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과 피해자 섹슈얼리티'는 대한성공회 양성평등위원회 전문위원이자 안양나눔여성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강은정 활동가의 연재입니다.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전개 과정과 맥락을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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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회 차까지는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촉발된 199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맥락을 살펴봤습니다. 특히 지난 글에서는 각 교단별 성폭력특별법 제정이 난항을 겪는 동안 운동 주체들이 교단 헌법 개정, 예방 교육 의무화, 지침서 발간 등의 대안적 실천을 모색한 과정을 알아봤습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지만, 지치지 않고 달린 피해자들과 운동 주체들 덕분에 최근 운동은 여러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주제인 '피해자 섹슈얼리티'를 다뤄 볼 텐데요. 운동의 맥락 속에서 '피해자 담론'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비판적으로 살피는 이유는, 그래야만 피해자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 전체(운동 진영을 포함)의 인식 수준을 고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어떻게 보다 안전하고 평등한 기독교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왜 '제왕적' 목회자라고 했을까:
목회자는 어떠한 권력을 갖는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기독교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이 기독교 내외에 가시화됐고, 안타깝게도 이제는 더 이상 처음처럼 충격적이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모른 척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사태까지 온 것이죠. 그럼에도 여전히 각 교단들은 피해자에게 가해자와의 화해나 용서를 종용하거나,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등 '2차 가해'를 서슴없이 저질러 왔습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어렵게 성사된 교회 재판 중에 피해자의 실명을 거론하거나, 공식 석상에서 피해 당시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증언하도록 강요하는 등 2차 가해가 반복됐습니다. 활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피해자를 '신천지' 또는 '이단'으로 몰아 교회에서 쫓겨나도록 하거나, 노회가 별도의 치리 없이 가해자의 사직서를 재빠르게 수리하는 등 문제를 은폐·축소하려는 방식으로 교회와 노회가 대응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동 초기부터 한국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저항하고 투쟁해야 할 주요 대상은, 계속해서 드러나는 '목회자 성폭력'과 이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법 및 교단법'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특수한' 구조와 문화는 목회자 성폭력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조건들로 차고 넘쳤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 내외의 어떠한 제재 장치도 없었던 것이죠. 사회 법으로도 교회법에서도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지원 요청은 계속해서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교단을 저희는 '보수 교단'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교단의 신앙 형태는 굉장히 목회자 의존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본인이 주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목회자가 '신앙은 이렇게 해야 돼, 이게 맞는 거야' 하면 그 해석대로 따르는 식의 목회자 중심적 신앙 형태가 많은 것 같아요. 교회 운영이나 신앙적 방향과 관련해서도 목회자의 영향력이 굉장히 크죠. 어떤 교회는 '제왕적'이라고 할 정도로 목회자가 가진 힘과 영향력이 큰 것 같아요."

한 활동가는 위와 같이 특정 교단에서 작동하는 목회자의 권력은 '제왕적'이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그 밖에도 활동가들에 따르면, '신을 대리해 하나님 말씀과 치유의 능력을 전달하는 영적 존재', '세상보다 높은 윤리적·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성인聖人', '영적 아버지'로서 한국 기독교의 목회자들은 교인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신뢰와 발화 권력을 얻게 됩니다. 목회자를 '영적 아버지'이자 '목자'로, 교인들을 '영적 자녀'이자 '양'으로 호명하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적 바탕이 결국 한국교회가 목회자를 중심으로 위계화되기 용이한 구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양하고 종합적인 서비스를 복합적으로 제공하는 '교회'라는 조직의 특성과 기능 또한 목회자의 권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사'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기능을 하는 '돌봄 제공자', 아픈 마음과 몸을 치료하고 진찰하는 '의사', 심리적 문제를 상담하고 해소 방법을 안내하는 '심리 상담사' 등의 역할을 하게 되지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이러한 복합적인 역할과 기능은 곧 막강한 권력으로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자의 제왕적 권력은 특정 상황에서 보다 강화되는데요. 활동가들에 따르면 소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목회자의 결정권과 발화 권력이 높은', '여전히 여성 안수가 허용되지 않는' 매우 보수적인 교단이나, 목회자 중심적·의존적으로 신앙이 형성돼 있는 기독교 조직, 그 밖에도 작은 교회를 단기간에 대형 교회로 급성장시킨 소위 '스타 부흥사', 신학대학교 교수 같은 경우, 그가 속한 조직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현장에서는 논쟁거리가 되곤 합니다. 정작 목회자들 스스로는 그만한 권력이 없다고 느끼거나, 권력은 지양하되 목회자로서의 '권위'는 필요하다는 의견을 많이 주시거든요.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이 권위를 필요로 한다는 뜻일 텐데요.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목회자의 권위와 권력은 무엇인지, 그 힘을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면 기독교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말이죠. 물론 제왕적 목회자의 권력이라는 것은 기독교 내에서도 각 교단의 특성·상황·조건에 따라, 또는 지역과 개인적 요소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고 해도, 가부장적 위계가 견고한 모든 조직의 '장長'이 가진 권력이 막대해질 수 있다는 점은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미 수차례 경험한 바가 있고요. 저는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전체의 가부장성과 남성 중심적 조직 구조에 대해 우리가 진단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정당화를 위한 자원:
'제왕적 목회자'와 '요보호 피해자' 담론

최초의 공청회로부터 '가해자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외쳐 온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맥락 속에서, 피해자 담론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심화하기 위해 여성학자 추지현의 연구1)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특정 조직 내 성폭력 문제가 방관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니, 조직의 명시적 개입과 강력한 치리가 필요하다'라는 방식의 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가해자 처벌을 위한 정당화 '자원'으로"2) 이용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피해 정도나 지속 시간·횟수 등 물리적 치명도가 높을수록, 피해자가 '연약하고 순결할수록', 가해자 처벌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로 더 효과적이게 되죠. 그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 없이 사태가 '심각'할 때 문제 해결 의지가 더 높아지게 마련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이를 뒤집어 보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더욱 반인륜적이고 제왕적인 힘을 가진 '괴물'과 같아질수록 그러한 괴물에게 피해를 입은 불쌍하고 연약한 피해자를 향한 대중적 연민이 일어나기 쉬워지겠죠? 조직의 제재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의 심리적 역동도 활발해질 것이고요. 그래서 운동 주체들은 '상처받은 연약한' 피해자의 인정 투쟁과 함께 가해자가 가진 목회자의 '막강한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도 병행했습니다.

"가해자들이 그동안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강력한 처벌이 상처 입은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에 필요하기 때문에 처벌을 말한 거잖아요? 왜냐면 피해자들이 '내 잘못인가? 나도 가담한건가?' 하며 혼란스러워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종이라는 목회자에 대항해서 이렇게 하는 게 옳은가' 자책을 하니, 당신 잘못이 아니고 명백히 가해자의 잘못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죠. 그래서 정확히 처벌을 해야 한다고 한 것이고요. 이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피해자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엄벌에 처하고 면직시키라고 계속 주장했던 거죠."

우리의 논의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불쌍하고 연약한 요보호 여성 피해자'라는 피해자 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은 직접적으로 겪은 1차 피해에 더해, 자기 경험에 대한 혼란과 자책이 중첩되고 있는 상황을 맞게 됐습니다. 이때 운동 주체들은 피해자의 경험을 '피해'라고 해석하고 호명하는 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혼란 감소와 회복을 꾀했습니다. 또한 가해 행위에 대한 교단적 차원의 명확한 처벌과 기록, 기억 장치가 수반되지 않으면 문제가 반복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더더욱 가해자 엄벌주의가 내포된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엄벌주의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대중의 공감 및 각종 피해자 지원 제도 마련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당위로서, 누가 봐도 고통스럽고 슬픔에 빠진 피해자를 마땅히 보호해야 한다는 '요보호 피해자' 담론과 악랄한 괴물과 같은 목회자를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는 '제왕적 목회자' 담론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히려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 됩니다.

'요보호 피해자' 담론의 실천적 한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런 방식의 논의가 가져올 수 있는 한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연약하고 불쌍한, '요보호 피해자' 담론은 곧 '피해자다움'과 연결돼 결국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잣대로 변질되기도 하거든요. 예컨대, 피해자가 피해 경험 이후 고통스러운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일상을 즐겁게 영위한다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가해자에게 보상을 요구한다거나, 상흔이 남을 만큼 극도로 저항한 흔적을 증명할 수 없을 때 피해자는 '진짜 피해자답지 않다'는 의심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보호받을 만한 피해자를 선별하게 된다는 것이죠.

의도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를 선별해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할 '극악한 성폭력'에서부터 덜 강력하게 처벌해도 되는 소위 '가벼운 성폭력'에까지 폭력을 위계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 혹은 재판위원들이 생각하는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의 전형성에 부합하지 않는 피해자의 경우,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확률이 감소하거나 아예 침묵하게 되기도 합니다.

운동 초기부터 문제가 됐던, 미성년 피해자를 중심으로 장기간에 걸쳐 여러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대중들이 '차마 듣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수위의 폭력 행위를 수반하는, 손에 꼽는 몇몇 성폭력 사건에만 이목을 집중하면, 매일매일 일상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성폭력들을 비가시화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인 것이지요. 그러나 결국 타인의 경계를 쉽게 침해하는 작고 일상적인 폭력이 만연한 조직, 성차별적 언어와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조직에서, 위에 언급한 '심각한 수준'의 성폭력도 발생하기 쉬울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운동 주체들이 발간한 지침서 중에는, 여성 평신도들이 목회자 성폭력에 취약한 이유를 여성들이 후천적으로 의존적·수동적·복종적·감정적으로 사회화하기 때문이라며 심리학적 근거를 든다든지, 성차별적 사회에서 박탈감을 갖게 된 여성들이 종교와 목회자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는 사회학적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의존적 기독교 여성들이 목회자를 신격화·절대화하는 성향 때문에 성폭력에 더 취약한 것이라고 분석하게 되면, 자칫 여성 개인의 의존성과 박탈감, 비이성적 사고와 심리적 취약성을 '병리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교회 성폭력이 마치 여성·피해자의 비합리적인 판단과 오류에서 야기되는 문제로 보이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러한 분석이 모든 여성을 위와 같은 취약한 특징을 가진 '잠재적 피해자'로 전제함으로써 여성 집단 전체를 '요보호'의 자리로 호출하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도 점검해 봐야겠고요. 물론 운동 주체들의 분석 의도는 과거에 그렇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기독교 여성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나, 여성 전체를 객체화·일반화하거나 문제를 파편화시키지 않는 보다 세밀하고 신중한 분석이 필요하겠습니다.

"가해자 처벌이 강조되는 만큼 보호해야 할 피해자에 대한 선별과 검열 역시 강화되고 있다"는 추지현의 분석3)은 우리에게 힌트를 줍니다.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현장에서도 누군가의 피해를 사소화하거나 위계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동시에 실무적 차원에서 가해 행위에 합당한 책임을 부여할 적정한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운동 내부의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질량, 지속 시간과 반복 횟수 등 물리적 차원에서의 치명도를 강조하거나 나열하는 것 외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기독교 성폭력의 피해 의미와 개념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요?

'제왕적 목회자' 담론의 실천적 한계

오랜 기간 헌신해 온 한 활동가가 "목회자 성폭력은 보통 실수로 발생하는 일회성 성폭력은 거의 없다. 그냥 놔두면 (가해자는) 죽을 때까지 성폭력을 할 거다"라고 확언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현장에서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과정과 경험들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증언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은 '제왕적 목회자'라는 용어 외에도 '왕으로 군림하는'이라거나, '신적 존재', '영적 아버지' 같은 용어를 사용해 목회자 성폭력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제왕적 목회자' 담론의 한계로는, 우선 가해자의 범주에 관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매우 심각한 수위의 성폭력을 오랫동안 저지른 '제왕적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은 극히 일부라고 치부되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과 핵심이 완전히 축소되고 변형되는 것이죠. 조직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어쩌다 잘못해서 저지른 일부 목회자의 일탈 문제로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성폭력이 '극악한', '일부', '제왕적'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으로 정의되거나 과대표될 때, 조직 전체에 만연한 경계 침해와 성폭력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지게 되죠. 마치 극악한 일을 저지른 일부 목회자만 해당 교단·교회에서 통제하고 처벌하면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제왕적 목회자' 담론은 "일부 몇몇 목회자의 문제 때문에 모든 남성 목회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방식의 현장 저항을 통과하면서, 성폭력을 구조적 측면에서 조명해 돌파하지 못하고 문제의 원인을 개인화·파편화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이 쟁취하고자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데 이러한 담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여라도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물론 각 교단의 관련 헌법 개정은 최근 2~3년 전에야 비로소 시작돼 아직 초기 단계이므로, 기독교 내에서 '성폭력 엄벌주의'와 '요보호 피해자' 담론에 대한 고민을 주요하게 다루기에는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올해 2월 이 연재의 근간이 되는 학위논문을 발표하면서 '매우 급진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기독교 밖 여성운동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의 섹슈얼리티'나 '가해자 엄벌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지가 꽤 오래입니다. 적어도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전략과 담론을 고민하는 운동 진영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지속적 연구와 고민이 진행돼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특별법이 여성·피해자의
섹슈얼리티를 보장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의 부름에 급진적으로
응답하는 운동의 가능성

이렇게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주체들은 주로 목회자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담·지원하고 사회 법 및 교회법적 대응을 동시 다각적으로 펼치면서, '요보호 피해자'를 보호하고 '제왕적 목회자 성폭력'을 처벌해야 할 교단의 책임을 자원 삼아, 각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목회자 성폭력의 심각성을 기독교 안팎에 고발하고, 교단 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기득권 목회자들을 설득·협상하면서,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담론은 계속해서 구성·재구성돼 왔지요.

조직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의 연약함과 취약성'은 더욱 강조해야 했고, 여성을 대상으로 개인의 성적 만족을 취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서슴지 않는 '제왕적 목회자의 권력'은 더욱 가시화해야 운동적 측면에서 유리했을 겁니다. 사회에 적당한 충격도 줄 수 있었고, 책임자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에도 효과적이었죠.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운동 담론은 가해자/피해자 형태로 구조화됐고, 강한/연약한, 심각한/가벼운, 순결한/문란한 등 수많은 '이분법적' 논리가 작동하게 됐습니다. 결국 극단화된 피해자 담론 구조 안에서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피해자의 섹슈얼리티와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성적 권리에 대한 논의는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됐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각 교단이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폭력특별법이 기독교 여성의 성폭력으로부터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각 교단에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면 기독교 여성이 성적 주체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 여성은 어떤 안전에 대한 욕구와 성적 욕구를 갖고 있을까요? 목회자에게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다면 안전한 건가요? 성폭력 피해자가 됐을 때 우리는 어떤 지원과 권리를 보장받기를 원할까요?

성폭력특별법의 보호법익이 '연약하고 힘없는' 피해자 보호에 그치거나 '극악한' 가해자 처벌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성적 주체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주체성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여성·피해자는 '요보호' 대상으로서 언제까지나 주변화된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지요. 그러나 지난 글들에서 살펴본 대로, 기독교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기독교 조직 내 n차 피해를 감당하면서도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면서 운동에 함께 투신한 매우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들입니다.

사실 운동은 늘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경험에 힘입어 뒤따라가면서 전략을 모색합니다. 우리는 이제 여성·피해자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주체성을 고민하는, 보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기독교 반성폭력 운동 담론과 전략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할 사람은 기독교 페미니스트들, 바로 운동 진영뿐이죠. 이것이 피해자들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일 것입니다.

1) 추지현, "성폭력을 엄벌하다: 2000년대 성폭력 정책 담론의 구조와 효과", <한국여성학 - 제 30권 3호>(한국여성학회), 45~84쪽.
2) 위 논문, 63쪽
3) 위 논문,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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