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김혜령 부교수가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치매 아버지'를 주제로 연재를합니다. 연재는 격주 월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광복을 1년 앞두고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그때 이미 할머니의 배 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기 좋은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느 집이 풍요로웠겠냐마는, 가장이 없는 아버지 집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집이 원래부터 형편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 한 지방관리의 사랑 많이 받는 수양딸로 입양된 할머니는 일제 치하 여자아이들에게는 매우 드물었던 '국민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글자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과부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평생 머리를 숙이지 않고 사셨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며 남겨 준 것이 가난밖에 없었던 할머니에게 자녀의 학자금을 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나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할머니의 가난은 더 애달팠다.

다행히 이웃 마을 교회에서 성경 학교를 열었는데 아버지 형제들은 교회를 학교인 줄 알고 다니면서 "드디어 우리도 학교에 다닌다"며 기뻐했다. 아버지 형제들은 머리가 좋았다. 특히 아버지는 욕심이 많아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전교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박정희 5·16 장학금'을 받고 학교 다녔다고 내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자랑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형적인 문과형 머리였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아버지는 조금은 심한 '기계치'였다. 우리 집에 처음 도스 컴퓨터가 들어왔던 때, 아버지는 그 앞에서 쩔쩔매었고 이내 어린 남동생의 차지가 되었다. 

기계치여서 그랬을까? 알츠하이머 진단 직후, 우리를 처음으로 당황스럽게 했던 것이 아버지의 핸드폰 사용 문제였다. 아버지에게 핸드폰이란 아무리 최신식 폰이라고 해도, 결국 전화를 걸고 받는 것에만 유용하였다. 그런데 병이 발병하자, 아버지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해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남아 있는 통화 기록을 보고는 전화하여 "아무개 장로님, 방금 전화하셨어요?" 하시기를 반복했다. 저녁에 돌아와 보면 아버지 핸드폰에 옛 교인이나 친구 목사님, 그리고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열 통도 넘게 전화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부분 상대방이 받지 않은 전화였다. 카톡도 문제였다. 도대체 무엇을 누르면 그렇게 되는지, 아버지는 정말 이상한 링크를,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가족으로서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우선 아버지로 인해 당황했을 수신자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작년, 재작년까지만 해도 함께 사회생활을 하던 분들에게 아버지가 사리 판단이 잘 안 되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가족으로서 매우 속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전화기 문제로 실랑이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났다. 아무리 설명해도 아버지는 자신이 전화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한 일을 감쪽같이 잊어버렸기에, 아버지의 억울함은 너무 쉽게 분노로 변하고는 했다. (물론 전화기가 무슨 용도인지도 모른 채 들고 다니시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랬던 모습도 그립다.)

결국 나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제1 보호자는 엄마인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맏이로서 아버지의 중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엄마가 머뭇거릴 때 '결정'을 하는 일을 맡아야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통보하다시피 한 채로 아버지 핸드폰을 몰래 내 방으로 가져와 연락처에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 둘 지워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독할 때가 있는데, 가차 없이 엄마, 나, 아들, 사위, 며느리 그리고 큰형과 동생 전화번호를 제외하고 모두 지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잘못 눌러서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모든 앱을 핸드폰 화면에서 감춰 버렸다. 아주 깨끗하고 단순하게, 아버지 핸드폰을 포맷했다.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인에게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지우는 일은 결국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아버지의 사회생활은 이제 이렇게 내 손에서 끝을 낼 수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들을 귀찮거나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존엄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모든 사회적 정체성들을 기억의 저편에 '감히' 봉인하고, 이제 가족의 일원, 그러니까 '사적인 존재'로서의 정체성이라도 지키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담이 크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보호하는 마지막 방법이라 믿은 것이다. 

지금 와서 떠올리면 그때 우리가 어떻게 버텼는지 이상하리만큼 잘 기억이 나지 않은데, 분명한 사실은 병의 진단으로 인한 합가 이후에도 아버지는 2년 정도 특별히 어디를 다니시지 않고 주로 엄마의 보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엄마와 집에 머물다가 답답하면 하루에 두세 번 혼자 공원을 산책하시거나, 아버지가 목사로 일하며 자주 다니셨던 '노회 사무실'을 산책의 터닝 포인트 삼아 걸으시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나 어떠한 놀이나 이야기도 즐길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상실한 아버지는 긴 시간의 무료함을 달랠 방법이 없어 함께 있는 엄마를 귀찮게 하다못해 심하게 집착하였다. 그렇게 엄마에게는 하루에 단 5분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게 된 것이다. 

함께 일상 시간을 정규적으로 공유하는 동료도, 친구도 아버지에게서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얕게는 슬픔에, 깊게는 공포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아버지의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때워 드려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나는 아버지와 한강 공원 산책을 다니거나, 안산 둘레길로 모시거나, 난지도 공원에 함께 올라가거나, 서울 식물원에 방문하거나, 미술관에 같이 가거나, 어쨌든 집 밖으로 아버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TV 드라마나 스포츠 중계 자체를 즐기기 위해 필수적인 이야기 이해 능력이 망가진 아버지에게는 집에서 시간을 때울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담이 돼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사적인 존재'로 가둬 둔 상태에서 시간 때우기 책임은 그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 즉 가족밖에는 대신 질 수가 없다고 믿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나는 밖으로 모시고 다니는 일에 지쳐, 인형에 '눈알' 붙이는 일과 같은, 어린 시절 동네 이웃 아주머니들이 집 한 켠에 물건을 쌓아 두고 하시던 5원짜리 아르바이트가 요즘에도 있는지 진지하게 검색해 보기까지 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에게는 단순 조작을 할 수 있는 손 기능과 노동 욕구가 꽤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주치의는 이미 아버지 정도면 치매 환자를 낮에 돌보아 주는 '노인데이케어센터'(케어센터)를 다니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케어센터는 일종의 노인 유치원처럼 센터 차량이 아침에 집 앞에서 치매 환자를 픽업하여 유치원 아동이 하원하는 오후 시간 즈음에 다시 집에 모셔다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혼자 산책하는 일이 꽤 괜찮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불편한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상당한 기능과 소통 능력이 남아 있는 아버지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형적인 치매 환자들, 그러니까 인지와 신체의 상당 기능이 손실된 노인들과 함께 뒤섞여 온종일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우리 아버지는 '그런 곳'에 갈 상태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집착이 엄마를 정말 힘들게 한 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국 구립노인복지관 케어센터에 연락하게 되었다. 간단한 전화 상담 뒤 방문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이미 아버지보다 증세가 가벼우신 분들도 '케어센터'를 다니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담당 복지사는 내가 짐작했던 케어센터의 노인들의 상태는 주로 치매 1-2등급 환자들이 24시간 생활하시는 요양원 환자들의 상태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여전히 상상이 안 갔다. 낯선 치매 노인분들 틈에 '내 아버지'가 섞여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보낸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불신은 내게 이런 질문을 건네게 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사회에서 앞장서는 활동을 하신 분인데, 출입이 통제된 데이케어센터 생활에 잘 적응하실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못 다니시겠다고 중도에 그만두신 어르신들은 안 계신가요?" 

케어센터를 책임지는 사회복지사는 아주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이 동네 케어센터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교수를 하시던 분도, 교장을 하시던 분도 계신다고. 그런데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상당히 잘 적응하신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케어센터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홍보용의 멘트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다니는 유치원과 같은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통제된 공간'에서, 고집은 세고 인지능력은 손실된 노인들이 하루 종일 저항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하고 무료할지, 나는 상상되지 않는 것을 최선을 다해 상상하며, 아버지의 케어센터 생활을 부정적으로 앞서 걱정했던 것이다. 나의 불신은 분명히 사회복지사에게 티가 많이 났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사회복지사는 정말로 직업의식을 갖고 나와 엄마의 질문들에 찬찬히 응답하며, 아버지에게도 아주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대화해 나갔다.   

그러나 의심으로 포기하기에는 이미 아버지는 엄마와 우리 가족만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상담 끝에 케어센터에 등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낮 시간에 케어센터에 감금시킨다는 마음을 지울 길이 없어서 너무 답답하고 너무 죄송하였다. 

다행히도 하는 일이 없어 늘 심심하고 답답하다던 아버지는 이제부터 케어센터로 매일 다니실 거라는 말을 듣고는, 본인이 가벼운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나 그곳에 오는 다른 노인들을 가르치는 봉사의 자리가 생긴 것이라고 여기며 즐거워하였다. 가족과의 대화 내용마저 세밀하게 파악되지 않는 아버지는 케어센터를 본인이 담임목사 하던 시절 중점을 둬서 운영하였던 '노인 대학'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그렇기에 하루, 이틀,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아버지는 "이상해, 거기서 내가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데. 사람들이 내게 일을 시키지 않아"라고 말하셨다. 나는 케어센터에서 남을 위해 일하기보다, 복지사들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만 머무는 아버지의 '무료함'을 상상하며, 다시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첫 주, 첫 달, 케어센터에서 하원하시는 아버지를 마중 나갈 때면 센터 차량에서 내리시는 아버지가 오늘은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때우시며 버티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찌릿하고 아파 왔다. 그 방법밖에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제 막 낮 시간의 작은 평안함을 얻은 엄마를 생각하며 아버지가 케어센터를 그만 다니시겠다고 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 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간의 동요는 있으나 그럭저럭 케어센터를 출석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발병 이후 핸드폰의 연락처를 지우고 아버지의 활동 반경을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 관계 안으로만 통제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회적 삶이 이제는 완전히 끝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사적인 존재로서만 살아가는 시간이 아버지에게 남았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케어센터를 다니기 시작한 아버지를 보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한 것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노인 대학 교장이나 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상상하고 케어센터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이내 돌봄을 받는 노인으로서, 그러니까 '김종용 어르신'으로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분명히 교장이나 교사로 활동할 때보다 신나거나 역동적이지 않겠지만, 아버지는 그저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수동적으로 멍하니 기다리는 존재로 머물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케어센터에서 보내 주는 생활 기록을 보면, 아버지는 거기서도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웃고, 도구 운동을 하며, 식사 후 이를 닦고, 의료 봉사자들의 마사지나 침도 맞으며 하루를 보내시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케어센터 우등생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아버지는 케어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였지만, 그 사람들을 만날 때면 집에서 나나 엄마 대하듯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복이나 어투, 행동을 신경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나나 엄마와의 사적인 관계가 주는 느슨함이나 편안함, 그리고 때때로 쉽게 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새롭게 긴장하며 지켜 내고, '체면'을 지켜 내고 있었다. 체면이란 남을 대하는 도리나 얼굴을 뜻하는데, 아버지는 새로 만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들을 대해야 하는 예의와 도덕을 매번 상기하며 사회적 자아를 다시 지켜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버지의 우울증이나 난폭성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지력 면에서도 큰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회생활이 새롭게 다시 시작되면서, 치매 환자로서의 삶의 질이 눈에 띄게 개선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케어센터에서 시간을 '때우다 오신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나아가 아버지는 불쌍하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이며, 그곳에서 새로 만난 치매 돌봄 전문인들과 동료 환자들과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며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자기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치매 환자로 살던 시절 맺었던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과 모임들이 발병과 함께 지속되기 힘든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손상된 기억과 인지력, 연약해진 신체로는 기존 사회에서 맡았던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으니, 그 역할로 맺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예 중단되거나 매우 연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로 인해 이제껏 우리는 치매 환자의 사회적 삶에 내려진 사망 선고에 너무 쉽게 순응하며, 치매 환자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로 취급해 왔다. 그렇게 그를 수치스러워하며 집안의 사적 존재로 숨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케어센터에서의 새로운 삶은 환자에게 새롭게 사회적 관계와 역할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망이 케어센터보다 많이 약화되겠지만, 요양원도 요양병원도 역시 '하나의 새로운 사회'로서 환자를 맞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즉, 인간은 죽는 날까지 사회 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사회적 존재'가 아닌 적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하나의 사회 안에만 고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일도 없다. 우리는 늘 다양한 사회들에 참여하고 이동하면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삶의 여정을 다채롭게 채워 가지 않는가. 그러한 관점에서 치매 환자는 나이 듦이 선사하는 인간의 보편적 취약함으로 인간의 돌봄이 가장 정교하게 발달한 하나의 또 다른 사회에 도달하게 된 것뿐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인간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며,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우월성을 인간의 독점적인 사회성에서 찾는 서양 전통 신학과 철학을 이제야 제대로 확인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현대 사회생물학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는 21세기의 지적 풍토에서, 이제 우리는 집단생활을 하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 종이 생존에 적합한 적절한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권력 구조를 가진 각각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대 과학의 발견은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에서 차지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던 존재론적 지위를 추락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성'이라는 협동과 연대의 존재 방식이 인간이란 종에게만 독점되지 않았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만이 사회성을 지녔다고 가르쳐 왔던 전통적인 신학과 철학의 담론이 사실은 소위 '정상적인 인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다양한 인간 존재들을 열등한 존재들로 차별하며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기능을 해 왔음도 반성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심화된 다양한 사회 갈등은 사회적 존재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인정 투쟁'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세 가지 영역에서 타자와 상호 인정을 통해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먼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원초적인 관계에서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정서적 상호 인정을 얻어야 하며, 법적 보호를 통해 사회로부터 타인과 동등한 권리를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가치나 목적을 공유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사회적 연대를 경험할 때 자신에 대한 긍지를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호네트는 "이 세 가지 인정을 통해 각 개인은 비로소 한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된다"라고 설명한다.1)

치매 환자는 소속 공동체에서 기존의 역할을 너무 쉽게 박탈당하거나 권리 침해를 당하기도 한다.
치매 환자는 소속 공동체에서 기존의 역할을 너무 쉽게 박탈당하거나 권리 침해를 당하기도 한다.

치매는 환자의 자기의식이 점차 옅어지며 결국 완전히 없어지는 병이다. 현대 의학의 발전에도 이 병을 치료하거나 병의 진행을 완전히 중단시킬 방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러한 병의 예후로 인해, 치매 진단 자체가 이미 자기의식이 상실된 것처럼 선언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매 환자들은 가치나 목적을 공유해 왔던 소속 공동체로부터 기존의 역할을 너무 쉽게 박탈당하거나, 이미 벌써 가족이 환자의 공식적 성년 후견인이 된 것처럼 법적 권리를 함부로 대리하며 그의 권리를 침해한다. 심지어 치매 진단 자체가 친구나 가족 관계로부터 단절당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환자에게 발병한 병의 의학적 진단이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리까지 박탈해 버리는 사회적 효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케어센터라는 새로운 사회는 지친 가족의 짐을 덜어 주며 가족의 사랑을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케어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우정을 쌓도록 한다. 공적 자금의 투여와 공적 감시와 관리가 이루어지는 케어센터는 사적인 존재로 집 안에 갇혀 있던 환자들을 사회적 관계 속으로 다시 불러내면서 다시금 법의 보호 아래 지낼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어센터는 보호와 돌봄이라는 목적을 공유한 공동체로서, 환자에게 '보호와 돌봄받는 자'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케어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호와 돌봄의 전문 직업인'이 되게 한다. 쉽게 말해 구성원들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는 상호부조의 연대를 통해 케어센터는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이 살아 있는 케어센터의 존재로 인해 나는 자기의식을 병리적으로 잃어 가는 치매 환자 역시 현대사회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자기의식의 인정 투쟁 한 축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자주 묻는다. 오늘은 데이케어센터에서 재밌게 지내고 오셨느냐고. 아버지는 '데이케어센터'라는 단어도 자기 입으로 발화하지 못하시고 '거기'라고 말씀하신다. 

"거기, 뭐. 맨날 똑같아. 재미없지. 가면 사람들이 잘해 주는데,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야."

투정 어린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아버지가 내일은 안 가시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아버지는 아침이면 또 옷을 챙겨 입고 "거기 가야 해. 얼른. 사람들이 기달려"라며 엄마를 재촉하신다. 심지어 케어센터가 쉬는 날인 토요일에는 '거기'를 가겠다고 우기는 아버지를 달래다 못해, 직접 운전하고 '케어센터'에 모시고 가서 문이 닫혀 있음을 확인해 드려야 할 정도로 아버지에게 케어센터를 다니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일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늘 같아서 '반복'되는 것 아니던가! 늘 똑같고 재미없고 지루한 것, 그것이 일상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그렇듯 아버지도 일상을 아주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살아 내고 있었기에 오늘 하루가 어제처럼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는 슬픔이나 불쌍함이 아니라 기대와 감사함으로 아버지의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반복적인 일상으로 '때우며 견디는' 성실함을 통해 아버지는 여전히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계시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의 전환에는 당연히 데이케어센터의 환경과 노동자들에 관한 더 나은 논의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의 글로 남겨 둔다. 

'이후 글 순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6. 가장 고마운 사람들
7. 동생아, 도와줘!
8. 나는 나의 치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주) 

1) 악셀 호네트, <인정 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 책, 20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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