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김혜령 부교수가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치매 아버지'를 주제로 연재를합니다. 연재는 격주 월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첫 번째 글을 읽고 열일곱 살 딸아이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사는 것보다는 좀 더 어둡고 무겁게 그려진 거 같아. 왜, 실제는 꽤 그럭저럭 괜찮은데 글로 쓰면 너무 진지해지잖아.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게 그렇게 매일 힘들거나 슬픈 건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딸아이의 피드백은 첫 원고를 송부하고 매체에 공개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예상치 않은 외출로 다시 불편해졌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 치매 환자와 함께 사는 일이 늘 우울한 감정들에만 메이게 하는 것은 아닌데, 혹여나 독자에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읽혔다면 삶의 다채로움을 1/100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글쓴이의 탓일 것이다. 

아버지는 한국교회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평생을 '착한 가부장'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직업적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해 온 '진지하고 점잖은' 목사였다. 그러나 집안에서만큼은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위해 가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거나 짓궂은 장난을 쳤다. 실제로, 할머니나 큰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어릴 적에 동네 개구쟁이였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버지의 유쾌한 기질은 치매 3년 차인 지금도 다행히 제법 남아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지나 신체 능력의 손실을 느낄 때면 그것을 변명하기라도 하듯, '이상한' 이야기들이나 '동문서답'식의 말들을 늘어놓으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깨진 논리에 아버지의 위트가 살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방금까지 답답하고 우울하였던 걸 멈추고 박장대소를 했고, 그런 우리를 보고 아버지도 따라 웃으셨다. 아버지는 아직도 가족을 웃게 하는 가부장일 때 자신이 무언가를 가족에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가 진행되면서 아버지를 보고 웃게 되는 일에 늘 좋은 감정만이 남는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희극 작품에 감춰진 페이소스처럼, 아버지가 가족에게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 중에 깊은 슬픔과 좌절을 함께 안기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요즘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은 주로 옷과 관련하여 일어난다. 치매 환자 상당수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고집스럽게 입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아버지에게도 그러한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옷을 살 때부터 기온을 고려하며 재질을 고르거나 세탁소에 수선을 맡겨야 했다. 옷걸이에는 당장 입을 옷만을 간단하게 남겨 두고 나머지 것들은 숨겨 두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외출을 원하실 때마다 어떻게 옷들을 찾아냈는지 이렇게 저렇게 껴입고 방을 나선다.

한여름인데도 중절모 2개를 겹쳐 쓰고, 외출용 바지 아래 잠옷을 겹쳐 입는다. 심지어 그 위에 엄마 고무줄 바지까지 겹쳐 입을 때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레이어드 하듯, 긴팔 티셔츠에 짧은 소매 셔츠를 입으시고, 그 위에 잠바를 또 겹쳐 입으신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나 엄마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 속 광대의 모습 같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채플린 영화가 자아내는 페이소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깊은 먹먹함이 있다. 아버지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잠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걱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상한' 옷차림 앞에 터져 나오는 웃음이 너무 쉽게 나의 거친 반응으로 연결되곤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버지가 잘못 입은 바지를 감히 반강제로 벗기거나 다시 입힌다. 그리고는 이런 행동이 술 취해 옷을 벗고 자던 아버지 노아를 조롱하였던 막내아들 함의 행동에 견줄 만한, 아주 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지곤 한다. 

사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과학적으로만 사고하면 문젯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의사 히라마쓰 루이는 치매 환자의 옷 껴입는 습관에 대해, 치매 환자는 자율 신경계의 이상으로 체온조절이 잘 되지 않아 날씨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아버지의 '이상한' 옷차림도 '과학적으로' 그의 자율 신경계 손상이 발생시킨 '질병 증상'에 불과하다. 원천적으로 웃음이나 슬픔의 이유가 아니라, 단지 의료적 관리 대상인 것이다. 루이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의사답게', 치매를 걱정하는 독자에게 추가로 예방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치매에 걸려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감보다는 온도계를 확인해서 그 온도에 따라 옷차림을 정한다"1)라는 습관을 평소에 미리 들여놓으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주는 명쾌한 원인 분석과 대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치매 아버지의 철에 맞지 않는 옷차림 앞에서만큼은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웃음과 슬픔의 모순된 조합이 아무리 과학적 사고를 한다고 해도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인간 행동을 병리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의사 루이는 옷 입는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사회 문화적 함의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언어야말로 동물과 다른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현대 동물행동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유인원이나 (돌)고래 등에도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소통 능력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계통학적으로 여타의 동물들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옷 입는 행위만큼은 인간 고유의 '인간적인 행위'로 남아 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털이나 남의 피부로 외피를 덮거나 꾸미며 다른 개체와 관계 맺는 사회적 동물은 - 내가 아는 한 - 인간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옷과 관련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창세기에서 옷은 가장 지능 높은 동물이 변덕스러운 환경에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발명한 생존 도구로 증언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옷을 입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보편적 탐욕이나 사회의 위계질서와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 실존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려 한다. 

아이나 오나볼루(Aina Onabolu), '아담과 이브'.  사진 출처 mutualart
아이나 오나볼루(Aina Onabolu), '아담과 이브'. 사진 출처 mutualart

창세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옷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을 어설프게 엮어 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전능해지고 싶어서 선악과를 따 먹었고 그 결과 눈이 밝아졌지만, 밝아진 눈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세상을 볼 수 있게 하기는커녕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럽게 인지하게 하였다. '벗은 몸'이 본질적으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탐욕에 물든 눈이 '창조 원형의 몸'을 '벗었다'라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왜곡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기자의 통찰은 인간에게 옷 입는 행위란 하나님과 멀어진 인류가 직면하게 된 '자기혐오'의 문화(자기 벗은 몸을 수치스럽게 여김)뿐만 아니라, '(성)폭력'과 '착취'의 문화(타인의 벗은 몸을 대상화하거나 물화함)를 상징화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옷 입는 행위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핑계로 남자와 여자 사이, 왕과 신하 사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차등적으로 노동을 '분업'하고 그 분업이 초래하는 힘의 차이에 따라 지배와 복종의 권력관계를 재생산해 온 인류 문화의 실천적 총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옷 입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일이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옷 입는 행위는 성과 지위, 부, 국적이나 민족,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여부(특히 아들) 등에 따라 철저하게 끼리끼리 구별 짓는 관습이자 도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가 아무리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고 말씀하셨다고 해도,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옷에 대한 염려를 여전히 쉽게 놓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에 영감을 얻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합화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면서도, 꽃 자체에 집중하며 노래하기보다 '솔로몬의 옷'에 비교급 우위의 수사修辭를 동원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옷 입는 행위의 사회인류학적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송 가사를 비꼬아 생각해 본다. 작사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합화가 세상의 그 어떤 옷보다도 아름답다고 찬양하지만, 동시에 그는 솔로몬의 옷이 상징하는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에서 여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인간 사회에서 왜 왕의 옷이 신하의 옷이나 노예의 옷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고, 남자의 옷이 여자의 옷보다 더 권위를 가져야 하는지 작사가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솔로몬은 당연히 최고의 옷을 입어야 하고, 최고의 옷은 언제나 솔로몬 차지라는 사실에 어느 사람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문화에서 단순히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추리닝 바지에 정장 상의를 얹어 입고, 남자 옷과 여자 옷을 마구 섞어 입으며, 속옷과 겉옷까지 순서를 바꿔 입는 치매 환자의 이상 행위는 그가 위계적인 사회구조의 하위 주체조차 될 수 없는, 완전히 '추방된 자'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만다. 높고 낮음, 그 위계가 옷차림의 관습을 통해 하나의 안정된 '질서'로 견고하게 자리 잡은 인간 사회에서, 치매 환자의 '이상한' 옷차림은 그 질서를 어지럽게 망가뜨려 놓는다. 그래서 명칭을 붙이자면, 그의 옷 입기는 인간 사이의 위계를 나누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지배 질서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존재하는지를 폭로하고 훼방 놓는 '해체적 옷 입기'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회 주류 질서를 훼방하는 해체적 존재들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물론 '문명화된' 사회는 그들의 이상한 옷차림을 대놓고 배척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들은 소리 없는 '실소失笑', 즉 '어처구니없어 저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오는 웃음'을 통해 치매 당사자를 은근히 주눅 들게 한다. 이러한 웃음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본능처럼 체화하고 있는 가족들은 환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의 옷차림을 강하게 통제하는 방어기제를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덥거나 춥게 입어 건강을 해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럽게' 입어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서는 것이다. 

그러한 염려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웃음은 언제나 집단의 웃음인 것이다"2)라고 말했던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분석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 그는 1900년 출판한 <웃음 Le Rire>이라는 책에서 관객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희극 작품 속 주인공들의 특징을 분석하며, 희극 작품이 의도하는 관객의 웃음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교정 기능에 매우 유용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희극의 주인공들은 현실 속에서 교정이 필요한 문제적 사람들을 특정하게 재현한다. 먼저, 희극의 주인공들은 삶의 변화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실제 사람들을 '자동기계'처럼 경직되고 반복적인 모습으로 흉내 내며 재현한다. 사람이 기계일 수 없는데 기계처럼 움직이니, 관객은 물화된 희극의 주인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희극의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재현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인간이라면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야 하는데, 희극 속 인물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관객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희극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성격이 좋건 나쁘건 상관없이 거의 항상 '비사회적인' 인물로 재현된다. 관객은 주인공들이 다른 등장인물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볼 때 웃음을 터뜨린다. 

베르그송의 책을 읽으며, 나는 왜 아버지의 옷차림을 보고 내가 웃을 수밖에 없었는지, 동시에 왜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슬퍼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상한' 옷차림은 계절의 변화를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익숙한 방식 그대로 옷 입기를 고수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었기에, 철학자가 분석한 희극의 주인공처럼 '자동기계' 같아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해, '고장난' 자동기계와 같다. 꼭두각시 인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혼자 옷을 골라 입을 수 없으니, 엄마나 나의 코치를 받아야만 한다. 말이 좋아 코치지, 나쁘게 말하면 조종받는 꼭두각시와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역시 희극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많은 영역에서 '비사회적'이 되어 어디서나 '겉도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베르그송의 <웃음>을 처음 읽었을 때 치매 환자가 희곡의 주인공과 같이 왜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여러 번 곱씹을수록 그의 설명이 적어도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 어떠한 희망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자는 희극을 보는 관객의 '웃음'이 희극이 재현하고 있는 현실 속의 문제적 사람들에게 – 비록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굴욕을 안겨 준다고 하더라도 - 결과적으로 문제를 교정할 기회를 준다고 보았다.3)

즉, 다른 사람들의 웃음이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기에, 사회에 유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의 관점에서 웃음의 효용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주장이 적어도 치매 환자의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이나 행동 등을 이해하는 주된 관점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치매는 환자로부터 자기 교정 능력을 궁극적으로 상실시키는 병이다. 그러니 아무리 사람들이 그의 이상한 옷차림을 보고 웃는다고 해도, 치매 환자는 사람들이 흔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옷차림으로 스스로 다시 갈아입기 매우 어렵다. 사람들의 웃음에 본능적으로 주눅이 들겠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지 못한 채, 혹여나 베르그송의 웃음 분석을 비판 없이 수용하다가는 치매 환자의 '해체적 옷 입기'가 우리 사회의 위계적 질서에 던지는 근원적 물음의 가치를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이상한 옷차림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을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치매 혐오 사회로 치닫는 것을 예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웃음으로 문제적 사람들을 교정할 수 있다고 보았던 베르그송에게 우리는 뒤집어 물어야 한다. 만약 정말로 교정이란 게 가능하다면, 교정의 대상이 누구인가? 문제적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정상 사회시스템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아마도 어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내가 치매 아버지에 대한 온정주의식 호소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상성 해체'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교묘하게 선동하는 '위험한' 페미니스트일 뿐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의 의심처럼, 나는 치매 환자를 문제적 존재로 고립시키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하는 우리 사회의 주류 질서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 정상성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정상성의 해체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 무질서 상태로의 혁명이나, 어떠한 체제나 권위도 부정하는 아나키즘의 상태를 만들겠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신학자로서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 실존에서 발생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은 안타깝게도 마지막 때까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나마 새롭게 고쳐진 것도 어느새 정상성의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정상성을 해체하는 일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권력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와 권력을 세워 영원히 독재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상성에 대한 비판과 해체로의 활동은 마지막 때까지 멈추지 말고 이루어져야 한다. 그 일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문제적 존재로 판단하고 비정상으로 차별하는 현재의 기준이 단지 특정 사회구조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존의 기준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환대하는, 더 개방적이면서도 더 정의로운 이해의 판을 다시 놓아야 한다. 

이미 밝혔듯이 이 글은 누구를 계몽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치매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살기 위해 애쓰는 내 생존의 해석학이다. 이번 글을 통해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앞에 마냥 웃을 수 없었던 내 슬픔의 기원을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해석학이란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의 생각과 글을 통해 내 생각을 우회하여 이전과는 다른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자기 이해의 해석학'이라고 하였다. 아마 내일도 나는 엄마 바지를 껴입은 아버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웃음이 아버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염려에 가득 찬 슬픔에 과하게 사로잡히다 못해, 성을 내는 것도 경계할 것이다.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이 오히려 내게 질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렇게 점잖거나 멋지게 빼입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으스대고 누구를 판단하려고 하느냐고 말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오히려 내게 기회를 준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의 '비정상적인' 옷차림에 신경을 쓰며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말이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롬 2:1)" 

'이후 글 순서' (제목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3. 모든 기억이 사라진 자리, 가부장제가 남아 있다 
4. 합가: 당신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5. 치매 환자에게도 사회생활이 있다
6. 가장 고마운 사람들
7. 동생아, 도와줘!
8. 나는 나의 치매를 맞이할 수 있을까

1) 히라마쓰 루이, <치매 부모를 이해하는 14가지 방법>, 뜨인돌, 2019, 186쪽.
2) 앙리 베르그송, <웃음/창조적 진화/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이희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8, 15쪽.
3) 위의 책, 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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