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7월 30일,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05:1-11, 45b / 창세기 29:15-28 / 로마서 8:26-39 / 마태복음 13:31-33, 44-52

제 친한 친구가 영화를 보는 방식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야겠어요. 그는 줄거리를 요약한 영화 리뷰를 먼저 시청한 다음 그제서야 영화를 차근히 보기 시작합니다. 모든 갈등 상황과 결말과 어느 정도의 반전에 놀랄 것을 대비해 놓고, 서사의 복판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방어로 무장한 전지적 '나'는 서사가 던져 주는 긴장과 우여곡절에 차분히 대응합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쥔 인물의 행동에 속지 않고, 오히려 전지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죠. 결말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으니 박진감보다는 안전한 회귀를 통해 오는 이완을 택하는 경우입니다.

작가나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관객이 배반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OTT 플랫폼이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지금,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해요. 반복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은 이야기의 결말에 집착하기보다는 서사가 흘러가는 방식을 즐기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으니까요. 제 친구의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공식은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돌려 보는 것입니다. 박진감 있는 전개와 갈등의 절정이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긴장이지만, N차 관람자에게는 퍼즐이 풀리는 과정을 위한 빌드업에 불과한 거죠. 이러나 저러나 이야기를 향유하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플로우'를 타는 방식이 다를 뿐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나름의 '긴장'과 '이완'을 지닌 채 나아가고 있는 거죠.

긴장과 이완

도망의 끝에서 비로소 라헬을 만나 눈물의 입맞춤을 했을 때(창 29:11), 야곱의 모든 긴장은 이미 풀린 듯하지요. 눈물의 입맞춤과 얼싸안음의 찰나에서 야곱은 그의 어머니 리브가에게 안긴 듯 포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긴장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과 만나 야곱에겐 트라우마로 남아 있지요. 추위와 배고픔, 노숙과 도망의 시간을 거치며 너덜너덜해진 그의 몸은, 우물 곁 라헬을 만나는 순간 모든 긴장과 수축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드디어 끝났다" 하고 안심했을 겁니다.

라헬이 끌고 온 양들이 시원한 우물 물을 흡족히 마실 때 야곱 또한 해갈이 됐을 것이고, 깨끗하고 정갈한 라헬의 의복과 좋은 내음은 야곱이 그리워하던 리브가의 장막을 순식간에 데려왔을 겁니다. 야곱은 본디 조용하고 장막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요.(창 25:27) 사냥과 들과 바람, 추격과 용맹의 사람인 에서와 달리, 야곱은 고요하고 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라헬을 아내로 맞아 그 고요를 되찾을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노동했던 7년의 시간이 단 며칠같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을 겁니다.(창 29:20) 그러나 라반의 등장이 만만치 않습니다. 야곱의 고요를 깨는 사건이 하필 그의 결혼식에 발생하고 말지요.

요제프 폰 퓌리히(Joseph von Führich, 1800~1876), '아버지의 가축 떼를 끌고 온 라헬과 만나는 야곱(Jacob Encountering Rachel with her Father's Herds)',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요제프 폰 퓌리히(Joseph von Führich, 1800~1876), '아버지의 가축 떼를 끌고 온 라헬과 만나는 야곱(Jacob Encountering Rachel with her Father's Herds)',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방법

야곱이 7년의 기다림 끝에 예정대로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았다면, 이 이야기는 음악적으로 '정격종지(바른마침, Authentic Cadence)'에 비유해도 좋겠습니다. 화성학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몇 개의 공식을 가지고 있는데요. 정격종지는 사람의 귀로 듣기에 가장 안정적인 발돋움을 거쳐 고향으로 회귀해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의 '끝맺음 제스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5도 화성(딸림음)'에서 '1도 화성(으뜸음)'으로 안전하고 바르게 돌아오는 화성학적으로 완전한 마무리이지요.

그러나 야곱의 인생에는 태생적으로 비화성(화음 밖의 음) 같은 존재들이 있어 왔죠. 외삼촌 라반의 등장은 야곱의 서사가 곱게 흘러가는 것에 어깃장을 놓으며 인생의 구도를 틀어 놓습니다. 라반의 속임수로 야곱은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아내로 맞게 됐습니다. 그 후 라헬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기까지, 야곱의 일주일은 불안과 기대로 점철됐을 겁니다. 마치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야곱이 겪어 온 관계의 긴장이 트라우마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듯한 극한의 날들이었겠지요. 라반의 속임수로 인해 야곱의 고요는 이미 깨진 지 오래고, 여기에 실바와 빌하까지 등장하며 야곱의 실뜨기 같은 인생을 더욱 헝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야곱 인생의 최대 '빌런'인 라반은 외삼촌, 장인, 고용주라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를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속이는 라반과 '위종지'

음악의 서사를 안전하고 바르게 마무리하는 '정격종지'와는 달리, 끝맺음을 속이는 속임수 종지인 '위종지(거짓마침, Deceptive Caden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이 흘러가는 물길을 교묘히 틀어, 만족스러운 이완의 상태로 가는 것을 막는 음악적 기법입니다. 청자의 기대를 비껴가며 으뜸음인 안전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묘원하게 만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전개로 체념과 실망을 제공합니다. '5도 화성'에서 '1도 화성'으로 가지 않고 이웃한 '6도 화성(버금가온음)'으로 감으로써 긴장과 불안을 증폭시키는 거죠.

독일의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72).
독일의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7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성토마스교회 전임자로 잘 알려진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는 자신의 작품 '성서적 소나타(Biblical Sonata)' 세 번째 곡에서 '야곱의 결혼식(Jacob's Wedding)'을 음악적으로 재현합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으로부터 시작해 결혼식까지의 스토리텔링을 담은 이 곡은, 표제음악으로서 음악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지요. 가사 없는 기악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유행했던 수사학을 이용해 면밀히 작곡하거든요. 성서가 제공하는 시각적 내용을, 쿠나우는 음형과 모티브를 통해 자신감 있게 청각적으로 재현합니다.

곡의 중반 이후 등장하는 '라반의 속임수'(13분 49초경) 파트에서, 쿠나우는 '위종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거짓과 속임으로 야곱의 해피 엔딩을 유예시킵니다. 라헬 대신 레아와 결혼하게 하고, 노동의 기간이 7년에서 14년으로 늘어나고, 더불어 살아야 할 아내들와 자식들의 구도가 복잡해지듯 말이에요. 뿐만 아니라 야곱과 라반이 서로를 향해 주장과 변명을 속사포같이 쏟아 내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지요. 쿠나우는 '야곱의 결혼식' 전체 25분에서 이 부분에 6분 정도를 할애하고 있지만, 뒤엉키며 기대를 비껴가는 전개를 통해 이 곡의 앞뒤에 배치한 곡들의 정서를 오히려 극명하게 대비시키기도 한답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요한 쿠나우의 '성서적 소나타' 중 '야곱의 결혼식'입니다. 여덟 개의 작은 소제목과 함께 듣는 쿠나우의 소나타는, 마치 그림 성경을 보는 듯하고, 이야기 성경 동화를 듣는 듯하답니다. 긴장 가득한 야곱의 삶, 영원한 언약은 대체 어느 틈에서 발견해야 할지 다소 난감한 창세기 29장의 이야기를, 코르 판 바헤닝언(Cor van Wageningen)의 오르간 연주로 들어 보시지요.

'성서적 소나타 3번: 야곱의 결혼식' - 요한 쿠나우

 

1. 사랑하는 사촌 야곱의 도착으로 라반 가문의 기쁨(00:19)

The joy of the family of Laban at the arrival of their kinsman, Jacob

 

2. 사랑의 속삭임으로 인해 힘들지 않았던 야곱의 종살이(05:24)

The servitude of Jacob is indeed Laborious, but it is lightened by his love for Rachel

 

3. 라헬의 친구들이 부르는 결혼 축가(09:39)

The Bridal Song, Sung by the companions of Rachel

 

4. 결혼식의 환희와 축가(12:09)

The rejoicing for the wedding, and the congratulations

 

5. 라반의 속임수(13:49)

The Deception of Laban

 

6. 행복에 겨운 신랑, 그의 마음 속의 불길한 예감, 용기를 취하지만, 잠이 오고,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든다(18:49)

The bridegroom loving and content, His heart fortells him some ill, He takes heart again, He becomes sleepy

 

7. 속은 것에 대한 야곱의 괴로움(21:18)

Jacob’s discontentment as he finds out Laban’s manipulation

 

8. 결혼식의 기쁨을 반복하다(22:49)

The rejoicing for the wedding is rep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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