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11월 19일, 성령강림 후 스물다섯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23 / 사사기 4:1-7  / 데살로니가전서 5:1-11 / 마태복음 25:14-30

막스 리히터의 'Mercy' 뮤직비디오. 유튜브 갈무리
막스 리히터의 'Mercy' 뮤직비디오. 유튜브 갈무리

"제가 추구하고 시도했던 것은, 매우 밝고 찬란하게 빛나는 느낌의 작품을 가능한 한 가장 어두운 재료들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리를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과도 같은 과정이었지요."1)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평일 낮 빛의 자연에 대하여(On the Nature of Daylight)'라는 곡입니다. 이 곡을 작곡한 막스 리히터(Max Richter, 1963~)는 독일계 영국 작곡가로 기존 클래식에 일렉트로닉이나 펑크록을 가미하거나, 재작곡을 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하는 현시대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음악가입니다. 그의 음악은 서정적이고 단순하지만 흡인력 있는 서사를 완성하기에, 연주장에서 연주될 뿐 아니라 다수의 영화음악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4년 발표한 'The Blue Notebooks'에 수록된 'On the Nature of Daylight' 역시 영화 '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2010), '디스커넥트 Disconnect'(2012), '컨택트 Arrival'(2017)'에 등장했지요. 최근에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에서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동시에 소환되는 결말의 극적인 장면에서 이 곡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각기 다른 영화에 동일한 음악이 등장하여 다른 감정을 자아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요? 음악이 주는 감동과 고유의 정서는 작곡가의 의도와 긴밀하고 청자들에게도 고스란할 것 같지만, 음악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은 공식화되어 있지 않지요. 더구나 막스 리히터의 작품들은 역설적이게도 '사소하고 평범한' 음악적 재료들이 빚어져서 나오는 반복의 서사가 있기에 그 가능성이 각별히 무궁합니다.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목소리들(voices)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에 걸쳐 풍미했던 복잡하고 실험적인 현대 예술에 대한 반발은 음악에도 동시에 나타나는데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를 중심으로 한 미니멀리즘 음악입니다. 음악을 구성하는 선율, 화성, 리듬을 기존 양식의 반작용으로, 그것들을 매우 단순하고 느슨하게 다룬 현대음악의 한 장르입니다. 리히터는 앨범 'The Blue Notebooks'을 작곡할 당시 영국이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시기였고, 반전시위에 참여하면서 음악을 통해서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겠다고 결심합니다. 음악가이지만 동시에 한 평범한 시민의 호소는 그만의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외침은 앨범 'Voices'에 담깁니다. 그리고 클라우드를 통해 세계 각지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각국 70개의 언어로 된 목소리는 세계인권선언문의 '모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이를 현악 오케스트라와 결합시킵니다. 

특이하게도 이 앨범은 기존의 오케스트라의 비율과는 완전히 전복된 형태의 '네거티브 오케스트라'를 구성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높은 음역을 담당하는 바이올린의 구성이 가장 많은 형태가 아닌, 낮은 음역의 첼로와 베이스가 많은 비율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마치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듯 어두운 음색으로 어두운 시대를 음악적으로 구현합니다. 리히터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사소한 일상과 얼마나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음악을 통해 역설합니다. 현악기의 어두운 음역과 색채,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완성되는 세계가 음악에서 조우하는 것이지요.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영웅이 아닌 사람들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시작된 사사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변심과 배교로 타락하는 모습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가나안 세대가 저물고 태어난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삿 2:10). 그저 가나안 땅에 원래 있었던 신들이 그들의 신이 되고, 가나안의 딸들과 결혼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 갈 뿐이죠. 여호와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여호수아의 죽음 뒤 일어난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타락은 동시에 절망을 가져왔죠. 고통과 어두움의 시간을 통과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구원자인 사사를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구원을 베풀어 주시지요. 랍비돗의 아내라고 불렸을 드보라, 헤벨의 아내였던 야엘. 그들은 일상을 일구어 나가던 평범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구원의 말씀이 드보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리게 되고, 가나안 군대 장관 시스라는 그저 평소대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야엘을 통해 죽음을 맞습니다. 비장하지 않지만 일상을 꾸역꾸역 고명하게 살아갔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조각이 된 것이지요.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늘상 반복되는 것, 비루해 보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른 아침 출근길이 그러하고, 시간마다 아기를 위해 우유를 타는 일이 그러하고, 쓰레기를 분리배출 하기 위해 플라스틱 그릇을 씻는 일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거나, 쏟아붓는 시간과 애쓴 만큼 결과가 그렇지 못할 때일수록 일상은 더욱 견뎌야만 하는 시간처럼 느껴지죠. 내게 맡겨진 시간, 공간,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떠올려 봅니다. 반복되는 가운데 발견되는 진실이 있고, 또 어떤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상의 재료들을 정성스러운 태도로 가꾸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리히터가 그러했듯이 거창하지 않은 화성들과 소박한 악기들로 충분한 마스터 피스를 만들어 냈듯이 말이지요. 흔해 빠진 것이 고귀해지기 위해서는 꾸준하고 정성스러운 손과 그것을 지탱하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충성이라고 달리 표현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주인의 즐거움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겠지요?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 25:23, 공동번역)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에 관한 인터뷰. 유튜브 갈무리
평일 낮 빛의 자연에 대하여 

단조와 장조의 화성의 느긋한 반복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의 낮의 빛처럼 여전합니다. 서서히 걷히는 안갯길을 걷는 것처럼, 긴 호흡을 가지고 느리게 차근차근 음악으로 들어갑니다. 서두르지 않으며 자극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소함과 평범함이 전진할 뿐이지요. 그것들은 일상의 어두움을 껴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곤고한 삶의 배경, 노동의 수고로움, 낡은 편견, 다툼과 소란들이 모여서 '고귀한 낮의 빛'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막스 리히터의 곡 '평일 낮 빛의 자연에 대하여(On the Nature of Daylight)' 그리고 앨범 '목소리들(Voices)' 중에 수록된 '모든 사람들(All Human Being)'과 '자비(Mercy)'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오늘을 살아가는 무명의 사람들, 그리고 사사 시대 어둡고 고통 가득한 곳에서 여호와에게 눈을 들어 충실한 삶을 산 여성들, 드보라와 야엘과 함께 들어 보시지요.

주)

1) https://youtu.be/Jn2oGZT62Ps?si=O3yywmkmZVIQAMa6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진행한 'On the Nature of Daylight from The Blue Notebooks'에 관한 리히터의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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