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김혜령 부교수가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치매 아버지'를 주제로 연재를합니다. 연재는 격주 월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고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는 서둘러 합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치매 증상 중 하나인 의처증과 난폭성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단 한 번의 사고로도 두 분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은퇴 이후, 부모님은 새로 이사 간 도시에 두 분만의 독립된 공간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적응해 왔기 때문에, 다시 자녀와, 그것도 아들이 아니라 딸의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제안받은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들의 삶이 실패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자녀에게 기대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삶, 그것이 산업화 1세대 중산층 부모가 꿈꾸는 이상적 노후의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설득에 성공하였고,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여 우리가 사는 동네에 방 하나 더 있는 집으로 합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합가를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확신했다. 아니 최근까지 그렇게 믿어 왔다. 적어도 내게 '페미니스트'란 –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진 '이기적 여성'의 이미지와 달리 -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도외시하지 않는 주체적인 인간상을 의미했다. 아마도 에서의 장자권을 차지한 욕심 많은 야곱이 타지에서 긴긴 노동의 세월로 장자권 찬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것처럼, 나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요즘 아들들도 잘 지지 않는 합가의 길, 즉 '의무 지워진 것 이상으로 책임지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리라. 

물론, 이러한 내 개인의 결단이 정말로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페미니스트에게 나쁘지 않은 배우자를 선택했던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은 아내의 부모 노년을 보살펴야 하는 우선적인 책임이 처남이 아니라 자기 아내에게,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까지 넘어온다고 스스로 생각해 낼 만큼 '여성 해방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는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난 대다수 남자처럼 이왕이면 이제껏 살던 방식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축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페미니스트 남편으로서의 중요한 미덕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사회생활을 멈추지 않기를 원했으며 아내가 사회생활에서 자신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을 때에도 질투 없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집사람의 내조' 부재를 '부부의 상호부조'로 채울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페미니스트 아내와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가?"라고 물어 오는 남성 동료들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만큼 새로운 삶의 양식을 자신의 유익으로 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아내 부모와의 합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대사회의 핵가족에 적합한 '평등 부부의 이상적 모델'에는 "배우자의 나이 든 부모를 돌보기 위해서 동거해야 한다"라는 의무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부 평등'이란 사실상 계급 유지나 상승을 목표로 자녀 양육에 온 힘을 다하는 부부 공동의 헌신 의무와 부부 노년의 삶을 위해 경제와 돌봄의 협업을 수행하는 의무 안에 머문다. 즉, 부부의 평등을 실현하는 일에는 핵가족 밖에 있는 배우자 부모까지 전적으로 책임지는 의무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의 부모뿐만 아니라, 남편의 부모마저 노년의 취약한 상태를 '합가'라는 형태로 배우자에게 요구하기 정말 쉽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그것은 핵가족 모델의 도덕적 이상이 전제하는 '상호의 평등한 책임' 너머 배우자 한쪽의 더 큰 '헌신'이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평등성을 훼손하는 '부당한 요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끔 나는 우리의 합가에 있어 '남편의 공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중 시선을 느낀다. 첫 번째 시선은 사람들이 '사위'로서 그가 보여 준 헌신을 '며느리'의 헌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한다. 사위의 동거를 상대적으로 더 높게 평가한다는 것은 실제로 사위가 며느리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기 때문이 아니다. 사위는 아내 부모와의 동거만으로도 '헌신'한다고 칭찬받지만, 며느리에게는 단순한 동거 이외의 다양한 서비스(부양과 돌봄)가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사위의 동거가 며느리의 동거보다 대접받는 것은 단순히 그 둘의 위상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위의 아내, 그러니까 딸도 이미 집안에서 며느리의 존재와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민한 독자는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며 우리가 부모님과 "합가한 것"이지, 우리가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라고 표현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 왔다. 엄마의 천성이 부지런한 탓도 있지만, 합가 이후 나는 이전보다 가사를 훨씬 적게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집에 주로 있다 보니 빨래며 요리며 집안의 여러 일을 엄마가 도맡게 된 것이다. 마치 어린 사춘기 딸처럼 나는 엄마의 재생산 노동을 대가 없이 거저 누리는 상태로 퇴행한 것이다. 당연히 나의 가사 노동을 나눠서 하던 남편의 노동량도 덩달아 줄게 되었고, 우리 모두 엄마의 헌신에 기대어 사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줄어든 가사 노동의 자리 대신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져온 다른 집안 노동들이 우리에게 적지 않게 새로이 발생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나나 남편 모두 전통적 의미에서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듯 우리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성 부계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며느리는 '낯설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방인'이라면, 남성 사위는 '낯설어서 어려운 이방인'이 되었다.
남성 부계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며느리는 '낯설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방인'이라면, 남성 사위는 '낯설어서 어려운 이방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유교 사회의 부계 혈통 중심의 가족은 혈통에 따른 친족 범위 안에서 남녀유별 관념과 장유에 따른 서열 관념을 실질적인 가족 위계질서로 실행하며 가문을 이어 나간다. 이러한 가족 안에서 '며느리'라는 존재는 자녀(특히 아들)을 낳기 전까지 가족 그 누구와도 혈통을 공유하지 않은 유일한 이방인이자, 여성이며, 며느리(아들의 아내)라는 삼중의 교차 속에서 가족 내부의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위는 비록 그가 이방인이자 딸의 남편으로서 전통적 위계질서 하위에 놓일 수 있는 두 개의 조건을 충족했지만, 여전히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 간 지위를 교란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남성 부계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며느리는 '낯설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방인'이라면, 남성 사위는 '낯설어서 어려운 이방인'이 되었다. 여성 며느리가 '공로 없이 남편(시부모의 아들)의 부양을 받고 가문 재산을 상속받는 얄미운 존재'로 여겨졌다면, 남성 사위는 '딸의 안전과 부양을 평생 책임지는 고마운 존재'로 대접받아 왔다. 아마 그러한 잔재가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핵가족 모델의 이상이라면 논리상 며느리나 사위의 합가가 다르게 평가되어서는 안 되지만, 남편이 '합가'라는 결정을 '내려 준'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는 이들을 나는 여전히 적지 않게 만난다. 

그러나 사위의 헌신에 대한 과도한 평가만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깎아내리는 듯한 반응도 가끔 접하게 된다. 그러한 반응은 '데릴사위'라는 낡은 틀 안에서 남편의 합가 선택을 의심한다. 데릴사위란 딸만 있는 집안에서 노동력을 얻을 방편으로 일부러 가난한 집안 출신 남자를 사위로 삼는 풍습이다. 그러나 데릴사위제의 공식 명칭인 '솔서혼'(혼례 후 신랑이 처가에 일정 기간 혹은 영구히 머무는 제도)이라는 전통 혼인 습속은 유교적 가족 이념에 따라 주자가례의 친영 제도(신랑이 처가에서 신부를 맞아 와 자기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혼례 의식)가 조선 후기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시행되던 그리 특별하지 않은 동거 방식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자 사대부들은 '부계-장자 중심의 가족' 형태를 매우 공고하게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부계 가족의 친족 질서를 공고히 할 때만이,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까지 유교적 질서로 통일되는 안전한 체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강한 신념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침략 앞에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군주 국가'를 지키는 데에 무력하기만 했다.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처가에 얹혀사는 못난 인물'로서 '데릴사위'를 얕잡아 보는 관점에는 성차별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별이 함께 교차한다. 여기에는 사람과 사람의 모든 관계를 '물화物化'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근원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물화'된 것으로만 인지하는 사람은 타인을 보살피며 돌보는 행위에 담긴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을 전혀 읽어 내지 못한 채, 그 마음을 경제적 탐욕으로 헐뜯으며 그 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계산해 내는 데에 열중한다. 그러나 물화로 세상 보기는 타인을 바라보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부모가 자기를 키워 낸 행위도 투자로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헌신도 교환가치로 평가하고, 자녀 양육도 경제적 손익계산으로 따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위로서 남편이 보여 준 '합가'의 헌신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앞에 나는 정작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결국 내 의견을 존중하여 합가에 최종적으로 동의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내게 "위험에 처한 사람은 우선 살리고 보는 게 맞지"라고 했다. 그가 전통적인 가족 이념에서 완벽히 해방된 존재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이념이 부여한 사회적 역할에 얽매일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아내 부모와의 합가는 그가 '여성을 해방시키는' 페미니즘의 이념에 추동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틋하게 여겨서 그 가족까지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의 확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무릎 수술 후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장모에게 다가가 맨다리를 부드럽게 두 손으로 훑어 내리며 "어머니, 여기 아파? 여기? 아이고 많이 부었네" 하며 친근하게 말하는 그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끊임없이 반복하는 질문과 부정적인 말들, 예상치 않은 폭력적 행위들로 우리의 일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장인에게 늘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 대응하려고 애쓰는 그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나는 그의 행동을 보며 처음에 아주 미안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대해 내가 미안한 마음을 품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미안함은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품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질병은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다. 인간은 고통의 원인을 모두 해명할 수 없기에, 누구도 아버지의 질병을 내 탓이라 몰아붙일 수 없다. 그러니 나를 뻔뻔하다고 해도 하는 수 없다. 내가 남편에게 품는 마음은 미안한 마음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가 '사랑의 자유'로 내 가족이 되어 나와 함께 내 책임을 나누겠다고 '선택한' 일에 대해 내가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그의 선택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이며, 나아가 나 역시 그가 진 삶의 책임을 함께 나눠 지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내렸던 '가족 되기'의 선택은 사회구조적으로 이성애적 가족과 사회 계급을 재생산하는 수행 정도로 분석되겠지만, 적어도 그 선택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의미는 그와 내가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함께 사랑하고 보살피며 살겠다고 하나님과 서로에게 약속한 것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닥칠 때 사랑으로부터 너무 쉽게 도망가는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가족 되기를 진지하게 선택하며 삶의 거친 파고들을 함께 넘어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면, "사랑하려는 '의지'를 갖고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1) 

갑자기 과도한 사랑 타령으로 흐르는 것 같아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닭살이 돋거나, 역으로 화가 날지 모르겠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배우자 운(?)이 좋은 개인적 경험에 기대어 친밀한 관계 안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사랑'만이 답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가진 자에게 적절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인간 사회의 성차별 문화와 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대안들'을 탐구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가족'의 제도적 측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 '사랑'이라는 친밀한 관계의 힘을 너무 성급하게 불러오면 분석의 날카로움은 쉽게 무뎌지고, 대안 찾기는 지연되거나 아예 잊힌다. '사랑'만큼 상대방을 위한 헌신의 진정한 동기가 되는 것도 없지만, '사랑'만큼 가부장제적 가족 질서에 옭아매는 이데올로기의 위장술이 되기 쉬운 것도 없지 않은가. 

사랑을 신뢰하기와 사랑을 의심하기. 절대 한쪽으로 쏠릴 수 없는 중간 애매한 위치에서 나는 남편의 '사위 되기' 만큼, 나의 '며느리 되기'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싶어졌다. 우리 부부도 아버지에게 치매가 발병하기 전까지는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부부들이 요즘 많이 선택하는 '셀프 효도', 즉 '자기 부부에게는 자신이 직접 효도하기' 원칙을 우선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관계의 평화와 심리적 안정을 일정 부분 누려 왔었다. 

그러나 셀프 효도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주로 가능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부모님의 생계와 건강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녀 역시 생계와 삶의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자식 키우기만으로도 벅차서 노년을 지탱할 경제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했다거나, 홀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소득이 낮은 자녀들은 다른 형제자매들의 적극적 협력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도움 없이 부모의 전적 의존 상태를 견뎌 내기 어렵다. 소득과 시간의 빈곤으로 자신과 자녀만을 부양하기에도 버거운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이거나 신체적으로 전적인 돌봄이 필요한 상태에 처한 부모님을 배우자의 도움 없이 혼자 부양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논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회차에서는 가족의 역할로 이야기를 한정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적 공간과 삶을 전적으로 공유하는 주거 행위, 즉 '합가'라는 전적인 돌봄 의 삶을 선택한 남편의 행위는, 그동안 내가 어머니(시어머니)에게 해 왔던 행위들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마음 씀에 불과하였음을 드러내었다. 나는 내가 귀찮지 않고, 어렵지 않을 만큼만, 그리고 방해받지 않을 선에서만 남편의 책임을 보조하는 '독립적인' 며느리였다. 그래서 남편의 '사위 되기'만 놓고 보면 미안하기보다 고마운 것이 맞지만, 나의 '며느리 되기'까지 비교하여 본다면 미안한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결국 적절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빚은 다른 한 여성의 헌신으로 잘 은폐되고 있었다. 나보다 11살이 많은 큰형님은 20대 중반에 결혼하자마자 시부모님을 30년이 넘도록 모시고 있다. 그는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가난한 남편 부모의 생계와 건강, 문화와 종교 생활까지 모두 통합하여 부양과 돌봄을 책임져 온 '맏며느리'였다. 형님은 진취적인 여성으로 평생 직업 활동을 쉰 적이 없었지만, 가족이나 아내의 역할에 관해서는 집안 어른들이 보여 주고 가르쳐 준 대로 의심 없이 살아왔다. 아들 넷의 큰며느리가 되기로 하였으니, 당연히 시부모를 모시는 것도 자기의 역할이라 받아들였다. 깐깐하고 자존심 있는 어머니 덕분에 시집살이가 쉬운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워낙 쾌활하고 주체적인 형님은 주어진 삶의 무게와 시간을 큰 의심 없이 잘 견뎌 내 왔다. 

그러던 중에 내가 결혼하여 가족의 일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쩌다 보니 우리 집 이야기를 형님과 나눌 일이 생겼다. 공교롭게도 우리 아버지 집도 남편 집처럼 형제가 모두 넷이었는데, 아버지의 형인 큰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인 작은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나는 워낙 어릴 적부터 그렇게 지내는 걸 봐 왔던지라, 꼭 큰아들이 어머니를 모셔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형님은 우리 집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동서, 왜 할머니는 큰아드님이 안 모시고 셋째 아드님이 모시는가?"

오래된 일이라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그 질문을 하는 형님의 표정이 정말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왜 형님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혹여나 형님이 우리 집 예를 들어 어머님을 나나 다른 형님들에게 모시라고 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우리 부모와의 합가를 결정하자마자 이 사실을 남편 가족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했다. 여성이 며느리로서 하는 행위를 분석한 최근 논문에 따르면, 남편 대신 며느리가 하는 '대리 효도'를 솔직하게 처음부터 거절하는 Z세대와 달리, 1970년대생의 기혼 여성들은 자신의 자아를 배후로 숨기면서 '형식적 며느리 연기'를 수행한다고 한다.2)

그러고 보니, 나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남편 가족과의 직접적인 불편함을 피하려고 어느 정도 며느리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우리 부모와 합가하는 것이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을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허락을 요청하는 정식 과정을 통해 '은혜를 입은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얻어 남편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큰형님 앞에서는 며느리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며느리 간의 서열도 남편의 서열에 따라 결정된다는 면에서, 내가 그를 '큰형님'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를 묵인하는 '며느리 연기'의 일부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큰형님'과 '막내 동서'라는 관습의 호칭 너머, 한 여성으로서 다른 여성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거두기 힘들었다. 그는 결국 내가 사랑하여 가족 되기로 결심한 사람의 어머니에 대한 돌봄의 책임 상당 부분을 아주버님과 함께 대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선택할 때에도, 형님은 우리의 짐을, 나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홀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 고령의 노모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 빚져야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가족 안의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의 평등만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연대를 구축해 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타인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갇히지 않도록 방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를 향한 미안함에 성실히 답하는 자세다.
누군가가 타인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갇히지 않도록 방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를 향한 미안함에 성실히 답하는 자세다.

물론 그 짐은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며느리'에게 강제로 씌운 것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의 늙은 부모마저 가여워진 한 '인간'이 기꺼이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양자택일을 답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가족 돌봄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책임을 덜 진 이들은 책임을 더 진 이들에게 미안해하며 동시에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강제의 역할과 책임의 자유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는 것이 현대사회의 가족 돌봄자들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선택한 합가라는 돌봄의 삶도 온전히 페미니스트로서 권리를 누리기 위해 기꺼이 책임을 감당하는 주체적 자유를 실행한 것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부계 중심의 가족 부양 시스템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지만 사회 보호망 구축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우리 사회에서, 부모의 돌봄과 부양을 독박 쓰는 '슈퍼 우먼' 딸들이 우리 주변에 빠르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족은 제도이기도 해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의 선한 마음을 남용하며 유지된다. 사랑은 사람에게 가족의 고통을 책임지는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이미 선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더욱 마음이 약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단순히 속으로만 미안해하지 말고, 또 단순히 말이나 돈으로만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말아야 한다. 나의 짧은 경험에서 조심히 제안하는 것은 일 년에 며칠, 한 달에 하루, 일주일에 몇 시간만이라도 그가 지고 있는 돌봄의 짐을 정규적으로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돌봄의 나눔은 결국 짐을 가장 많이 지고 있는 이에 대한 인정이자 존경을 표현하는 상징이 될 수 있다. 그 덕분에 돌봄에서 완벽히 면제된 시간 동안만이라도 그도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타인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갇히지 않도록 방안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를 향한 미안함에 성실히 답하는 자세다. 나아가 우리가 선택한 사랑에 대한 정성이 더 크게 자라나, 결국 우리 자신의 영혼과 삶을 확장할 수 있을 기회를 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과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가족의 해체, 정확히 말해 '정상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 이들에게 함부로 훈수 두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임을 나는 빼먹지 않고 강조하고 싶다. 

*알립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부르며 어머니는 '엄마'라고 부르거나, 남편의 부모나 가족에게 '시'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에게 적절한 호명 방식인가를 질문하실 독자가 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타당한 질문이며, 호칭은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관점에서 새롭게 변경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용어들을 어느 정도는 일부러 사용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란 성차별 구조에서 완벽히 해방된 자가 아니라, 그 역시도 성차별 구조의 잔해에 여전히 일부 매여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재의 특성상 긴 호흡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후 글 순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5. 치매 환자에게도 사회생활이 있다
6. 가장 고마운 사람들
7. 동생아, 도와줘!
8. 나는 나의 치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주)

1) Sco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1978. (재인용) 벨 훅스, <All About Love>, 책읽는수요일, 2012, 35쪽. 
2) 이경하, <2-30대 며느리의 행위성을 통해 본 가족주의의 변화: 고학력 중간 계급 여성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21,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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