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11월 12일, 성령강림 후 스물넷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78:1-7 / 여호수아 24:1-3a, 14-25 / 데살로니가전서 4:13-18 / 마태복음 25:1-13

Sylvain Sonnet/Corbis, 프랑스 샤르트르대성당의 미궁. 사진 출처 스미소니언매거진닷컴
Sylvain Sonnet/Corbis, 프랑스 샤르트르대성당의 미궁. 사진 출처 스미소니언매거진닷컴

세겜 땅 위에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그는 그 대지에 서려 있는 기억을 온몸으로 마시고 있습니다. 백발노인의 거칠어진 발은 그 땅이 온전히 품었던 조상들의 기운을 감각하느라 여념이 없지요.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처음으로 멈추어 이 땅을 주리라 약속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창 12:6-7) 그리고 야곱은 귀환하는 길, 이곳에서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았고요. (창 33:18-19) 여호수아는 그 땅이 품고 있는 과거 하나님과 선조들 사이에 빼곡히 들어찬 '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곳에는 여호와의 진실한 언약의 말이 서려 있는 곳이고, 사람들의 응답이 돌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곳.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유언을 남깁니다. 살아갈 삶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노인의 지극한 마음은 세겜의 땅에서 너울너울 그들을 향하여 유영해요.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응축된 진심이 메아리치고, 온전한 당부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수 24:14)

땅이 간직한 기억은 돌고 돌아 오랜 시간이 걸려 귀향한 사람들을 신실히 기다려 주었고, 여호수아의 마지막 당부는 그 위에 화음처럼 쌓입니다.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이 화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모세를 계승한 여호수아는 오직 이 말의 원형을 모세의 행적으로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떨기나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불타는 내면은 여호와의 빛이 반영되는 진실함의 장소였고, 120세의 마지막 숨이 남아 있기까지 그 빛은 쇠하지 않았으니 그곳은 지극히 온전한 곳이었지요. 모압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모세의 삶을 그 곁에서 목격한 사람이 노인이 되어 할 수 있는 견고한 당부는, 모세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백성들도 그와 같이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자신에게 평생 동안 되뇌었던 다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거칠고 모자람 많은 인생을 흠 없이 고쳐 돌려주는 신의 조용한 사랑이 모세의 인생에 고스란했고, 여호수아는 그 삶의 증인이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례와 법을 온전하고 진실히 지키는 것이 여호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광야의 시간 동안 흡족히 경험한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도 그 복 안에 거하기를 여호수아는 끝까지 당부합니다. 조상들의 부끄러운 행적 또한 '온전함과 진실함'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과거 이집트에서 섬겼던 화려했던 신들, 지금의 이방신들을 일제히 치워 버리고, 오직 바라볼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얼마 남았을지 모르는 죽음까지의 날들까지 아낌없이 가다듬어 다짐하지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

메아리치는 합창
Bradley Shawn Rabon, 'Morning Light'. 사진 출처 레드버블닷컴
Bradley Shawn Rabon, 'Morning Light'. 사진 출처 레드버블닷컴

세겜에서 백성들과 맺는 언약은 백성들의 목소리로 화답하는 소리로 다시 메아리칩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수  24:16-18, 새번역)

다짐은 반복되어 세겜의 땅을 웅장하게 울립니다. 야곱이 쌓은 돌들이 들썩이며 목소리 높여 응답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그곳은 하나님의 언약과 조상들의 믿음이 꿈틀대고 소용돌이치는 거룩한 곳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수 24:21, 22, 24, 새번역)

여호수아의 말에 백성들은 되풀이하여 응답합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한목소리가 되었고, 땅과 산은 그 소리를 울려 주었지요. 메아리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시 백성들의 귀와 내면을 진동시킵니다.

그것은 다만 반복이 아니라 재탄생하는 것.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를 여행하는 것.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 특유의 작곡 어법을 가지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Víkingur Ólafsson)이 한 말입니다. 글래스의 많은 곡들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조로 되어 있기에 많은 이들은 그를 미니멀리즘의 창시자로 부르지요. 하지만 글래스 자신은 자신의 음악을 그저 '반복 구조 음악'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왜 그가 그렇게 음악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은 계속되는 단조로운 음형으로 인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염없이 제자리에 멈추어 있는 듯하고, 시간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얼마나 온 것일까. 뒤를 돌아보았을 때 또 다른 장소로 난데없이 이끄는 것. 그것이 필립 글래스의 반복 구조가 어떤 패턴을 느껴지게 하여 새로운 장소로 미끄러져 움직이게 하는 그만의 음악 언어인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잊게 만드는 것. 시간과 공간을 저만치 옮겨 주는 것.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시공간을 굴절시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어딘가로, 지금으로부터 언젠가로의 폭발적인 확장입니다. 반복이 가져오는 확장 말이지요.

에코러스 Echorus

'에코' 즉 메아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제목의 글래스의 '에코러스'는 A-B-A 구조의 샤콘느 음악 형식을 가진 현악기 편성의 작품입니다. 샤콘느는 바로크 시대 춤곡 형식으로, 4소절에서 8소절의 화성 모형을 반복하는 장르입니다. 글래스의 '에코러스' 또한 단조로운 반복이 주는 변형을 펼쳐 나갑니다. 끝이 없을 듯한 미로 같은 반복은 어느새 새로운 모퉁이를 만나고 모퉁이를 지나 돌아오는 또 다른 길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길로 초대하죠. 돌아온 길을 다시 찾을 듯하지만 낯선 골목을 맞닥뜨리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다시 처음 내딛었던 곳으로 회귀하는 듯한 기묘한 경험을 하죠. 시간은 그동안에 도망갑니다. 글래스에 따르면 '에코러스'는 "긍휼의 생각(thought of compassion)"에서 영감을 받았고, 고요함과 평화의 느낌을 반복을 통해 환기합니다.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연민이 되풀이될 때 만나는 "온전하고 진실한 상태"를 꿈꾸었던 것일까요? 뉴욕이라는 거대한, 소음의 도시의 살았던 글래스, 택시기사로 배관공으로 일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가 '에코러스'를 통해 이르고 싶었던 지극한 곳은 도시의 구도자로서 끝내 가고자 했던 거처가 아니었을까요?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를 위한 에코러스' 연주 실황. 유튜브 갈무리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를 위한 에코러스' 연주 실황. 유튜브 갈무리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필립 글래스의 1995년 작,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기를 위한 에코러스(Echorus for Two Violins and Strings)"입니다. 걷고 걷는 소용돌이 같은 광야의 시간을 거쳐 이스라엘 자손들은 끝내 가나안으로 이끌어지기를 40년. 어떤 이들은 길 위에서 죽고, 어떤 생명들은 길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았던 무수한 하늘의 별과 같은 이들이 여호와의 언약대로 그의 백성이 되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세겜의 땅에서 다시금 그들의 조상과 하나님 사이에 이야기를 복원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기억하고 되새기는 그들의 선조들과 그 곁에 항상 계신 하나님은 반복되고 나열되고 변형되고 확장됩니다. 샤콘느의 형식 안에서 악기의 편성이 점점 많아져도 견고한 주제의 모형은 변함없이 곡 안에서의 변주를 포용하며, 오히려 주제를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더 넓은 확장된 신을 경험하지요. 필립 글래스의 '에코러스'를 통해 반복이 주는 힘과 견고함 그리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들어 보겠습니다. 세겜의 땅에서 들리는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응축된 진심,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의 메아리를, 2016년 링컨센터에서 연주한 실황으로 듣겠습니다.

Jessica Lee, Danbi Um, violin solo

Bella Hristova, Daniel Hope, Benny Kim, Alexander Sitkovetsky, violin

Hsin-Yun Huang, Mark Holloway, viola

Daniel McDonough, Keith Robinson, cello

Anthony Manzo, double 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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