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김혜령 부교수가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치매 아버지'를 주제로 연재를합니다. 연재는 격주 월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몇 학기 전부터 학교 업무가 과도하지 않은 날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이번 학기 들어서는 아침부터 진을 뺄 엄두가 나지 않아 거의 모든 날을 자동차로 출근하였다. 기말을 앞둔 12월 초가 되자 겨우 아침 스케줄이 한가해진 날이 생겼다. 오랜만에 차를 놓고 출근했기에 당연히 퇴근길은 지하철로 와야만 했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초겨울 퇴근길, 한차례 이슬비가 내려 짙어진 아스팔트 거리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10여 분 정도만 걸으면 집에 닿을 수 있기에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익숙한 거리에서 나는 머리를 푹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적으로 누군가 스치는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보니 한눈에 봐도 아버지였다. 늘 그렇듯이 두꺼운 겨울 패딩과 추리닝 바지를 입고 중절모까지 쓴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이라 특별히 둘둘 말린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정면을 응시한 채 열심히 걷고 있었다. 

"아버지!" 

다행히도 아버지가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 어디 가셔?" 몰라서 물은 질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데이케어센터(케어센터)에서 4시 반 정도 하원하시고 집에 들어오시면,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습관처럼 산책을 다녀오신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그래도 되느냐고 사람들은 묻겠지만, 감사하게도 아버지는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왕복 25분 짧은 코스의 산책길을 아직은 혼자 잘 다녀오신다. (물론 아버지가 가족 몰래 집을 나갈 수 없도록 현관문에는 카드를 대야만 열리는 치매용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으며, 집에 있는 가족은 아버지의 옷 속에 위치 추적기 앱이 깔린 핸드폰이 들어 있는지 점검한 뒤에만 문을 열어 드린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루에 한 번만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뇌의 어떤 부분이 작동을 잘 안 하면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날은 바로 전에 다녀온 산책을 잊고 다시 나가시는 날이 있다. 그날도 아버지는 그렇게 두 번째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다행히 내 목소리에 아버지는 한 번에 뒤를 돌아보고는 나를 곧장 알아보았다. 어디 가시냐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저기"라고만 말씀하셨다. 조금만 더 가면 아버지 산책의 터닝 포인트가 나오지만,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겨울 저녁을 아버지 홀로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퇴근길 피곤한 몸으로 아버지의 남은 산책길을 동행하기 싫었던 것일 수 있다. "아버지,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너무 늦었어요." 아버지는 내 말에 아주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래, 집에 가자"라며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얇은 장갑을 끼고 있는 아버지의 한 손을 잡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오해한다며 다 큰 딸의 손을 길거리에서 잡지 않던 아버지는 퇴근길로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둑해진 거리를 빠르지 않게 걷던 중에, 나는 문뜩 그 느낌이 우리 딸아이 어릴 적 손을 잡고 걷던 느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딸이 내 손을 잡고 좁은 보폭으로 아장아장 걷던 날처럼, 아버지는 느리지만 종종거리는 보폭으로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각자 제 갈 길을 재촉하며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누구에게서 오는지 모를 웅얼거림과 차 소리가 낮게 깔리는 무거운 도로를 걸으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아버지가 혹시나 손을 뿌리칠까 걱정하는 마음이 이유 없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엄마 손을 잡고 걷는 아이처럼 아버지가 편안하게 나를 믿고 걷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 나랑 이렇게 걸으니까 좋지?"
"너하고 걸으니까 좋다. 안 무서워."

어릴 적 내가 그토록 의지하던 아버지는 이제 나를 의지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 마음에 약간의 슬픔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슬픔보다는 더 큰 담담함과 평안함이 차분하게 차올랐다.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퇴행해 버린 아버지 손을 잡고 걸으며 그런 마음이 내게 차오를 수 있었을까? 

철학에서 볼 때, 개인이 경험한 일개 사건에 대한 이해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인간관이나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들을 관통하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에 바탕을 둔다. '아버지의 질병'과 '질병에 걸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하여 플라톤에 이르러 이미 그 기초가 상당히 완성된 서양 주류 전통의 존재론에서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으며 언제나 동일하게 하나로 자립해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하지만 물질을 입은 것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을 견디며 절대 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절대 변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는 관념의 세계에서만 가능했고,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라는 형이상학적 발명을 통해 그 존재를 설명해 내었다. 서양 전통의 존재론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자신은 변하거나 영향받지 않으면서도 만물의 운동에 원인이 되는 '부동의 동자'라는 개념을 추가로 얻게 되면서 물질세계의 창조와 다양한 변화마저 관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존재론은 기독교 초기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발전되면서 불변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설명(신론)과 이원론적 경향성을 띤 타락한 인간에 관한 설명(인간론)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흔히 말하듯이 고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융합을 통해 기독교 신학 뼈대가 갖춰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 전반에 기록된,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인격신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나 인간의 육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던 히브리의 영육 일체 인간관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동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 확장의 역사 끄트머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절대 불변하는 완전한 것'이라는 믿음과, 인간 존재의 본질은 정신에 있으며 육체는 열등하거나 악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추종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독교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이전부터 이미 나는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제공되는 제의와 담화들, 일체의 규범 체계나 훈육·처벌 경험, 신체적 훈련, 미학적 감각 등을 통해 그러한 믿음이나 생각을 차곡차곡 체화하고 내면화해 온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러한 이원론적 존재론과 인간관의 관점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치매라는 병으로 의존적이 되어 버린 아버지를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기거나 신의 뜻에 어긋난 저주받은 존재로 여기며 많이 원망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서양 전통의 철학과 신학 관점에서 볼 때, 절대 불변의 완전한 신과 달리 인간은 늙어 가며 의존적으로 변하는 신체와 정신력으로 인해 존재의 열등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존재이다. 그러나 치매는 자연적인 노화보다 훨씬 더 빨리 신체와 정신의 퇴행을 심각하게 가져오기 때문에, 인간 보편의 존재론적 열등성보다는 환자 개인의 특수한 존재론적 열등성을 사람들에게 더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아무 옷이나 껴입고,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하고, 가족들에게 갑자기 굽신대거나 갑자기 폭력적이며, 손을 심하게 떨거나 음식을 흘리며 먹고, 밤과 낮을 구별하지 못하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해 버린 존재'이자 남의 도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환자의 변덕스러움과 의존성에 대한 짜증은 그를 돌보는 자의 성품이 못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돌보는 사람 개인의 성품이 좋고 나쁨에 따라 표출되는 짜증의 정도는 분명히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왜 환자의 변덕스러움과 의존성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짜증을 낼 수 있는 당연한 이유로 여겨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 뒤에는 변하는 것에 대한, 의존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시의 존재론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퇴근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쇠락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정신과 신체에 대해 - 주변 사람들의 큰 걱정과 달리 – 어떻게 꽤 담담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가 취약한 인간에 대한 과한 두려움과 무시에서 한발 물러설 수 있었던 것은 – 결코 내 개인의 성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 '절대로 변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서양 전통 사상의 존재론과 신론에서 이제는 꽤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학 공부'를 겨우 목사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최소한의 통과의례로 여기거나, 신앙을 무시하고 이성에 지나치게 경도된 자유주의신학의 폐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 서구 교회가 헬레니즘을 흡수하며 만들어 낸 교리에 지나치게 메어 있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인류 지성사와의 유기적인 통섭을 통해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사유 탐구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전통'으로 불리는 교리와 신학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얼마나 혁명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신과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박제하여 그저 의심 없이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 신앙이라 착각한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야말로 나는 왜 수십 년간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친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치매'라는 병을 여전히 '불쌍함'이라는 시선 아래 깔보며, 자신은 절대 걸려서는 안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현대신학은 자유주의신학을 한 주류로 거쳐 오기는 했지만, 결코 그 아류가 아니다. 현대신학은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더불어 신의 세계 창조에 대한 21세기다운 사유를 발전시킨다.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근거로 역사를 통해 발전 혹은 퇴보하는 인간 공동체와 그 제도들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며 인간의 나라에 참여하기도 한다. 나아가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 창조 사역이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온 우주를 위한 것임을 새롭게 설명한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 기본적으로 존재론과 신론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을 다양성과 변화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주체성이 아니라 타자성으로부터 설명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신학자들은 차별받는 소수자나 약자 곁에서 함께 고통당하며 그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는 그리스도론을 펼치거나,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를 창세기 1-2장에서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여전히 계속 진행하시는 것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이 창조의 사역에 그의 피조물들의 참여를 열어 둔 개방적 존재로 설명한다. 또한 정신과 육체, 선과 악으로 확고히 나뉠 수 없는 지점에서 생명과 삶의 신비를 전제하는 창조 신앙을 펼쳐 나간다. 

변화 가능성과 취약성, 그리고 관계성(의존성)에서 다시 쓰는 현대신학의 존재론과 신론 위에서 치매 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저주받거나 열등한 존재로 해석될 수 없다.
변화 가능성과 취약성, 그리고 관계성(의존성)에서 다시 쓰는 현대신학의 존재론과 신론 위에서 치매 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저주받거나 열등한 존재로 해석될 수 없다.

현대신학의 광범위한 발전 속에서 하나님은 '절대 불변의 완전하고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상호의존관계 속에 자신을 놓으신 존재, 그래서 상처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가 되기를 피하지 않으신 분으로 자주 설명된다. 물론, 이는 보기에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능성을 포기하는 불경한 작업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대신학의 경향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관한 제1의 설명이 전능성이 아니라 사랑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사랑은 히브리인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배신당하시며 다시 희망을 걸기를 반복하는 구약의 하나님과,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여느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던 성육신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의 나라에서 하나님나라의 원칙으로 고군분투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령의 사역에서 언제나 동기이자 목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변화 가능성과 취약성, 그리고 관계성(의존성)에서 다시 쓰는 현대신학의 존재론과 신론 위에서 치매 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저주받거나 열등한 존재로 해석될 수 없다. 그는 '죽음만을 남겨 둔 절망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존재'로서 날마다 취약하게 변해 가는 그의 몸과 정신이 그에게는 의존 속에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주고, 타인에게는 돌봄을 제공하며 의존할 수 있는 축복을 준다. 그렇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도 나의 손을 잡고 무섭지 않았지만, 나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 세상에 우쭐대지 않을 수 있었다. 

현대 철학자 가트린느 말라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자본주의사회가 치매 환자를 '존재 역량'이 축소되거나 상실된 것처럼 취급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비판해 낸다. 말라부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나 시장의 '회복력'과 '탄력성', 생산의 '창조성' 등과 같은 자본주의사회만의 특수한 현상들을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오인하게 하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교묘히 펼쳐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외부적 요인으로 변화하는 물질이나 생명 현상'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는 과학 용어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말이 '회복력'이나 '탄력성'과 같은 단어와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뇌 과학에서는 신경 기관의 능력이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뇌세포와 뇌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화학물질의 영향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가소성'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은 손상된 뇌의 기능이 학습이나 약물로 증강되거나 탄력적으로 회복되는 경우를 과도하게 낙관하는 연구를 진행하며 의료 상업화에 치중한다. 

그러나 인간 뇌의 가소성을 회복성이나 탄력성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자본주의의 상황 속에서, 말라부는 이전의 상태로 뇌 기능이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노동시장에서 낙오된 실업자들이나 기초 생활 수급자처럼 사회적 요구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존재할 수 없는 '존재 역량'이 자연적으로 손실된 존재로 취급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혹자는 뇌의 기능이 손실되어 자기 존재를 사회적으로 제대로 펼칠 수 없는 것이 알츠하이머 환자가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태가 아닌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인격과 신체 능력의 급격한 퇴화를 겪는 환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활동하는 존재로 대접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의 위대함은 같은 현실을 다르게 명명함으로써 새롭게 실천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데 있다. 말라부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는 오늘날 학습 증강이나 회복력, 탄력성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가소성'이라는 말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치매 환자는 "오히려 기존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완전히 낯선 사람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파괴적 가소성(destructive plasticity)'이라는 새로운 말을 붙였다.1)

그러나 그가 이를 '파괴적'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알츠하이머 환자의 정체성 변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포스트 휴먼의 도래를 내다보며 알츠하이머 환자가 이전의 자기를 파괴하는 대신, 인공 기기나 장비와 더불어 새롭게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해 나갈 수도 있음을 희망적으로 내다보았다. 

물론 아직까지 알츠하이머 환자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할 만한 인공 기기나 장비가 발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증세에 따라 주치의가 처방해 주는 약을 복용하며 변화하는 아버지의 인격과 신체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중이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정신과 육체의 상태 속에서 자기를 파괴하고 매일 낯선 존재로 나타나는 아버지는 당신을 돌보는 엄마와 나, 가족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이제 그는 어제는 아들을 알아봤는데 오늘은 아들을 몰라보는 존재가 되었다가, 내일은 다시 알아볼 수도 있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아침에는 나를 이쁜 딸이라고 했다가 점심에는 나쁜 애라고 했다가, 저녁에는 다시 자기 때문에 고생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변화가 우연한 투쟁 속에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또 그 변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변화가 우연한 투쟁 속에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또 그 변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며 치매 환자와 더불어 살 수 있을까? 생성과 변화의 철학자로 불린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처럼 "만물은 끊임없이 투쟁하며 변한다"는 말에 의지하며 환자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변화의 무한성과 투쟁에 관점에서 만물의 원리를 이해하는 유물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는 물질 변화의 작용 원인은 있지만, 그 변화가 지시하는 궁극적 의미를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치매 환자가 보여 주는 자기 파괴적으로 변화하는 정체성에 대해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변화가 우연한 투쟁 속에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또 그 변화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믿는다. 시작과 끝 사이의 과정으로서 만물을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이해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 취약성과 관계성(의존성)을 인정하며,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삶의 기본적 기능과 활동을 수행할 수 없는 치매 환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돌봄을 통해 그를 만나게 될 타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들의 가치를 완전성이나 생산성의 측면에서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도록 하는 지혜를 선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을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돌보는 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이 있다. 많은 경우 환자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배우자로서' 온전했던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는 능력을 꼽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나를 키워 냈는지, 어떻게 나와 함께 살았는지 잊지 않는다면 그를 돌볼 수 있는 인내가 조금은 더 생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에 기대어 돌봄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환자나 돌보는 가족이나 모두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존재로 각인된 사람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래서 돌보는 이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억력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휴머니즘 자체도 타인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지만, 나는 기독교 신앙이 주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 더 많은 기대를 한다. 그것은 내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마지막 날 그는 내가 이제까지 경험하고 현재 대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너머 새 사람으로 나를 만날 것이라는 희망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부활이 없다고 의심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 12:24-25) 

부활에 대한 소망의 상상력은 점괘를 읽어 주는 이처럼 그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천사처럼' 내 모든 상상력 너머로 가장 '그/녀답게' 변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을 피워 낼 수 있다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가는 지금, 이 순간을 참담한 절망보다는 궁극적 소망으로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이 엄청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나를 속이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부활의 상상을 통해 적어도 담담하고 평안하게 이 길을 가고 있다. 비록 자주 넘어지지만.  

'이후 글 순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8. 나는 나의 치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주)

1) 박일준, "인권에서 존재 역량으로 – 가소성을 통해 성찰하는 공-산(sympoiesis)의 의미와 카트린느 말라부의 '파괴적 가소성'에 대한 종교철학적 성찰", <종교 연구>, 81집 2호, 315-350쪽, 318쪽. 카트린느 말라부와 관련된 내용은 위의 논문에서 거의 모든 내용을 배웠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