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8월 6일,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7:1-7, 15 / 창세기 32:22-31 / 로마서 9:1-5 / 마태복음 14:13-21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라반이 지연시킨 야곱의 세계에는 두 아내의 질투와 다툼까지 가세합니다. 그의 세계는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를 비틀비틀 유지하면서도 팽창해 나가지요. 야곱의 가족과 소유는 불어났고, 이제 그는 20년 전 홀로 도망쳐 나왔던 사람과는 다른 존재가 됐습니다. 리브가의 장막에서 벗어나 누구의 아들도, 누구의 동생도 아닌 오롯한 자신의 삶을 일궈 온 야곱에게, 여호와는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하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창 31:3, 13).

곧이어 야곱은 다시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숙명 같은 '에서의 발꿈치'는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야곱을 긴장시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야곱에게는 이제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없게 되지요. 약속의 땅,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땅을 향해 걷는 야곱의 심정은 익숙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낯설었을 겁니다. 그가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두려움과 답답함에 짓눌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창 32:1, 7).

야곱의 길이 금의환향이라면 참 좋겠건만, 그는 하란으로 도망쳐 왔던 시절보다 잃을 것이 많아졌죠. 야곱은 도망자 시절 벧엘(하나님의 집)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희미한 목소리를 기억해 붙들고, 에서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시절부터 시작된 약속의 말씀이 야곱의 근원을 형성했으니,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를 언급하며 자신의 세계가 멈춰 버리지 않도록 간곡히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창 32:11~12).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얍복 나루에 당도합니다.

제 이름은 야곱이니이다

암흑이 이불처럼 덮힌 밤의 얍복 나루는 잘잘잘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밤의 세계는 낮의 세계와 달리 눈을 멀게 하고 귀를 열게 하지요. 나뭇잎이 서로 몸을 비벼 대며 내는 일상의 소리도 밤이 되니 기이한 소리로 바뀌어 예민한 야곱의 귀로 쳐들어오고, 밤에 깨어 있는 새들의 소리는 분명 낮에 들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 돼 있습니다. 야곱은 진정으로 홀로 있음을 느껴요. 홀로 있는 밤은 그에게 20년 전 벧엘의 시간을 소환했을까요?

야곱은 돌베개를 찾아 누웠던 젊은 시절의 밤과는 분명 다른 밤을 맞이합니다. 그때도 벼랑 끝에 선 듯했지만, 웅크리고 누웠던 야곱은 온데간데없고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는 야곱이 돼 있습니다. 그가 밤이 새도록 끝까지 붙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브가의 태중에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놓지 않았듯,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얍복 나루의 그 밤에도 야곱은 끝까지 '그 사람'을 놓지 않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피할 곳도 없는 야곱은 어둠 속에서 이름을 묻는 '그 사람'에게 외치듯 답합니다.

"(제 이름은) 야곱이니이다." (창 32:27)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es with the Angel)'.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Jacob Wrestles with the Angel)'.

얍복 나루를 덮었던 어둠이 서서히 새벽을 데려올 무렵, 야곱의 정체성은 새로워집니다. 다시 만나는 세계 앞에서 새로운 날이 꿈틀대는 여명의 빛을 받으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지요. 온몸으로 씨름하며 손으로 감각한 '그 사람'의 힘과 목소리로 가득했던 밤이 물러가자, 지저귀는 새들이 눈부신 새날의 아침이 밝아 왔음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하며 그곳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칭하지요(창 32:30). 이렇게 찾아온 다시 만난 낮의 세계는 지난 밤과 달리 이스라엘의 눈을 밝혀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줬습니다 과연 여기 계신 여호와(창 28:16)의 얼굴을 그는 다시 보았고, '벧엘'로부터 '브니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안에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재창조됐습니다.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새 이름을 부여받은 야곱은 다시 만나 펼쳐질 세계를 향해 걷습니다. 그 길은 단지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길도 아니고, 형의 발꿈치를 향해 가는 길도 아닌, 완전히 새로 조성된 세상을 향해 걷는 길입니다. 달음박질했던 젊고 건강한 두 다리가 아닌 불편해진 다리를 끌고, 속임수과 사기가 아닌 화해를 향해 걷는 '새로운 나의 세계'로 야곱은 꿋꿋이 걸어가지요.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오늘 우리가 함께 경청할 노래는 소녀시대(Girl's Generation)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2007)입니다. 이 곡은 K-Pop의 손꼽히는 명곡으로, 수많은 걸그룹 음악의 원형과 같은 존재로 평가받습니다. 구조적으로 기승전결이 뚜렷한 전개는 대중음악의 완전한 공식으로 귀감이 될 만하지요. 단조 음계를 타고 움직이는 멜로디와 가슴 벅찬 화성의 만남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피하지 않고 분연히 헤쳐 나가라는 희망의 메시지까지 더해집니다. 이 메시지는 단지 대중음악에만 머물지 않고, 2016년 이화여대 시위와 그다음 해 촛불 집회에 이르기까지 새 시대를 향한 '투쟁가'이자 '민중가요'로 자리 잡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 곡의 영어 제목은 'Into The New World'인데요. 흥미롭게도 맨 앞 소절의 선율을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의 '신세계로부터(신세계 교향곡, From The New World)' 4악장 주제에서 차용해 옵니다. 아래 악보에서 볼 수 있듯이 '신세계로부터' 4악장의 도입부를 '다시 만난 세계'가 리듬과 화성을 변형해 감쪽같이 오마주하지요.

(계이름) 라-시도 |시 라라 |라-솔 미솔|라.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 4악장 중에서
(계이름) 라-시도 |시 라라 |라-솔 미솔|라.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 4악장 중에서
(계이름) 라시도시라라 |솔미솔라라. (가사)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계이름) 라시도시라라 |솔미솔라라. (가사)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이 자신의 고향인 체코를 떠나 당시 음악적으로 척박했던 미국에 새롭게 정착하며 작곡한 곡입니다. 그러니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드보르작의 선율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밝은 여명 또한 동시에 차용한 것과 다름없지요.

이제 저 멀리 해 돋는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허벅다리를 절뚝이며 걸어오는 야곱을 만나 보겠습니다. 단조의 우직한 사운드와 가슴 벅찬 조바꿈의 구간, 마지막에 으뜸음으로 회귀하지 않고 가사 또한 열린 결말로 과감하게 마무리하는 '다시 만난 세계'를 2007년 소녀시대의 데뷔 앨범 음원과 2023년 3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 편곡, 두 가지 버전으로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다시 만난 세계
(작곡 KENZIE / 작사 김정배 / 편곡 KENZIE / 노래 소녀시대)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 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 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 줘
상처 입은 내 맘까지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이렇게 까만 밤 홀로 느끼는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이
이 순간 따스하게 감겨 오네
모든 나의 떨림 전할래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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