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과 피해자 섹슈얼리티'는 대한성공회 양성평등위원회 전문위원이자 안양나눔여성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강은정 활동가의 연재입니다.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 과정과 맥락을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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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 매체에서 기독교 성폭력에 대한 보도나 심층 취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이 없고 피해자 탓을 하는 목회자들이거나, 자진 사퇴를 면피 수단으로 삼아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는데도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할 장치·제도가 없는 각 교단을 지적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연재가 저로서도 부담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서 더 시의적절하고 필요한 논의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지난 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맥락에서 구성된 '피해자 섹슈얼리티'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사회 법에 마련된 성폭력특별법이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특수한 어려움을 해소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교계 운동 주체들은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들은 교단과 대중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알리고 대안을 찾기 위해 여러 전략과 담론을 구성해 왔는데요.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한 발 후퇴라고나 할까요?

우선, 지난 회 차에서는 교단이 부여한 막강한 권력을 매개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몇몇 목회자의 권력 문제를 가시화하기 위한 '제왕적 목회자' 담론, 진짜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형성된 '요보호 여성 피해자' 담론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살펴봤습니다. 이러한 프레임이 야기하는 실천적 한계와 우려들도 짚어 봤고요.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피해자 재현을 극단화하거나 단일화·일반화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안전과 감수성을 점검하도록 하는 담론 연구와 기독교 성폭력 개념의 재구성을 제안해 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피해자가 처한 위치로 좀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간' 논쟁에 시달린 교회 내 피해자들
"차라리 '상간녀'가 되겠소이다!"

사회 법의 성폭력특별법은 반드시 '폭행 또는 협박'이 물리적으로 드러나야만 작동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스스로 목숨을 내걸 만큼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법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목회자 성폭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갈 구실을 제공하는 근거로 작동하고 있죠. 심지어 명시적 폭행이 없었다는 이유로 '음란 마귀', '사탄', '이단', '꽃뱀' 등 피해자 비난에 더욱 힘을 실어 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고요. 이러한 문제가 비단 기독교 성폭력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현장에서는,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성범죄 판단 기준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비동의 강간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요.

더군다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루밍', '가스라이팅', '업무상 위력',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폭력'과 같은 폭행·협박을 수반하지 않는 성폭력 유형·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러니 장기간 목회자에 의해 가스라이팅을 당하거나, 신뢰 관계에 기반한, 신앙을 매개로 피해를 입은 대다수의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회 법으로 구제받을 길이 없었죠.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지원해 온 활동가들은 "차라리 강제로 당했다면, 저항한 흔적이라도 있었다면 피해자들을 지원하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전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사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 법의 시선으로 볼 때 교회 성폭력은 목회자와 신도 간의 '간통', 즉 '화간和姦'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그렇게 오래 일하면서 딱 두 건이 사회 법으로 갔어요. 하나는 간통죄로 갔죠. 도저히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피해자가 '나는 어떻게든 이 사람(가해자)을 벌주고 싶다. 간통죄로라도 벌을 주겠다' 이래서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 건 외에는 없었어요. 애초에 (목회자 성폭력은) 법으로 갈 수도 없고 고소 자체도 성립이 안 되는 사건들이었죠."

위와 같이 사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가 당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최후의' 수단은 '간통죄'였습니다. 기독교 성폭력 피해자는 그토록 신뢰했던 국가와 교회라는 안전망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채, '피해자'가 아닌 목회자와 '불륜'을 저지른 '꽃뱀'이자 '상간녀'가 되고서야 비로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처절하죠. 당시 형법 제241조 간통죄1)의 보호법익은 '건전한 성적 풍속으로서의 성도덕'이었기 때문에 '2인 이상의 자의 성기 결합' 행위에 대해서만 성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피해자는 자신 또한 필요 공범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가해자를 처벌해야겠다는 의지에 따라 더 이상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간통을 저지른 범죄자, 즉 '상간녀'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한국의 간통죄를 알아봐야겠는데요. 간통죄는 1988년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이후 무려 네 번의 위헌법률심사를 받아 왔습니다.2) 2015년 2월 다섯 번째 위헌법률심사에서 이 법이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건전한 성 풍속 및 일부일처제 혼인 제도 보호'라는 보호법익을 실질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인정돼 제정 62년 만에 폐지된 '과거의 법'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운동은 각 교단법과 사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시대를 역행하는 모순까지도 감수했던 것이죠.

저는 이것이 굉장히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피해자의 용기와 활동가들의 결단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눈앞에 그려져서 괴롭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위의 사례는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주체들이 투쟁했던 한국 사회와 기독교 조직의 가부장성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대변한다고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불신당했고, 공소시효 종료나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묵살당했습니다.

목회자가 '화간'은 괜찮은 건가요?:
'간음' 개념을 포함하게 된 교회 성폭력 정의

이렇게 '그루밍'이나 '가스라이팅' 같은 개념이 없던 당시 상황에서, 폭행·협박이 제거된 방식으로 성폭력을 가했던 제왕적 권력의 목회자들과 책임 회피만 반복하는 교단들, 최협의 성범죄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 법에 대항해 구성된 운동 담론이 바로 '화간 비판'입니다. 말하자면, '화간처럼 보이지만 성폭력이다'라는 것입니다. 성폭력을 주장하는 피해자에게 화간이라고 책임을 덧씌우는 일이 반복되니, 활동가들이 아예 '교회 성폭력은 대부분 화간의 형태를 띤다'고 정리한 것인데요. 그렇다면 가해자 측면에서는 어떤가요?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아니라 '목회자와의 화간'이면, 그러면 괜찮은 건가요?

화간 비판 담론은 종교 지도자라면 당연하게 요구받는 최소한의 윤리 기준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가해 목회자들을 규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륜·화간'으로 보이는 목회자 성폭력의 기저에 한국 기독교 목회자가 가진 막대한 권력관계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독교 안팎에 고발하기 위한 전략적인 운동 담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성폭력 관련) 지침서를 처음 낼 때, 진짜 맹렬하게 일하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 (중략) 그래서 그 지침서를 내면서 교회 성폭력 정의에 '간음을 포함한다'라고 넣었던 거에요. 그게 교회 성폭력의 특수성이었던 거죠."

이렇게 교회 성폭력의 정의에는 '화간'이나 '간음' 같아 보일지라도 그 상대가 목회자일 경우에는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는 '간음' 개념이 추가됐고,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제 논문에서 각 교단이 발간한 지침서 등 문헌을 분석한 결과3), 대부분의 문헌이 교회 성폭력의 정의에 '화간'이나 '간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22년 7월 4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성범죄 양형 기준'을 수정하면서, 양형 기준 가중 요소인 '인적 신뢰 관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부분'의 피해자 유형에 '신도'를 포함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성범죄 양형에 목회자와 교인 간의 신뢰 관계를 고려할 것인지 여부가 재판부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면, 이제는 인적 신뢰 관계를 이용한 신도 대상 성범죄가 가중 요소로 고려될 테니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이 양형 기준이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현장과 피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추가 분석도 필요하겠군요. 

'친족 성폭력'을 차용한 이유:
'화간'을 돌파하라

교회 성폭력이 화간·간음·간통·불륜으로 내몰리고 굴절될 위기에서, 운동 주체들은 대안 담론을 모색했습니다.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은 폭행·협박이 없는 형태로 발생하는 목회자 성폭력의 '관계 메커니즘'을 강조하고, 사회의 보호를 이끌어 내고 피해자의 순수성과 피해의 심각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친족 성폭력' 개념을 전략적으로 차용합니다.

"당시 교회 성폭력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성인 피해자인 경우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동의한 거 아니냐' 뭐 이런 식이 되는 거죠. 그런데 '친족 성폭력' 같은 경우에는 피해자의 동의 여부나 이런 것들을 묻거나 확인하지 않잖아요."

시공간을 막론하고 가장 심각한, 반인륜적이고 비상식적인 성폭력을 거론할 때 우리는 쉽게 '친족 성폭력'을 떠올릴 수 있죠. 보호하고 지켜 줄 것이라 기대했던 가족에 의한 성폭력이므로 사회적으로도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수용되고요. 더군다나 거룩하고 정결한,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친족 성폭력 담론은 모든 의심과 의문을 단번에 일축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력한 충격요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과 같이, '목사님이 교인을?'이라는 방식으로 작동되어, 기독교에 대한 모든 문화적 의심을 해소하는 동시에 다른 성범죄보다 훨씬 더 높은 처벌을 기대할 수도 있었던 것이죠.

충격요법 외에도 친족 성폭력 개념은 목회자 성폭력이 발생하는 주요 맥락을 설명하는 데 다방면으로 적절했습니다. 가해자가 가진 '권력'과 '관계성'을 잘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인데요.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지닌 권력을 가족 내에서 아버지가 가진 가부장적 권력으로, 교회 내의 교우 관계를 가족 내의 복잡한 관계로 빗대어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냉철하고 솔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형제, 자매'라는 말을 교회 안에서 많이 들어 보셨나요? 사용해 보셨나요? 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당연하게 '형제님, 자매님, 한 가족'이라는 찬송을 불러 왔을까요? 그러는 동안 공동체 가치에 밀리고 희생되는 개인이나 피해자가 있지는 않았을까요? 호칭이나 문화적 요인 외에도 가부장적 조직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장치나 관습이 더 있지는 않나요? 이러한 호칭이나 문화가 우리의 논의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활동가들은 목회자 성폭력이 복합적·상호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인 만큼 사안의 해결이 애매하고 어렵다는 점, 여타 성폭력 유형보다 지속적·반복적이기 때문에 피해의 심각성이 크다는 점, 목회자가 아버지처럼 강력한 신뢰를 받는 존재라는 점, 피해자들이 공동체와의 관계를 포기할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발설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현재까지도 친족 성폭력 개념이 목회자 성폭력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개념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버지한테 피해를 당해서 신고하면 아버지는 잡혀가고, 엄마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아이는 공동체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거잖아요?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측면에서 교회 성폭력 피해자도 마찬가지인 거죠. 교회 공동체가 와해가 되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되는 거죠."

또한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가 온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를 고소했을 때 야기될 가족 해체나 경제적 어려움 또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바,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가족과도 같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는 죄책감과 부담감 때문에 쉽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친족 성폭력과 목회자 성폭력이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가부장적 신 이미지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신비롭고 절대적인 '목회자의 권위'가 더해지면서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의 친밀감과 결속력은 이들에게 더 이상 안전망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피해자들에게 교회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신뢰 가는 조직이 아닙니다. 그랬던 적은 있을까요? 왜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이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활동가들이 이 친족 성폭력 개념을 전략적으로 차용한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려 함은 아니었을까요?

"아버지도 고소할 수 있는데 목사를 왜 고소 못 하겠어요. 얼마든지 문제를 드러낼 수 있죠. 다르게 생각하면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이거(성폭력 문제)에는 성역이 없다."

위 활동가는 친족 성폭력 개념을 전복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라고 여겨졌던 교회에서도 성폭력은 발생한다는 것, 오히려 언제나 안전하기만 한 공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가시화하는 것이죠. 활동가들이 교회 성폭력 운동 담론과 전략을 구성하면서 친족 성폭력과 목회자 성폭력의 유사성을 단순 분석한 것4) 외에도, 위와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친족 성폭력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만'의 문제인가
우리 모두의 문제인가

"실제로 가해자가 가해 행위를 하면서 '아빠라고 생각해. 내가 너의 영적인 아빠야'라고 말하는 게 거의 모든 사건, 특히 피해자가 어리거나 20대 초중반까지인 사건에서는 거의 다 나와요. 그리고 실제로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본인의 친아빠 이상의 애착 관계를 느끼기도 하고요. '하나님 아빠, 목사님 아빠' 이런 경우가 많은 것이죠. 그러다 보니 내가 폭력을 당했다고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좀 많이 걸리죠.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하고 고민했을 때),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친족'이 가장 가깝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거죠.)"

이쯤 되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아빠'라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접촉과 행위에 대해서는 한 번쯤, 아니 계속해서 의심하고 되묻고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왜 기독교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니 기독교 여성들은 목회자의 권력·권위·발화에 이토록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 걸까요? 혹시 여러분도 이 취약한 위치에 놓여 계신가요? 그렇다면 이 문제는 성폭력 피해자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 모두의 문제일까요?

한국 기독교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종교적 관계 맺음 방식이 왜 '아빠와 자녀'인지, 10~20대 피해자들이 이러한 '아빠' 역할의 목회자에게 쉽게 의존하게 되는 심리적·사회적 맥락은 무엇인지 또 다른 지면에서 연구돼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논의해 보고 싶은 것은, 위와 같은 담론이 피해자를 혹여나 '어리고 미숙한, 연약하고 순종적인 기독교 여성'이라는 납작하고 단일한 정체성으로 왜곡시킬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피해자를 연약한 '요보호'의 자리에 위치시키게 되면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가 더 수월해진다는 유혹 때문에, 결국 피해의 원인을 다시 피해자에게서 찾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또한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닌, 그들'만'의 문제로 축소되고 파편화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를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피해자와 피해의 양상·유형을 단일하게 범주화하는 운동 담론과 실천은, 이러한 측면에서 언제나 비판적으로 분석되고 재독해·재구성돼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부분에 대한 관심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여전히 견고한 현장
운동 담론의 성과와 한계 동시에 살피기

운동 주체들은 각 교단의 가부장적 교단법과 사회 법의 사각지대에서 외면당하는 피해자들의 상황을 더욱 잘 대변하기 위해 기독교의 문화적 특수성과 신앙 공동체의 특성을 설명할 개념이 필요했습니다. '화간 비판' 담론과 '친족 성폭력' 개념은 폭행·협박이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발생하는 목회자 성폭력에 대한 비판, 비기독교인들이 경험해 보지 않은 교회 공동체의 문화와 관계성, 또 가족 혹은 그 이상의 친밀성과 사랑, 종교적·심리적 문제 등 기독교 조직의 특수성을 단숨에 설명해 내는 데 실제로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적' 문제와 '관계적' 특성 때문에 기독교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기가 까다롭다는 현장의 어려움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25년간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쟁취하려 노력해 온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쟁취했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이죠. 혹시 반성폭력 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여성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독립적인 개인 주체'로 세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다른 문제, 더 크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러한 면에서 기독교 문화적 측면에서 젠더 문제를 연구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러한 문제를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살핀 여성신학자들의 연구가 이미 많이 있으니, 여기에 더해 여성학 분석 틀로 기독교 조직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궁금한 거죠.

"지금도 교회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할 때면 (교육생들이) '왜 우리 목사들을 가해자로 만들어요?'라고 얘기하다가도, '아니 그런게 아니라, 교회 성폭력이 친족 성폭력과 이런 이런 점이 비슷합니다'라고 하면 '쩝…' 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성폭력의 심각성을) 실질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친족 성폭력 개념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활동가들은 현재까지도 기독교 성폭력 예방 교육 및 성 인지 감수성 등을 주제로 한 인식 개선 강의나 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언급해야 할 현장에서 친족 성폭력 개념이 유용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가진 권력을 설명하는 것 외에 공동체 내 역동과 사후 회복 과정까지를 설명하는 데도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여전히 이 '친족'이라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독교 조직의 특수성과 목회자 성폭력의 특성이 있다는 것이겠죠. 25년 전 운동 현장에서 구성된 담론과 전략이 오늘날 현장에도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하는 활동가들의 한숨 섞인 응답이 여러분은 어떤 의미로 읽히시나요?

사회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은 성폭력에 무지하고 왜곡된 인식을 지닌 각 교단의 기득권 책임자들을 상대로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야 했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 조직과 전면으로 대치하면서도 여러 가지 담론·전략을 통해 설득하고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구슬리는 '협상의 정치'를 전개해 왔습니다.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담론에서 피해자의 섹슈얼리티는 때로는 '화간'을 저지르는 음란하고 위험한 '상간녀'나 '꽃뱀'이 돼야 했고,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가족 굴레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심약하고 순결한, 연약하고 미숙한, 어리고 불쌍한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돼야 했습니다. 이 언저리 어딘가 불안정하고 취약한 위치에 놓여진 피해자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요? 오늘날 교회 성폭력 피해자의 섹슈얼리티는 어디쯤에 있나요? 최근 보도들을 보셨다면, 어떻게 읽히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사회적 흐름과 변화를 면밀히 살피면서 기독교 내 반성폭력 운동의 담론과 전략을 꾀해야 할 텐데요. 성폭력 피해자가 '요보호' 대상이나 '수동적' 주체로 고정되지 않고, 또 '상간녀'라는 여성 혐오적 존재가 아닌 '성적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도모하는 운동 담론과 실천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번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교회 문화와 관습에 관한, 어쩌면 답이 없는, 어쩌면 생각을 깨는 도전적인 질문을 많이 드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1) 「형법 제241조(간통)」 ①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 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2015. 2. 26.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및 효력 상실 / 2016. 1. 6. 형법 개정으로 정식 삭제)
2) 1990년부터 4차례(헌법재판소 1990. 9. 10. 선고 89헌마82 결정; 헌법재판소 1993. 3. 11. 선고 90헌가70 결정; 헌법재판소 2001. 10. 25. 선고 2000헌바60 결정; 헌법재판소 2008. 10. 30. 선고 2007헌가 17·21 결정)에 걸쳐 헌법재판소는 간통죄 처벌 규정의 위헌성을 판단해 왔다.
3) 제 논문 90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위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친족 성폭력과 교회 성폭력의 유사점을 정리해 놓은 문헌들은 제 논문에 수록돼 있습니다(논문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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