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10월 8일, 성령강림 후 열아홉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
이것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열 개의 계명이니 |
분명 꿈을 꾼 것이 아님에도 떠올려 보면 신기루 같아서 현실이 오히려 터무니없이 공허할 때가 있습니다. 때론 인생에서 큰 사건을 겪고 난 뒤 한동안 멍해서 어둠이 오는지도 모르고 거실 불을 켜지 못한 채 저녁을 맞기도 하지요. 고요가 깊어져 어둑어둑한 집 안에서는 간간히 들리는 냉장고의 소음이 거슬리고 저만큼 떨어져서 들리는 배달 오토바이의 질주도 유난하게 들립니다. 슬프든지 기쁘든지 간에 인생에서 감정의 격앙을 겪고 나면, 오히려 일상의 시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출산을 하고 난 다음 날 병실에서 빈 벽을 바라보며 초침 소리만을 듣고 있었던 때, 연주회의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무대 뒤로 들어가서 어둑한 의자에 털썩 앉았을 때, 갑자기 이전의 시간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아득해지는 진공의 시간이 이따금씩 찾아왔었죠. '조금 전까지 분명 그런 시간이 과연 있었던 거야?' 점과 같은 찰나이지만 격정의 끝에 도착하여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 '암전'은 강력한 빛을 보고 난 후에 멀어 버린, 눈이 무쓸모해지는 경험과도 같습니다.
암전은 연극의 무대에서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기 위한 필수적 장치이죠. 미리 준비된 무대의 소품과 가구 그리고 배우들의 동선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을 위해 시간을 얼리고 공간을 마비시키는 순간입니다. 공기도 말도 없는 멈춘 시간은 조명이 켜지며 비로소 다음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데리고 갑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모든 것에 속은 채 관객은 순식간에 연극의 다음 장면으로 기꺼이 빨려 들어가지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출 17:7).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때로 암전과 같은 시간을 겪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심은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시 19:6)'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를 잊곤 합니다. 그러나 불기둥과 구름 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바위에서 터진 물은 그들에게 여전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에게 들리는 소리,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으로 대답하시지요(출19:19). 모세는 백성들에게 성결할 것을 당부하고, 시내산을 오르지 말 것을 경고하고 산 위로 오릅니다.
백성들의 기다림이 있는 동안, 모세는 여호와로부터 열 개의 계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 20:1-4, 7-9, 12-17)
모세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경외하고 사랑할 것과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의 질서와 사랑의 계명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 그리고 산의 연기를 보고 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감히 다가가지 못하여 멀리 서 있는 그들에게 들리는 것은 온갖 두렵게 하는 소리와 보이는 것은 무섭게 하는 형상들뿐이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마비된 듯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있고, 급기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게 해 달라며 애원합니다(출 20:18-21). 검게 덮힌 하늘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하고 번개와 우레 소리는 순식간에 죽음을 떠올리게 했죠. 그러나 모세는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갑니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 20:21)
흑암에 거하시는 분 |
떨기나무의 불이 결코 어떤 재도 남기지 않고, 태우는 것 없이 불타오르는 것을 아는 모세였기에 흑암의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갑니다. 험한 산세를 헤치며 지팡이를 의지해 걷는 길에 안개가 걷히며 붉은 과실이 눈에 띄고 초록 이파리가 흔들립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는 종소리 같았을까요, 아니면 산새 소리 같았을까요? 아니, 정말 우레와 같은 소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시내산의 암전 속에서 모세는 여호와를 듣기 위해 다음 장면으로 다음 장면으로 계속 발걸음 합니다. 다만 백성들의 눈에는 흑암으로 보였지요. 오직 우뢰와 번개의 강렬함으로 눈과 귀가 마비된 암전의 상태에서 얼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백성들은 어떻게 다시 조우할 수 있을까요?
열 개의 계명, Cantus Firmus |
바흐의 코랄 칸타타 BWV77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Du sollt Gott, deinen Herren, lieben)'는 누가복음 10장 7절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37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합창으로 시작합니다.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사랑하여라.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BWV77, 합창)
이 곡을 관통하고 있는 고정 선율(Cantus Firmus)은 다름 아닌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코랄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말씀을 바탕으로 마틴 루터(Martin Ruther)가 작사했으며, 멜로디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오래된 찬송가(1524년)에서 온 것이지요.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이를 두고 "예수가 새 계명인 사랑을 옛 율법에서 도출해 냈듯이, 바흐도 합창의 주제를 옛 코랄의 시작 음정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1)라고 해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BWV77)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멜로디, 즉 칸투스 퍼머스(Cantus Firmus: 고정된 노래)는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을 기반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솔솔솔솔라시도'의 고정 선율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때로는 거울에 반영되듯 뒤집어서 배치하기도 하고, 긴 박자로 해서 바소콘티누오(Basso Continuo)2)의 온음표를 사용해 긴 박자로 확장해 등장시킵니다. 또는 4분음표 박자로 트럼펫이 위엄차게 연주하며 나타납니다. 주변의 다른 음들과 대조를 이루며, 일관성과 구조를 유지하며, 듣는 이들에게 음악의 핵심을 들려주는 역할은 바로 '고정된 노래'인 십계명인 것이죠.
다른 곡 <오르간 소책자 Orgelbüchlein>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BWV635)에서는 '솔솔솔솔솔라시도'의 시그니처 멜로디가 페달에서 연속적으로 열 번 반복하여 등장하며 십계명의 주제를 더욱 드러내고 있습니다. 같은 코랄을 기반으로 한 <클라비어 연습곡집 3권>에 속한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BWV678) 코랄 전주곡에서는 장대하고 무질서한 성부가 각자의 소리를 내는 와중에 율법을 상징하는 듯한 엄격한 캐논 방식으로 테너에서 주제 선율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바흐는 그렇게 예수의 새 계명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을 출애굽기의 십계명으로부터 끌어와서 완성시킵니다.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사랑하여라.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눅 10:7)는, 복음서의 말씀은 본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는 본령이었던 것이죠. 그 사랑은 출애굽기에서 열 개의 계명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바흐는 아마도 모세에게 주어진 열 개의 계명이 구조물과 같이 '고정된 노래'가 되어 예수의 새 계명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흑암에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보듯, 바흐도 오래된 찬송가 안에서 연결의 선분(직선상의 두 점을 양 끝으로 하는 선)들을 발견했을 테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본 암전의 시간, 그러나 모세에게는 흑암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시간이었지요. 거기에 바흐의 걸음이 더해집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바흐의 곡 두 곡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을 오르간 곡 바흐 작품 번호 BWV678을 듣고, 이어서 코랄 칸타타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BWV77)'를 들어 보겠습니다. 숨어 있는 고정된 선율(Cantus Firmus), 십계명의 멜로디 '솔솔솔솔솔라시도'를 귀로 찾아보며 들어 보시지요.
이것은 거룩한 열 개의 계명 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 (BWV678)-J.S.Bach.
Dies sind die heilgen zehn Gebot, Die uns gab unser Herre Gott Durch Mosen, seinen Diener treu, Hoch auf dem Berg Sinai. Kyrieleis. |
너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Du sollt Gott, deinen Herren, lieben (BWV77)-J.S.Bach.
1. 합창 2. 레치타티보: 베이스 3. 아리아: 소프라노 4. 레치타티보: 테너 5. 아리아: 알토 6. 코랄 |
주) 1) 알베르트 슈바이처(202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풍월당) 924-92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