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감동적인 스토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기도하는 손'(1508). 이 그림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작품만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작품도 드물 겁니다. 원래 명작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가산점이 붙은 건 감동적인 설화 때문일 겁니다. 인터넷에 이 작품의 유래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가 떠도는데 대개 이렇습니다. 

뒤러와 그의 친구 프란츠 크닉슈타인은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태생적으로 가난했다. 그래서 한 명이 고향에서 일과 기도를 하며 지원할 동안 다른 한 명이 학업 과정을 밟고, 성공한 후 돌아온 뒤에는 서로 역할을 바꾸기로 굳게 약속했다. (어떤 버전에 따르면, 그러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했다.) 퍽 오랜 후, 뒤러가 대성하고 귀향하여 자신을 후원해 온 친구 프란츠의 집을 찾아가 유리창을 들여다보니 그날도 친구 프란츠가 노동으로 거칠어진 두 손을 모아 친구의 성공을 빌고 있었다. 뭉클한 감동에 눈물이 솟구친 뒤러가 "자, 이젠 네가 공부하러 갈 차례야"라고 말했지만, 프란츠는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노동을 하다 보니 그림 솜씨도 많이 줄고 손도 거칠어졌다. 이제 새삼 공부를 해선 뭘 하나? 다만 네가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련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말에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프란츠의 기도하는 거친 손을 길이 기념하려고 이 그림을 제작했다.

어떤가요? 꽤 감동적이지 않나요? 교회 부흥회나 설교 시간에 등장하는 예화 단골 메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근거 없이 가공되고 조작된 엉성한 설화입니다. 역사적으로, 뒤러의 가정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성공한 금세공업자였고, 아버지는 당시 최고의 벤처 사업으로 유망한 인쇄소를 독일에만 24개나 경영하고 있을 만큼 대사업가였습니다. 그런 부잣집 아들이 학비를 댈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이런 가짜 역사가 진짜마냥 위세를 떨치는 건, '기도하는 손'이라고 제목 붙은 이 작품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꾸며 낸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16세기 독일의 3대 화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뒤러는 분명히 가난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기도하는 손과 뒤러

'기도하는 손'은 프랑크푸르트 귀족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원래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성당의 제단화(Triptychon)를 만들기 위해 그려진 여러 장의 밑그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제단화가 1614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왕가에 팔린 후 1729년 뮌헨 궁전 화재로 전소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작품인지도 알 길이 없고, 그저 세 폭 제단화였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입니다. 제단화 전체 내용은 천국과 성인들을 그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제작하는데 총 18장의 밑그림이 사용되었고, 그중 9장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하튼, '기도하는 손'의 주인공은 뒤러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손에 옹이 박힌 친구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이 손은 '사도의 손'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모델은 뒤러 자신의 손입니다. 작품을 잘 관찰해 보세요. 저 손은 절대로 노동하는 손이 아니에요. 손목에 살짝 보이는 옷매무새도 노동자의 것이라고 볼 수 없어요. 뒤러의 손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1504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첨부한 뒤러 자화상의 손을 보라!)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천재 뒤러

뒤러의 기도하는 손을 뒷조사하다가 새로 알게 된 것이 참 많습니다. 그림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뒤러라는 인물이에요. 이분은 정말 연구 대상이에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천재들이 몇 명 있긴 한데, 이 형님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19살 형뻘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도나 될까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를 능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뒤러는 그림이나 판화를 예술의 경지로 올렸다는 평판에 머무를 만큼 단순한 미술인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회화 이론을 배워 알프스 이북(독일, 네덜란드 등)에 전파한 인물이었고, 후에는 예술 이론가로, 길드 조직의 관행을 깨뜨린 개혁자로, 실용 수학과 응용 기하학의 선도 주자로 자리매김한 인물입니다. 오죽하면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1605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행성의 완전한 궤도는 뒤러가 그의 책에서 '달걀모양'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타원이다. 아주 정확히 일치한다"라며 기함했을까요? 게다가 투시도를 이용한 계측 기법을 인체와 건축에 적용한 이론서를 출판하기도 한 아주 특이한 이력의 천재입니다.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뒤러는 세계 최초의 풍경화 화가로도 꼽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자연 풍경만을 그린 순수 풍경화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사에서는 1490년 뒤러의 풍경화를 두고 예술 이념의 근본적 전환이자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인물이 나오지 않는 풍경화의 등장은 곧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대선언과 같아서 뒤러가 바로 이런 세계관의 전환을 시작했다는 평가입니다. 

속어와 개혁

뒤러가 인생 후반부로 가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었고, 루터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지지자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루터와 직접 만나지 않았지만, 서신 교환을 하면서 루터가 책을 쓰기도 전에 미리 선금을 지불하고 책을 정기 구독했다는 이야기, 루터를 만나면 꼭 그의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고 장담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뒤러를 뒤적거리다가 매료된 지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시대상과 관련이 있어요. 요즘은 맛집이라고 하면 기자들이 벌집 쑤시듯이 찾아가서 취재하지만, 결정적인 요리 비법이나 양념의 비밀 같은 건 '며느리도 안 알려 준다'면서 숨기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뒤러가 살던 16세기는 더 했습니다. 예술가든 건축가든 자기들만의 길드를 조직해서 기술 비법을 내부에서만 공유했는데, 그 기술들을 누설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예를 들면 15세기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델피오레성당 건축도 그래요. 이 성당의 돔 모양 지붕은 당시 일반적인 건축 기술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보기 좋게 건축해 버립니다. 여기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각종 신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브루넬레스키만의 비법이었고,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사적인 메모도 자기만 판독할 수 있는 암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비밀주의로 유명한 사람이 또 한 명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예요.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비밀에 부치는 일은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러가 깨뜨립니다. 어떻게? 그는 당시 지식과 권력의 상징이던 라틴어를 한마디도 배워 본 일이 없었던 '무식쟁이'(자기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였지만, 모국어지만 속된 언어라고 천시하던 독일어를 사용해 그때까지 비밀에 붙여진 회화, 건축, 투시, 수학, 측정 등등의 이론서를 펴내기 시작합니다.1)

이게 무서운 거예요. 왜냐하면 당시에 라틴어가 아닌 속어俗語를 사용하는 건 자기 자신을 무식쟁이로 드러내는 용감무쌍한(?) 일로 꼽혔는데, 독일어라는 그 천한 평민의 언어로 권력 사회 지식 보따리를 찢어 버린 겁니다. 이런 일을 했던 비슷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예요. 그도 독일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독일어를 무기로 개혁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의 독일어 신약성서 번역(1521)이 그래서 유명합니다. 뒤러와 루터가 코드가 맞아서일까요? 둘은 서로 다른 개혁의 마차에 올라선 마부로 역사에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두 손 모은 교회

역사를 공부해 보면 참 묘합니다. 권력자들이 소유한 독점적 지위가 허망하게 무너질 때 보면, 가장 천하고 약하다며 거들떠보지 않던 것 때문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탱탱하게 부푼 풍선에 바늘 하나 톡 찌르면 금세 바람 빠지는 것과 같아요. 그 단단하던 중세의 벽을 무너뜨린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그 천한 '속어'였다는 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위대한 역설입니다. 우리가 속되다고 하는 것, 약하다고 깔보는 것이 실은 가장 강한 무기가 되곤 합니다. 국가의 역사나 사회 체계, 그리고 교회의 흥망성쇠도 비슷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속되다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쉼터이고, 안전 공간입니다. 이들을 우습게 여기다가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반대로 이들의 삶을 다독이며 손잡아 일으키고, 이런 세계를 소망하며 기도하며 두 손 모을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가 되고, 그토록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손' 이야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주)

1)  참조. 야마모토 요시타카, 남윤호 역, <16세기 문화혁명> (서울: 동아시아 출판사, 2010), 8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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