일일까? 그것이 정말로 어렵고 드문 일이라면, 우리 아버지를 돌보는 케어센터의 요양보호사분들도 그저 인생의 '막다른 일자리'에 흘러들어 온 최하위 수준의 노동자여야 했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우리 아버지가 일 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토록 '재미없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센터가 문을 닫는 토요일마저 센터에 가겠다고 우기며 가족을 괴롭히는 일을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치매란 인지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도, 감정만은 오랫동안 잃지 않는 병인데 말이다.  

왜 그럴까? 이 글을 준비하며 읽게 된 홍세영의 논문에 담긴 요양보호사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들의 대부분이 노인 돌봄 노동을 "마음의 일"로 표현하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환자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 '정으로 묶이기'가 필요하다고 했다.4) 그중에서도 한 요양보호사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치매 환자도 있고 중풍 환자도 있고 막 말기 환자도 있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하루에 열 번씩도 바꿔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서로 충돌하고… 근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돈도 벌지만은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러면 하는 일이 틀려요… 가서 일하는 거 보다 친절하고 사랑을 주는 게 가장 큰 봉사야…. 사랑을 안 주면은 할머니들이 어르신들이 더 뭐랄까 더 난폭해져요. 치매 있는 분들이 훨씬 더 난폭해져요. 그리고 눈치도 많이 보고… 이렇게 따듯하게 감싸 주고 그리고 살살 애기 다루듯이 달래 주면 말을 좀 더 잘 들어요."5) 

요양보호사의 직무 설명에는 환자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거나 마음을 줘야 한다는 말이 없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돈으로 요구하거나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돌봄 노동을 전문적 직업 영역에서 훌륭하게 수행하는 사람일수록 자발적으로 사랑이나 마음을 쏟는 이야기를 많이 풀어놓았다. 그래서 인터뷰에 참여한 요양보호사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해도, "봉사 정신 없으면"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은 혈육인 가족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는 자식이자, 부모이며, 친구의 역할을 한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세상의 많은 이가 요양보호사들이 궂은일, 더러운 일, 모욕적인 일, 반복적인 일, 하찮은 일을 맡아 하는 것을 두고 그들이 다른 일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일에 사랑을 담고,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책임을 다하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요양보호사가 적지 않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마음을 담지 않고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양보호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돌봄 노동자 스스로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가치를 모르니, 그들이 소중히 담아내는 마음을 우리 사회는 기어코 '갈아 내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은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가부장의 '아내'가 집안에서 도맡아 했던 재생산 노동들이 산업자본주의의 노동시장에서 다양한 '돌봄 노동 직업들'로 세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요양보호사는 여타의 다른 돌봄 노동 직업들에 비해 임금이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가 노인 돌봄 노동이 아이를 양육하거나 집안을 돌보는 가사 노동에 비해 산업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재생산의 가치를 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노동이란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시장 상품을 만들어 내는 생산노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가사 노동 일체를 뜻하는데, 생산노동에 부가적 노동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급으로 취급하거나 생산노동의 대가보다 훨씬 적게 그 대가가 주어졌다. 그러나 재생산 노동 중에도 집안에서 음식을 제공하거나 집안을 청소하고 의복 준비와 같은 일들은 성인 노동자가 현재의 생산노동을 극대화하는 데에 당장 이바지한다. 이에 비해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 역시 미래의 생산노동자를 키워 낸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노인 돌봄 노동은 – 노인이 더 이상 전통 농업 사회처럼 지혜를 전수하는 중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생산노동을 지탱하는 재생산 노동과 실제로는 거의 무관한 것처럼 취급받게 되었다. 이제 '요양보호사'라는 돌봄 노동은 공공 일자리를 창출하는 하나의 방법 정도로 논의되는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과거에 이윤을 창출했던 생산노동의 잔해로 남은 존재를 처리하는 '뒤치다꺼리' 노동 정도로 전락하였다. 그러니 요양보호사 자신도 자기 일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 게으르다 보면, 사회적 편견에 자신을 가두어 '남 뒤치다꺼리하다 내 인생이 끝날 것 같다'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자신이 하는 일을 겨우 치매 환자의 '수발드는 일' 정도로 한탄하는 이도, 결국 자신의 돌봄 노동을 남의 옆에서 종속적으로 시중드는 일 정도로 깎아내리기 쉽다. 그렇게 되면, 정말 남들에게 고마운 일을 하고도, 고마움을 마땅히 표현하는 사람들의 진심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게 된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이제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나이가 드는 일, 그래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일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이제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나이가 드는 일, 그래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일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얼마 전 엄마가 케어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날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난폭해서 진정시키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버지를 모시러 케어센터로 달려갔다. 엄마는 센터로 향하는 동안 이제 케어센터에서 아버지를 더 이상 돌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할까 봐 맘을 크게 졸이셨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따라 나온 요양보호사는 엄마에게 담당 의사에게 상담하면 폭력성을 다스리는 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고 했다. 며칠 뒤 엄마는 약을 받았고, 아버지는 다시 원래대로 큰 무리 없이 케어센터에 다니시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한번 아버지가 난폭하다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러나 그때 보여 준 요양보호사의 차분하면서도 전문적인 지도 덕분에, 엄마는 케어센터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자신을 쉽게 몰아넣지 않았다.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과 환자를 오랫동안 보살펴 온 경험이 '노인 돌봄 전문가' 요양보호사를 신뢰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치매 환자 가족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 '요양보호사'.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노동시장의 논리로 갈아 넣어지는 비극을 함께 멈춰야 한다. 아이를 낳는 일, 그래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이제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나이가 드는 일, 그래서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일은 어느 사람도 피할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죽는 날까지 살아 있는(Vivant jusqu'à la mort)" 존재로서 자신을, 서로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의 핵심은 돈이 아니라, 진심에 달려 있다. 그 의무에 우리가 서로 진심일 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환자의 존엄만이 아니라, 그 곁에서 더 오래 살아남으며 더 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할 우리들의 존엄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2) 

'이후 글 순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 동생아, 도와줘!
8. 나는 나의 치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주) 

1) 허은, "사회서비스 정책 결정의 트릴레마와 노인 돌봄 노동의 저임금", <산업 노동 연구>, 25권 3호, 2019, 195-238쪽, 199쪽.
2) 위의 논문, 202쪽. 
3) 위의 논문, 217쪽. 
4) 홍세영, "노인 요양 시설 요양보호사가 인식하는 돌봄 노동의 의미와 특성", <노인복지연구>, vol. 51, 2011, 165-190쪽, 174쪽.
5) 위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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