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며

그림, 좋아하시나요? 최근 우리나라에 미술 애호가들이 급증한 것 같습니다. 해외 유명 작가 미술전 매진 사례는 이제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도 최근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 작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해서 갔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가 몰렸더군요. 입구부터 빼곡히 선 줄을 기다려 전시실 안에 들어갔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출근 시간 지하철마냥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작품 앞에 서서 뭔가를 골똘히 관찰하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그리도 진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도 인파에 휩쓸려 그림 앞을 이리저리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걸까?' 

2001년 리자 스미스(Lisa F. Smith)와 제프리 스미스(Jeffrey K. Smith) 교수가 매우 흥미로운 연구 보고서(Spending Time on Art)를 제출한 일이 있습니다. 미술 전문가들이 보기에 미술관 방문객들이 미술 작품을 건성으로 감상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런 생각의 진위를 실증적으로 살핀 실험 연구였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관람객 150명이 6개의 걸작 앞에 멈춰 서는 시간을 계산했다고 합니다.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을 얼마나 집중해서 관람했을까요? 한 작품당 평균 시간은 17초였다고 합니다. 그림 밑에 붙은 작품명과 설명을 읽는 시간까지 포함된 것이니 실제 감상 시간은 고작 10초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라고 다를까요? 한 가지는 확실해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찾아 감상하지만, 그림 안에 담긴 표현과 의미들을 충분히 보지는 않습니다. 

여행은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림도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말은 '거의' 진리입니다. 소위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색채나 구도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엔 작가가 살던 사회와 정치, 경제적 맥락도 담겨 있고, 때로는 시대를 넘어서는 예언자적 메시지도 숨겨 있습니다. 특별히 근대 이전 서양 역사는 교회와 관련이 깊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쇠퇴, 갈등의 시간 안에서 작가들은 저마다 새로운 시각으로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림 감상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도상(iconography)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도상이란 곧 그림 안에 담긴 상징들을 읽어 내는 작업입니다. 종교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처럼 그림 안에 담긴 요소들을 읽어 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예술 작품의 도상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은 미술사학 분야입니다. 한국에도 명화를 소개하는 미술사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풍성한 설명을 들을 때마다 드는 바람이 하나 있습니다. 저 그림으로 신학자가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서양미술은 교회 역사와 연결되어 있으니 교회사와 교의학자들이라면 미술사학자들과 달리 좀 더 독특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그림 안에 담긴 도상을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 그때 거기서의 신앙과 오늘 우리의 신앙을 겹쳐 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아는 한 그림의 힘은 빼곡한 글씨로 질식시키는 신학 논문이나 설교보다 강합니다. 그림 한 장에 담긴 역사, 신학, 인생 이야기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그림의 힘입니다. 

저는 미술사학자가 아닙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취미 수준에서 그림으로 신학과 교회 역사를 설명하는 걸 좋아할 뿐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글을 연재합니다. 기획대로라면 앞으로 열두 편의 글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목사이다 보니 다른 작품은 언감생심이고, 기독교 관련 작품만 몇 개 소개하려고 합니다. 거기 담긴 도상을 찬찬히 읽다 보면, 다른 기독교 명화도 최소 17초 이상은 감상하며 즐길 수 있게 될 겁니다. 

게리 멜쳐스(Gari Melchers, 1860~1932)의 '설교'. 사진 출처 wikimedia.org
게리 멜쳐스(Gari Melchers, 1860~1932)의 '설교'. 사진 출처 wikimedia.org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앞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과 함께 도상을 언급했는데, 그 시작으로 1886년 미국 화가 게리 멜쳐스의 그림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목은 '설교(The Sermon)'입니다. 그림은 19세기 미국 청교도 예배 시간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설교'라는 제목이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도 낯설지 않지요. 우선 구석구석 살펴봅시다. 눈에 들어오는 게 많습니다.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로 좌석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미국에 남녀평등 문화가 정착하지 않았다는 게 보입니다. 남자 앞에 펼쳐진 성경으로 보아 설교 본문이 모세오경 어디쯤 될 것 같습니다. 맨 앞엔 세워진 두 개의 긴 장대도 보입니다.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보았던 헌금 바구니네요.

예배 시간 사람들은 설교 듣느라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딱 두 사람만 빼고요. 중앙의 이 두 사람이 우리의 눈을 잡아 둡니다. 이 둘 사이에 빈 좌석이 있는데,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 이상으로 보입니다. 고개 숙인 여인은 잠자고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이 지긋한 여인이 이 젊은 여인을 바라봅니다. 측은하게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설교 시간에 조는 게 못마땅해 째려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무척 재미난 장면입니다. 

작가인 게리 멜쳐스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단지 예배 시간에 자는 사람 째려보는 사람이 재미있어서?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봐야 정확하겠지만, 제 생각엔 이 작품의 제목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이 뭔가요? 네, '설교'입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고, 설교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하나 생길 겁니다. 그건 바로 설교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게리 멜쳐스의 이 작품 제목은 설교인데, 설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작가는 이 그림을 보여 주면서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사는 우리 현실을 고발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고 아름답게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때로 자기 몸에 숨깁니다. 진리라는 것, 그리고 참으로 가치 있는 것들은 때로 우리 시야에 잡히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 가장 귀한 것은 숨겨 있다'는 루터의 말은 사실입니다.1)

하나님의 말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설교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목사나 선생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을 설교라고 하고, 그 내용은 약한 사람에게 힘을 주고, 마음 상한 자를 보듬어 주며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잘생긴 설교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멜쳐스의 그림을 읽는 출발점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설교'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사람(설교자)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이 그림은 설교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럼 하나 더 질문해 봅시다. 이 그림 속 인물 가운데 설교 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언뜻, 졸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설교와 가장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축 늘어진 자세는 가장 편안한 안식의 자세로, 숙인 고개는 조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모습으로, 무릎 위에 펴진 손은 힘겨운 일주일의 삶을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내맡기는 그런 모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면, 빈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에 오롯이 기대어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안식을, 또 한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는 대신 겉모습만으로 타인을 쉽게 심판하는 오늘의 신앙인을 대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그림을 보며 설교와 예배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에게 설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죄인을 구원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라서,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는 모든 인간을 지칭합니다. 지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기댈 곳이 되어 주고, 참된 쉼(안식)을 주어 다시 걸어가도록 북돋는 하나님의 음성이 설교입니다. 그 음성을 사람(설교자)을 통해 들려주십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건 남을 심판하라고 들려주는 소리가 아니라, 나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돕겠다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멜쳐스의 이 그림을 보다가 요한복음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그림 속 여인의 편안한 자세와 무릎 위 하늘 향해 펼친 손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 여인이 목자 음성을 기다리는 양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요. 지금 우리 교회에선 이 그림 속 졸고(?) 있는 여인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이 그림을 놓고 함께 의미 있는 수다를 나눌 만한 일입니다.  

주) 

1) "Abscondita est ecclesia, latent sancti.": 루터, 노예 의지론 (1525), in: WA 18,6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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