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 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5년 전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가 인용한 리처드 핼버슨 목사의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초대교회를 그리워합니다. 그때 그 시절 '본질'이 보존돼 있었던 (사실은 본질을 보존하고 있었으리라 기대하는) 순수한 교회의 모습을 그리워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가 선포될 때면, 초대교회가 가졌던 본질에 대한 메시지와 함께, 오늘날 현대 교회는 본질을 떠나버렸으니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개에 대한 메시지가 등장하곤 하지요. 기업이 되기 전, 문화가 되기 전, 제도 및 철학이 되기 전의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현대 교회가 겪고 있는 대다수 문제가 해결될 거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작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촘촘히 살펴보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도 전에 구체적 역사 및 문화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비아)는 바로 이런 모습, 2~4세기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타 교회사 연구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내부 자료가 아닌) 그리스도교 외부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 역사 및 문화와 치열하게 대화를 나누며 점점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 /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 양세규 옮김 / 비아 펴냄 / 384쪽 / 2만 4000원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 /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 양세규 옮김 / 비아 펴냄 / 384쪽 / 2만 4000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로마 사회에 안착할 무렵, 적잖은 로마 시민은 그들을 음란하고 기이한 어둠의 조직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대 그리스도교 외부 자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두고 교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어린 소년을 살해하고 심장을 꺼낸 후 맹세"(61쪽)하는 입교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리스도교 집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며 어머니를 범하는"(60쪽) 천박하고 음란한 행위들이 벌어진다는 풍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로마 시민이 그리스도교를 오해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1장의 주요 인물인 정치가 플라니우스는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혹은 처벌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소문 및 고발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막 등장한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플라니우스는 그리스도교를 두고 "미신, 그저 하나의 낯선 신앙"(67쪽)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사회는 매우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종교, 곧 경건이란 "가족에 대한 존경심,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 로마의 관행과 전통, 물려받은 법률과 조상, (중략) 조국에 대한 충정"(121쪽), 즉 로마제국의 참된 시민이 되는 것이었지요.

로마 사회가 그리스도교를 미신이라 치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로 여겼던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시민사회의 통념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민사회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군 입대를 거부"(136쪽)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는 로마인들에게는 참된 경건, 종교 자체를 모독하는 행위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미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았지요. 이 '미신'을 믿는 이들은 (플리니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파당(헤타이리아)'이 되어 점점 더 제국 전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파당'은 당시 직능단체나 장례·상조 단체 혹은 특정 신을 숭배하는 종교 단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당대 로마 사회의 고위층은 자기들끼리 모여 사교를 나누며 오락을 즐겼습니다만, 하층민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교육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못한"(88쪽) 하층민들은 '파당'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정기적으로 친구와 이웃을 만나고 음식을 나누며 함께 저녁을 보내고 친구의 아내가 죽었다면 함께 슬퍼"(89쪽)하며 사랑과 우정을 나눴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파당'처럼 당대 로마 하층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파당들이 구성원들의 신분·직업·지역을 따졌다면, 그리스도교라는 파당은 그 무엇도 따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남성도 여성도, 종도 자유인도 그리스도교라는 파당에 소속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교의 세력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로마 사회가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지요. 철학·논리학·의학에 밝았던 갈레노스는 그리스도교(및 유대교)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스토아학파 혹은 에피쿠로스학파와 같은) 하나의 철학 학파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광범위한 교제를 나누는 집단이 아닌, 어떤 전망과 신념을 공유하며 이에 따르는 윤리적 실천을 감내하는 공동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그리스도교가 사회에서 분명한 위상을 갖자 로마 사회의 지식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본격적으로 펜을 들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비판했습니다. 앞서 그리스도교를 철학 학파로 여겼던 갈레노스의 경우에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가 믿고 있던 창조주는 "도예공이 점토를 취하듯 주어진 재료를 취해 형상과 아름다움을 지닌 대상으로 빚어내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장인"(169쪽)이었습니다. 즉 형상인과 질료인이 나눠져 있으며, 신이라 할지라도 이미 주어진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로마 지식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창조론 및 신론은 생경했습니다.

성서에 박식했던 포르퓌리오스는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습니다. 당대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 다수는 성경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고, 실제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변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호교론자들이 인용하던 다니엘서 본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다니엘서가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 아니라 "저자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상황"(258쪽)을 담은 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참고로 이는 오늘날 성서학계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주장입니다).

포르퓌리오스의 견해는 모두 남아있지 않으나, 저자의 재구성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제기되는 복음서 본문 사이의 불일치 문제 혹은 복음서의 구약 인용 오류까지도 그가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소개합니다. 또한 철학자 켈소스 및 율리아누스 황제의 경우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묘한 불연속성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유산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고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중략) 유대 율법을"(217쪽) 저버린 집단이라며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날카롭고 (때로는 정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살아남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 가운데 몰락한 건 그들이 수호하고자 했던 제국, 로마였지요.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의 진리성 혹은 성경의 역사성을 두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질문 대다수는 이미 2~4세기무렵 로마의 지식인들이 던졌던 '오래된' 질문들입니다(이 질문들이 오래됐다는 점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질문의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바뀐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던 지식인들이 던졌던 질문들을, 이제는 그리스도교 신학 내부에서 던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로마 지식인들의 질문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갈레노스의 비판을 마주해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창조론과 신론을 다듬었습니다. 포르퓌리오스의 비판을 마주해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우의적 해석 방법을 발전시켰고, 나중에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성경의 장르 및 기록 연대와 관련된 논의를 고도화하고 확장해 나갔습니다. 켈소스와 율리아누스 황제의 비판은 홀로코스트 이후 뒤늦게 열매를 맺어 구약성경의 가치 및 성경이 가지고 있는 유대적 배경을 다시금 조명하게 됐으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는 이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 사회 속에서 이미 완결된 어떤 본질을 타협하지 않고 수호해야 했던 폐쇄된 성이 아니었다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때로는 당대 문화에 저항하고 때로는 소통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예식을 더 깊고 풍요롭게 가꿔 나갔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넘어, 전 세계로 계속 뻗어 나갔습니다. 저자 로버트 루이스 윌켄은 책을 마무리하면서 켈소스, 포르퓌리오스, 율리아누스 같은 비판자들 덕분에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유산이 더욱 풍성해졌다며 그들에게 공을 돌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듯 풍성해진 것은 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닙니다. 로마로 대표되는 당시 세계는 그리스도교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문화적 지평과 지적 유산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로마 문명과 그리스도교 둘은 만나서 뜨겁게 사랑했고, 둘은 모두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역사는 어떤 엑기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해·대화·갈등·분투 가운데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성장의 모습, 그 성장을 이끌어 나가는 생명을 보여 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본질을 지켜야만 하는 수호대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그리스도교 유산을 성숙시키는 동시에,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문화 가운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도록, 생명의 원천에서 생명을 받아 생동감 있게 모두를 성장시키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그리스 로마 세계의 사고방식, 그 범주와 관습을 깨트렸다. 그리스도교의 상상력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형성되고 자라났다. 물론 고대 문명에 뿌리내린 사고의 지평 안에서 활동했지만,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이를 매우 깊은 수준에서 바꾸어 갔다.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했다." (18쪽)

홍동우 / 설교도 잘하고 싶고 책도 잘 읽고 싶은 욕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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