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3년 7월 23일,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39:1-12, 23-24 / 창세기 28:10-19a / 로마서 8:12-25 / 마태복음 13:24-30, 36-43
도망자의 눈

질주하는 도망자의 눈은 등 뒤를 향하게 될까요, 앞을 더 향하게 될까요? 도망자의 시간은 쫓는 자에 의해 결정되고, 쫓는 자의 공간은 도망자로 인해 결정됩니다. 장자의 명분뿐 아니라 형의 축복까지 가로챈 야곱은 하란을 향해 달아나는 신세가 됐고, 그의 목숨은 죽을 기세로 쫓아올 형 에서로부터 도망치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자궁에서부터 시작된 쌍둥이 형제의 비극의 파동은 창세기 27장에 와서 극에 달하고, 음모와 거짓으로 복을 가로챈 야곱은 황폐한 길 위에서 돌을 베개 삼아 몸을 눕힙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웅크린 몸을 더욱 구겨지게 만들고, 차가운 바닥과 딱딱한 돌베개의 처지는 그가 받은 복을 생경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질주했던 울퉁불퉁한 길의 끝은 정해져 있고, 도피의 마지막은 죽음이거나 끝끝내 고립일 테니, 야곱은 그야말로 길의 끄트머리에서 죽음 같은 잠을 청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하나님은 꿈을 주시지요. 이삭이 모리아산 제단에 묶여 누워 있던 마지막 순간 위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듯, 야곱은 꿈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보고 듣습니다.

눈을 들기

달려왔던 길과 달려갈 길의 끝이 뻔한 수평 위에 놓인 야곱의 눈은,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해 펼쳐져 있는 초월의 사닥다리를 봅니다. 그것은 분명 땅을 지지하고 있고 막원한 하늘을 향해 드높이 세워져 있으니, 비로소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장면을 야곱은 보게 된 것입니다. 수평적 세계와는 반대로 끝을 알 수가 없고 가늠할 수도 없으며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수직적 세계인 초월의 하늘은, 야곱이 누운 땅으로부터 시작된 사다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야곱의 감은 눈은 위를 향하고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봅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야곱의 꿈(The Dream of Jacob)',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야곱의 꿈(The Dream of Jacob)', 프랑스 니스 샤갈박물관 소장

야곱이 웅크린 몸을 뉘인 차갑고 딱딱한 땅은 야곱 자신과 자손에게 주어질 언약의 장소가 됩니다. 수평으로 펼쳐진 과거, 떠나온 등 뒤의 길에 계셨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이제 하늘 위에 계신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질주하는 도망자의 눈은 등 뒤도 앞도 아닌 위를 향하게 되고, 야곱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비로소 확인하고 이렇게 고백해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하나님을 발견한 그곳에서, 야곱의 길은 도피와 도망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이어진 약속의 땅이 됩니다. 돌베개가 놓였던 도망자의 폐허는 "하늘의 문"(창 28:17)으로 바뀝니다. 이제부터 그의 마음의 눈은 하늘의 문, 하나님의 집을 향하게 됩니다.

내 마음 저 높은 언덕에 있네,
내 마음 여기에 있지 않네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는 신비한 숲과 신령한 바람이 부는 고원(Highlands)을 칭송하는 시를 짓습니다. 거룩한 용사가 태어나는 언덕이자, 숲이 울창히 우거지고 동물들이 뛰노는 그곳은 시인이 지닌 정체성의 고향이자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시인은 스코틀랜드의 얼과 영혼이 있는 하늘의 언덕을 동경하며 그리운 마음을 노래합니다. 하늘과 닿은 높은 언덕의 평원은 시인에게 이상향의 장소, 평온이 깃든 순수함의 성소(Sanctuary)인 것이지요.

무한한 동경의 그곳은 에스토니아 출신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에 의해 소리의 성소로 전환됩니다. 패르트는 현대음악의 복잡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시대적 음향을 거부하고, 오히려 명료한 음악 구조와 순결한 사운드로 기도하는 듯한 음악을 창조해 내는 독특한 언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이 곡을 심층적으로 서서히 상승시켜 하늘의 소리를 이룩해 갑니다. 마치 하늘의 문을 향해 급하지 않게, 느리게 걷는 것처럼 말이지요.

패르트는 동방정교회의 신앙적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침묵과 묵상의 영성이 깊이 배어 있지요. 단일한 박자와 절제된 화성, 최소한의 조성을 통해 음악의 행간이 오히려 드러나고, 몰입과 주의력이 주는 신비를 빚어내기도 합니다.

질주와 쫓김으로 헐떡이며 시작된 수평적 달음질은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아 누우며 수직으로 기울어지고, '하늘의 문'을 향해 뻗은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린 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번 주의 경건한 청음은 아르보 패르트의 '내 마음 저 높은 언덕에 있네(My Heart's in the Highlands)'입니다. 높은 평원에 도달해 드디어 평온한 마음으로 인도하는 이 곡으로 초대합니다.

아르보 패르트의 정적이고 신비적인 음악은, 일상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곤고한 영혼을 그가 만든 드넓은 초월의 사닥다리로 인도해 줄 거예요. 어디로 가든지 어디로 피하든지 주의 영이 계시는(시 139:7) 고원에서 함께 들어 보시지요. 2015년 네덜란드 레이덴 호글란세교회(Hooglandse Kerk)에서 연주된 실황 버전으로, 카운터 테너 카스파 크뢰너(Kaspar Kröner), 즉흥 현대무용가 쿠스다 겐조(Kenzo Kusuda), 오르가니스트 안톤 도른하인(Anton Doornhein)이 함께합니다.

My Heart's in the Highlands

 

My heart's in the Highlands, my heart is not here,
My heart's in the Highlands a-chasing the deer -
A-chasing the wild deer, and following the roe; (=ree)
My heart's in the Highlands, wherever I go.
Farewell to the Highlands, farewell to the North
The birthplace of Valour, the country of Worth;
Wherever I wander, wherever I rove,
The hills of the Highlands forever I love.

 

내 마음 저 높은 언덕에 있네, 내 마음 여기 있지 않네
내 마음 저 높은 언덕, 사슴을 사냥하는 곳
들사슴을 좇으며, 노루를 따르니
나 어디 있든지 내 마음 저 높은 언덕 고원에 있네
높은 언덕에게 작별 인사를, 북쪽 나라에게도 작별 인사를
용맹함이 태어나는 땅이여, 귀한 그곳의 나라여
나 어디서 방황하든 어디에 있다 한들
저 높은 언덕, 끝내 사랑하리라

 

Farewell to the mountains high cover'd with snow;
Farewell to the straths and green valleys below; (=breed dal)
Farewell to the forests and wild-hanging woods;
Farwell to the torrents and loud-pouring floods.
My heart's in the Highlands, my heart is not here,
My heart's in the Highlands a-chasing the deer
Chasing the wild deer, and following the roe;
My heart's in the Highlands, wherever I go.

 

눈으로 뒤덮인 산이여 안녕
드넓은 골짜기여 그리고 푸르른 골짜기여 잘 있으라
숲이여 그리고 나뭇가지 엉클어진 산들이여 잘 있거라
거센 물줄기 그리고 요란하게 소리 높은 물결이여 이젠 안녕
나의 마음 저 높은 언덕에 있네, 내 마음 여기 있지 않네
내 마음 저 높은 언덕, 사슴을 사냥하는 곳
들사슴을 좇으며, 노루를 따르니
나 어디 있든지 내 마음 저 높은 언덕 고원에 있네 (번역: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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