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 있는 '잔혹사'라는 말은 이제까지 보수 개신교계가 퀴어 문화 축제에 대해 저질러 온 행태를 표현하기 가장 적합한 말이었다. 참혹했던 10년이었고, 잔혹하기까지 한 방해를 견디고 이기며 퀴어 문화 축제와 퍼레이드를 간직해 온 이 10년은 사랑이 혐오를 이긴 기간이었다.

모두 열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1-4장까지는 전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퀴어 문화 축제는 2000년 서울에서 시작했고, 2009년 대구, 2017년 부산·제주, 2018년 인천·광주·전주, 2019년 경남, 2021년 춘천으로 퍼져 나갔다. 5-12장은 지역별 축제를 다루면서 그곳에서 벌어졌던 온갖 방해와 거짓, 폭력을 증언하고, 지역별 활동가들의 증언과 소회를 찬찬히 다룬다.

간결하고 쉬우며 명료한 문체로 쓰여 술술 읽히지만, 어쩌다 우리네 교회가, 나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그 사랑으로 이끌었던 우리네 개신교가 이렇게까지 악해졌는지를 발견하며, 솟구치는 분노와 막막함 때문에 진도가 썩 잘 나가지 않게 된다. 서평이라지만, 사실 이 글은 이 단단한 책을 통해 우리네 개신교를 되돌아보게 된 필자의 소회라 할 것이다.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 사랑이 혐오를 이겨 온 10년> / 구권효·나수진 지음 / 한티재 펴냄 / 250쪽 / 1만 6000원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 - 사랑이 혐오를 이겨 온 10년> / 구권효·나수진 지음 / 한티재 펴냄 / 250쪽 / 1만 6000원

지난 10년 퀴어 문화 축제를 줄기차게 훼방하며 저주한 우리네 '주류 개신교계'의 행태에서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지점은 '거짓'이다. '반동성애 운동' 진영의 무수히 반복되는 전형적인 특징은 거짓말이다.

2014년 6월 신촌에서 열린 제15회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서 처음으로 반동성애 진영은 직접 끼어들면서 남의 축제에 재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이 축제를 방해하기 위해 내건 맞불 집회의 주제는 놀랍게도 '세월호 추모'였다. "상식 이하의 파렴치한 행동이었지만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듯했다."(30쪽) 당시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건만, 버젓이 이들은 '세월호 추모'를 내걸고 사실상 퀴어 문화 축제를 가로막으려 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반동성애 진영에 속한 이런저런 사람들과 단체가 내뱉는 거짓말은 이후로도 무수히 이어진다. '과다 노출', '청소년에게 유해한 물품 배부·전시', '불법 상행위' 등의 왜곡·과장된 내용으로 민원을 넣어 장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빈번했다. 장소 점거와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자행하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체포되어 수갑을 차게 되면, 교계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저렇게 동성애를 반대할 수도 없는 동성애 독재국가가 된다'는 주장을 한다(69쪽).

동성애자가 교회에 피해를 주거나 교회를 공격한 적이 없는데, 동성애 때문에 교회가 무너질 것처럼 소리 지르는 반동성애 강사들의 거짓말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거짓 사례를 가져와 선동하고 팩트체크를 통해 거짓이 드러나면 또 다른 거짓 사례를 가져온다. 그러고도 이들은 그렇게 거짓 사례를 전한 것을 한 번도 사과한 적 없다(80쪽). 이런 진영에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 이용희·김지연·염안섭·길원평·이정훈·한효관·백상현 등이고, 이들 모두 <뉴스앤조이>나 <한겨레>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 건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법원은 이들의 주장이 전부 근거 없는 말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81-82쪽). 이들은 "거짓으로 교인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극"해 왔다(86쪽).

여기에 교계 언론도 한몫했다. <국민일보>와 <크리스천투데이> 같은 언론은 행진을 방해하려고 차량 밑에 들어간 사람을 두고 "동성애 반대 시민이 퀴어 차량에 깔렸다"고 보도하기도 하고, GMW연합 같은 단체는 이를 확대재생산하여 "퀴어 차량이 목사님을 밀고 지나갔다"고 서슴지 않고 거짓을 일삼는다(86-87쪽). 퀴어 문화 축제가 '음란'하다고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도 이들이다. <크리스천투데이>의 '올해도 나체 퍼레이드' 같은 기사, 2014년 신촌에서의 축제를 두고 '성소수자들은 난장 축제, 기독교인들은 세월호 추모'라는 제목을 단 기사는 단적인 예다(89쪽).

2023년도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서울시청광장을 사용했지만, 막상 목표는 그것이 아니었다. '찬양'마저도, '회복'마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용 가능하다는 집단, 그들이 '반동성애 진영'이고 이를 이루는 주류 보수 개신교계이다. 2018년 제1회 광주 퀴어 문화 축제에서도 '5.18 민주광장 팬티 축제 웬말이냐'는 피켓을 내세웠으니(166쪽), 세월호건 광주 항쟁이건, 오로지 반동성애를 위해서라면 전부 이용하면서 거짓을 일삼는 집단이다.

아직도 이들은 "동성애는 정신병이고 에이즈를 옮긴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소수자에는 게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도 있고 트랜스젠더도 있지만, 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을 지닌 채 오로지 '항문'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온갖 거짓과 난잡한 것들이 다 섞여 있는 그들이야말로 소돔과 고모라 같다(185쪽). 우르르 몰려와서 온갖 피켓을 들고 위협하고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커다란 음악을 틀어서 상대의 집회를 방해하는, 내거는 구호마다 거짓이 가득하고 들고 있는 피켓마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혐오, 저주로 가득한 그들이야말로 소돔 성에 찾아온 나그네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소돔과 고모라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본질은 동성애가 아니라 폭력, 소수의 나그네를 향한 다수의 폭력이다.

제주 퀴어 퍼레이드 차량 밑으로 들어가 행진을 방해하는 반동성애 개신교인. <제주경제신문>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제주 퀴어 퍼레이드 차량 밑으로 들어가 행진을 방해하는 반동성애 개신교인. <제주경제신문>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두 번째 거론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반대 방식이다. 지난날 독재 정권이나 억압적인 기업과 싸울 때 달리 길이 없는 시민과 노동자의 저항 방식이던 것이, 퀴어 퍼레이드 진행 측에 맞선 반동성애 진영의 방해 방식이 되었다. 과연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강자들이 이런 식으로 약자의 단 하루짜리 권리를 훼방하는 행태가 기독교 정신과 한 줌이라도 닿는가?

보수 교계는 장소 사용 불허를 위해 엄청난 민원을 투척하고, 결국 지자체는 기독교계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에게 안전한 선택을 한다. 줄기차게 퀴어 문화 축제 장소 사용을 불허해 온 부산 해운대구청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한국에서 개신교의 힘이다. 개신교는 세력화되어 있고, 자신들의 '쪽수'를 마음껏 휘두른다. 기도의 힘이 아니라 개신교의 쪽수의 힘이고, 선거에서 발휘되는 표의 힘이다.

개신교의 축제 방해 행위는 전적으로 세력 과시이고 권력 휘두르기이다. 그런데 이들이 마치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정부에 대항하는 저항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개신교는 자신들보다 훨씬 소수인 소수자들에 맞서, 마치 자신들이 약자인 것처럼 대응한다. 그러나 그들의 방해 행위 성공은 철저하게 그들의 세력, 그들의 쪽수, 개신교의 권력에 기인한다. 권력과 쪽수에 기반한 보수 개신교계는 명확하게 복음의 반대편에 있다. 그들은 언제나 사진을 마구 찍는다. 그렇게 유포된 사진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강제로 아웃팅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동성애자에게는 인권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구의 경우 공무원과 경찰의 충돌이라는 특이한 상황 발생에는 홍준표 대구시장의 오만함이 있고, 2023년 서울시청광장에서 축제가 벌어지지 못한 것과 오세훈 시장 재임 기간이라는 점은 별개가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퀴어 문화 축제 장소 사용을 얻기가 그토록 힘든 것도 이와 연관될 것이다. 그래서 보수 교계는 보수 정권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국 개신교는 보수 극우 정권과 거의 동색이라 구분이 안 된다. 그들은 소수의 핍박받는 세력이 아니라 권력과 가까운 힘 있는 집단이다.

성소수자들의 행진을 가로막으려 길바닥에 드러누운 반동성애 개신교인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성소수자들의 행진을 가로막으려 길바닥에 드러누운 반동성애 개신교인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권리와 자유에 취약한 보수 개신교는 세 번째로 돌아볼 지점이다. 어떤 앨라이인 이는 개신교를 향해 "퀴어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 시위 문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며 "누구라도 자기 권리가 침해당하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에 연대해야 하는 게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표현했다(227쪽). 퀴어 문화 축제는 그 자체로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는 인식을 전하고 표현하는 공간이다(230쪽).

한국 개신교는 '기본권', '표현의자유' 같은 것에 매우 취약하다.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과 같은 표현에 익숙해져서 언제든 자유와 기본권을 반납하거나 유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보수 기독교는 어쩌면 인권에 가장 취약한 공간일 수 있다. 성폭력이나 그루밍, 재정 유용 같은 일이 유독 교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사회가 급속한 사회 변화로 인해 민주주의 훈련이 부족하거니와, 교회는 훨씬 더하다. 교회는 민주적 운영이 여전히 낯설고, 담임목사와 교인의 발언권이 동등해야 한다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여기에는 여리고 정복 전쟁과 에스라-느헤미야가 이방 결혼을 깨뜨린 행동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가 있다. 언제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 노출되었던 이들은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한다. 공동체 앞에서 죄 고백을 하는 경우도 다를 것이 하나 없다. 온갖 가혹한 과정을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다. 교회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자유, 기본권, 인권은 교회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고려되는 가치인 셈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부르짖는 대통령과 정치 세력이 검찰을 앞세워 누구보다도 강력한 통치를 내세우는 끔찍한 역설과도 통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대형 집단이라는 점에서 주류 개신교계가 한국 사회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극심하다. '영향력 있는 사람' 되기를 오래 기도했는데, 정말 영향력 있는 집단, 매우 부정적 영향력을 지닌 집단이 되었다.

2023년 7월 1일, 서울 퀴어 문화 축제 반대 집회 '거룩한 방파제' 행진 차량들. 뉴스앤조이 구권효
2023년 7월 1일, 서울 퀴어 문화 축제 반대 집회 '거룩한 방파제' 행진 차량들. 뉴스앤조이 구권효

네 번째로 고려할 것은 '용어의 남용'이다. 반동성애 단체 중에는 '건강한 시민' 같은 단체명을 내세우는 곳도 있다(37쪽). 나름 기독교 신앙을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삶과 연결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시민'으로서의 삶의 내용이 '반동성애'이다.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안전과 민주주의, 정의, 인권 고양과 같은 시민적 가치를 품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동성애'라는 지극히 협소한 기독교 일부의 가치를 '시민'을 내세워 진행한다.

'반동성애 진영'에 속한 단체 가운데, '에스더기도운동본부', '홀리라이프'에 '미래목회포럼' 같은 이름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기도'는 무엇이고, '거룩한 삶'은 무엇인가? '미래 목회'는 반동성애 운동이라는 것인가? 개신교 반대 단체의 이름은 21세기에 이른 한국 개신교 신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23년에 조직된 '3000인 목회자 대회'는 '희망의 대한민국'을 내세운다. 무엇이 희망인가? 이번 동성애 반대 집회의 이름은 '거룩한 방파제'였다. 거룩의 오용과 남용이 넘쳐 난다. 2018년 부산 퀴어 문화 축제를 반대하는 개신교 진영이 내세운 것은 '레알 러브'였지만, 곳곳에 '동성애=에이즈', '항문 성교' 같은 혐오 표현 문구를 내건 피켓이 무수했다.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사랑을 정죄하는 오만함, 그것이 이들의 본질이다.

마지막으로 다루고 싶은 것은 '퀴어 문화 축제의 선정성'이라는 비난이다. 퀴어 문화 축제가 선정적이며 변태 축제라는 소리는 줄기차게 외쳐진다(206-207쪽). 정말 선정적인 다른 것들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정성에 대한 비난은 오직 동성애자를 공격하기 위해 찾아낸 논리에 불과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퀴어 문화 축제를 가 보면 '선정적'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거짓말이라는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퀴어 퍼레이드나 축제에 옷을 벗은 몸을 보여 주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물을 것은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는가'이다. 트랜스젠더 남성에게 있어서 "내가 가장 나일 수 있는 몸을 사람들한테 보여 주는 용기"의 표현, "성소수자가 한국 사회에서 진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그를 담아낸 것이 퀴어 문화 축제이고 퍼레이드이다(110쪽).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성소수자가 당하는 가장 큰 차별"이기에(111쪽), "평소 자기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이 이날만큼은 자신의 온전한 존재를 드러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245쪽).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의 표현이다(246쪽).

동성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공공장소에서 이러지 말고 "안 보이는 데서 자기들끼리"하라는 사람들도 있다(152쪽). 안 보이는 데서 하라는 이런 아우성은 성소수자의 "존재를 없애는 말이었다. 성소수자들을 지우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광장에 나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눈에 띄지 마라',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해라', 끊임없이 비가시화하라는 요구"이다(160쪽).

2023년 7월 1일 열린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서 행진하는 종교인들. 뉴스앤조이 나수진
2023년 7월 1일 열린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서 행진하는 종교인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고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 퀴어 문화 축제의 의의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지금도 나오지 않고 벽장 속에 있는 퀴어들을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모임이다(153쪽). 퀴어 문화 축제는 "성소수자가 너의 옆에 있다"고 증언한다(113쪽).

'마른 몸'이 아니어서 늘 마음 한 켠에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퀴어 문화 축제에서는 민소매를 입고 걸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151쪽).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해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라는 편안함이 있어요."(151쪽)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전하고 싶은 모습 아닌가. 내가 나인 채로 자유로운 삶, 하나님이 내 삶, 내 존재를 모두 받으시기에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그대로 나아갈 수 있는 곳, 그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가치가 아닌가?

성소수자는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우리 곁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보수 개신교계는 이들의 존재가 틀렸다며, 마치 '동성애 옹호 측'과 '반대 측'이라는 서로 다른 의견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고, 언론도 그렇게 보도한다. 어떻게 '존재에 대한 부정'이 의견이 될 수 있는가? 흑인도 백인도 있는데, 흑인의 존재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있으면, 그것도 의견인가? 그것도 다름인가? 틀림과 다름이 혼동되는 세상이다.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는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들이 평소에 어떤 혐오와 차별 가운데 놓여 있는지를 단번에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로 가시화해 낸다. <퀴어 문화 축제 방해 잔혹사>는 그래서 성소수자 혐오의 잔혹사이다. 이들의 반대 운동은 '당신들은 숨죽이고 살아라. 드러나는 순간 이런 일을 당할 것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존재는 막을 수 없지만, 드러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이다.

왜 그 메시지를 사랑이 중심이라는 기독교에서 발하는가? 왜 드러나지 말고 안 보이게 있으라는 메시지를 교회가 발하는가? 사랑과 정의라는 가장 기본적 원칙을 회복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더더욱 위축되고 감소될 것이다. 이슬람을 공격한다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다. 결국 교회는 스스로 교회를 해산시키고 있다. 가장 차별받았던 소수자 종교가, 이제는 소수자를 박해하며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한다. 작금의 '반동성애 운동'은 기독교의 존재 근원 자체를 허물고 있다.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한 이들은 "이곳은 당사자와 지지하는 사람만 있는 곳이라 어디든 안전하다" 여긴다(154쪽). 그래서 퀴어 문화 축제는 누구도 차별·배제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권 운동의 장이 된다(156쪽). 퀴어 문화 축제에는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참가자가 있고, 거기에서 성소수자 삶의 가능성과 지속성을 보게 한다. 퀴어인 청소년들도 "내가 살아도 괜찮구나 혹은 성장한 퀴어도 있구나라는 걸 축제를 통해" 보게 된다(194쪽). 단순히 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194쪽). 이 생명과 자유, 기쁨의 축제는 계속 열려야 한다.

김근주 / 기독연구원느헤미야에서 구약을 강의하고 있으며, 일산은혜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청년부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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